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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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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끝이라며 쌓은 호산장성이 멀리 보인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서당에서 공부하고 현대 교육에다 중국 유학까지 늘어지게 끌다가 석사니 박사니 모자도 둘러쓰고, 중국 글을 쓴답시고 끄적거리기 4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고문(古文)은 고문답지 못하고 현대문 또한 끙끙거린다. 그런데 연암은 행운유수(行雲流水), 유려한 필체로 한문 일기에 그치지 않고 시, 소설, 수필, 장르를 자유자재 넘나들 뿐 아니라 적시적소에 중국 현지 사람들에게서 얻어들은 백화(白話·중국 구어체)를 혼용하기도 했다. 그 글솜씨에 나는 혀를 몇 번이나 내둘렀다.

지금껏 ‘열하일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사색당쟁(四色黨爭)에 짓눌렸던 조선 중기를 치유하려는 실학의 대표 주자로 부각되면서 연암의 정치적 평등주의, 경제적 이용후생, 사회적 풍자·비평의식, 문학적 사실주의, 과학적 반(反)미신 사상들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4년 11월에 국내에서 출간된 북한판 ‘열하일기’ 또한 연암의 이러한 성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가원 역주의 ‘국역 열하일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1955년 북한에서 국역된 ‘열하일기’를 남한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利用厚生과 시인의 가슴

북한판 ‘열하일기’는 그 해설에서 ‘열하일기’를 세계적인 장편 기행문이자 철학·정치·경제·천문·지리·풍속·여가·고적·문화 등을 망라한 계몽서요 백과전서적 방대한 저술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신분 평등과 소유의 제한 등의 포부를 편다. 그런데 그 이론의 근거가 지나치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무신론에 바탕을 두고, 실천방법 또한 계급투쟁적인 사회주의 시각을 노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연암에겐 두 가지 명제가 뚜렷했다. 하나는 평등이요 다른 하나는 풍요였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상하(上下)·빈부(貧富)·적서(嫡庶)·관민(官民)의 차별을 타파하겠다는 이상이자, 가난·봉건·미신 등을 몰아내고 물질과 생명이 함께 넉넉히 아우러지는 풍요,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따로 있다. 연암의 뜨거운 가슴, 시인(詩人)의 가슴으로 사회와 나라, 겨레와 생활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 격정을 좋아한다. 오로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지만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마흔 살 중년의 따뜻한 인문적 정회를 말고삐처럼 잡고 있는 연암이 좋다. 그래서 어렵게 시계를 226년이나 뒤로 돌리고 감히 연암과 동행키로 결심했다.

연암은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어쩌다 할 수 없이 시험장에 나가더라도 답안지를 내지 않거나 노송이나 괴송을 큼직하게 그려내던 반골이었다. 연행에 앞서 금강산, 송도, 평양,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지를 유람하고, 연암(燕巖)골(황해도 금천)에 은둔하기도 했는데, 여행은 독왕독재를 즐겼다. ‘열하일기’에도 그런 행적이 여러 차례 드러난다. 슬며시 아무도 몰래 이탈했다가 밤새워 구경하고, 맨 먼저 일어나 말안장을 씌우고 김삿갓처럼 혼자 길을 떠나기도 했다. 가다가 사람을 집어 삼킬 듯 흉용한 물살을 만나면 무서워 뒷걸음치기보다 철퍼덕 뛰어들어 밤을 꼴깍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는 정이 넘쳤다. 6월24일, 의주 땅 구룡성을 하직할 때, 하인 장복이가 동전 스물여섯 닢을 털어 술 한 병을 사왔기로 그 술을 혼자 마시기에 앞서 술 한 잔을 문루(門樓)의 첫째 기둥에 뿌려 도강(渡江)이 무사하길 빌었고, 또 한 잔을 둘째 기둥에 뿌려 창대와 장복을 위해 빌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을 땅에 뿌려 애마를 위해 빌었다.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그로부터 사흘 뒤, 오늘날의 출입국관리소에 상당하는 중국의 책문(柵門)을 통과하곤 중국의 선진적인 풍물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토록 동경하던 곳이건만 연암은 “그만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다”며 “온몸에 불을 끼얹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난한 조국을 생각하며 얼마나 기가 꺾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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