엥? 왜 그런 질문을….
“자네에게 일을 하나 맡기고 싶어. 말하자면 탐정놀이 같은 건데. 우리 회사 부장 5명의 명단이 이 봉투 안에 있네. 한 달 안에 이 부장들의 장단점을 보고해줘. 이 중 한 사람만 이사로 승진시킬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퇴직시킬 거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마. 경영진에선 대충 판단 끝냈어. 다만 후배들의 시각을 참고하기 위해서야. 윤 대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참고하지 않을 수도 있어. 중요한 건,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네나, 나나 사표 써야 돼.”
“근데….”
“근데 왜 자네에게 이 일을 시키냐는 거지? 자넨 사보담당이잖아. 각 부서의 누굴 만나도 사보에 실을 거라고 하면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
회사가 다면평가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자신에게 그 일이 맡겨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부장들을? 그것도 승진과 퇴사의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이렇게 민주적이었나?
모두 분칠을 하고 있어!
회사엔 대략 서너 개의 라인이 있다. 그 라인 안에 들어야 승진도 하고, 어려움도 피할 수 있다. 물론 라인의 꼭대기가 물을 먹으면 라인 전체가 물을 먹어야 한다. 라인에 선다는 것은 도박 같은 거다.
윤 대리는 어떤 라인에도 서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갈등 회피적인데다, 어느 한 라인에 서면 술자리가 제한된다. 그건 싫다. 박 부사장은 이런 윤 대리의 ‘무색무취’한 성격을 간파하고 이런 일을 맡긴 것 같다.
그런데 봉투에 들어 있는 부장들은 누굴까. 엥? 어제 술 마신 한 부장도 있네. 사장 비서실 김정도 부장도 있고. 어라, 2년 전 최고물산에서 스카우트한 홍보실 나영만 부장? 이쒸! 직속상관을 내가 어떻게 평가하라고…. 가만, 우리 회사의 유일한 여자 부장인 사회공헌팀 신수미 부장도 있네. 금융팀 이수치 부장은 내가 잘 모르는 분인데. 하여튼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말이 탐정놀이지, 살생부 만들기에 동참하라는 거 아니야!
▼ #Scene 2
“뭐야, 한잔하자고? 오호! 윤 대리 웬일이야? 어제는 도망가 놓고.”
공연기획팀 한공연 부장. 80학번인 줄 알았는데, 부사장이 준 자료를 보니 78학번이다. 대학에선 건축공학을 전공했는데, 공연을 좋아해 직장생활은 공연예술 분야에서 시작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시나리오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고 한다. 젊을 때는 여자깨나 따랐을 법한 외모에, 키도 크다. 늘 목을 감추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게 특징. 목이 긴 사람들은 어깨싸움에 약하다. 갈등을 싫어한다.
“한 부장님,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난 후배가 술 산다는 소리가 제일 반갑더라. 오늘은 노래방 갈 거지?”
“부장님은 노는 것도 좋아하고 일도 재미있게 하시는 것 같은데, 고민 같은 거 생기면 누구에게 털어놓으세요?”
“공연예술 분야는 분장하는 곳이야. 특수분장도 하지. 가면을 쓰기도 하고. 투명해 보이지만 자신의 속내는 털어놓지 않아. 모두 분칠을 하고 있어서 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공연예술 쪽에서 일하면 낭만적이고 신비로울 것 같지? 천만에. 마음을 털어놓고 술잔을 기울일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 난 그래서 윤 대리가 좋더라. 너는 순수해 보여.”
한 부장, 벌써 취했나. 하기야 그는 회사에선 늘 호탕한 척해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기는 했다. 술 한잔하자고 하면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나, 사실 우리 팀 사람들과 술 잘 안 해. 너는 특별 케이스라고.”
공연예술팀은 돈을 버는 조직이라기보다는 회사 이미지를 관리하는 부서에 가깝다. 공연예술팀을 관할하는 최고 임원은 K상무인데, 곧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 같다. 회사의 주력부서가 아니다보니 임원 교체가 잦다. 임원들도 이 부서를 잠시 머물러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내가 여기 부장으로 있으면서 무려 7명의 임원을 모셨어. 그분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첫째, 그분들은 늘 자신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해. 둘째, ‘원칙에 따라 일한다’고 하지. 근데 다 거짓말이야. 문제가 생기면 부하들에게 떠넘겨. 자리보전하고 싶은 게지. 원칙 운운하면서 변칙에 능해. 지들이 공연을 알아? 예술을 아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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