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 &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가정이 최우선이요, 때를 가려 나서야 治國平天下”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7-04-11 16: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남경필 의원은 미국 유학시절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고인의 뜻을 이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 덕 본다’는 곱지 않은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기 영역을 구축해온 남 의원 곁엔 아버지를 대신한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이다. 그는 남 의원의 정치적 행보는 물론 가정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 부자간보다 더 애틋한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 &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웃는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닮은 김장환 목사(왼쪽)와 남경필 의원.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金章煥·73) 목사와 3선의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42) 의원은 부자간 같다. 크지 않은 키와 부드러운 인상이 꼭 닮았다. 1998년 남 의원의 부친 남평우 전 의원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로 김 목사와 남 의원은 실제 부자간 못지않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남 의원이 김 목사를 처음 만난 건 대학생 때다. 남 의원은 대대로 불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자랐는데, 그 무렵 어머니가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아버지도 교회에 나가고, 급기야 온 집안 식구가 기독교로 개종(改宗)했다. 수원중앙침례교회는 김 목사가 미국 밥 존스 신학대를 졸업한 뒤 1960년부터 목회를 해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권유에 못 이겨 교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남 의원의 신앙심은 그다지 신실하지 못했다. 김 목사와도 가깝게 지내는 편이 아니었다.

    청년 남경필은 연세대를 졸업한 후 ‘경인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 199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예일대 석사(경영학)를 마치고, 뉴욕대와 폴리테크닉대에서 도시공학을 공부하는 등 지적 유랑을 하던 그에게 1998년 3월13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속히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서둘러 공항으로 나갔지만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14시간 내내 눈물을 흘린 그는 빈소에 도착해 임종을 못 지킨 한스러움에 가슴을 쳤다.

    4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마지막 날에 어머니는 그를 조용히 불러 말했다.

    “아버님 생전 뜻이 네가 정치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아버지 영정 앞에 꿇어앉아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5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급서한 남 전 의원 장례식엔 문상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남 의원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보궐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결심을 굳히기 앞서 의논할 상대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그의 손을 잡고 김 목사를 찾았다. 김 목사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집사이던 부친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연배도 비슷해 평소 목사와 신도 관계를 넘어 우정을 나누었다.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는 삶의 자세도 닮았다. 김 목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온 그에게 우선 당의 공천을 받아오라고 일렀다. 무소속으로는 당선될 확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천부터 받아와라”

    “(정치를 하기엔) 아직 젊은 남경필이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으로 왔어요. 유학생 신분으로 학업을 계속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할지, 아니면 아버지의 유언대로 정치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고 온 거죠. 제 아들들과 친하게 지내던 그를 보니 가슴이 저렸어요. 험난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기에는 아직 젊고 순수했죠. 하지만 부친의 사망이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준 것은 틀림없었어요. 참신하고 때 묻지 않은 젊은이가 정계에 진출하면 우리 정치에도 활력소가 되리라고 생각했죠. 그를 잘 이끌어 주는 것이 친구이던 남평우 집사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고요.”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 &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

    김 목사는 남 의원에게 평소 “겸손하고, 많이 베풀라”고 당부한다.

    김 목사의 충고대로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그는 지역구에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선거구인 수원시 팔달구는 부친의 지역구였지만 남경필이란 이름은 유권자에게 낯설기만 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상대 후보에 밀렸다. 이 때 김 목사가 발 벗고 나섰다. 자연스레 교인들이 자기 일처럼 선거운동을 도왔다. 처음엔 누구도 그의 당선을 확신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열흘을 남겨두고 서서히 판세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신망 있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지역구민들이 그에게 대를 이어 잘 해보라는 뜻으로 격려를 보낸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남 의원이 당선되자 김 목사는 자기 아들 일처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당선 인사를 하러 온 그에게 김 목사는 ‘최선을 다해 많은 것을 베풀라’를 좌우명으로 삼으라고 했다. “지역구민에게, 그리고 국민에게 사랑, 지식, 친절과 신앙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라”고 당부했다. 이는 다름 아닌 김 목사의 생활신조이기도 하다. 6·25전쟁 당시 미군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17세 때 한 미군 상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이 오늘날의 김 목사가 있게 된 계기다. 김 목사는 자신이 도움 받은 것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돕는 것을 삶의 신조로 삼았다.

    만 33세에 국회에 입성한 남 의원은 당선 직후부터 주목을 받았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세습했다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정계에 입문한 그가 어떻게 의원직을 수행할지가 정계 안팎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정치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기회는 도둑을 만들 수도 있고, 위대한 인간을 만들 수도 있다”는 18세기 독일 물리학자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의 말처럼 그는 부친의 음덕을 꽃으로 피워내겠다고 다짐했다.

    “기회가 위대한 인간을 만든다”

    김 목사는 이런 그에게 늘 “겸손해라, 앞에 나서지 마라”고 충고했다. 지난해 1월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을 앞두고 있을 때다. 김 목사는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한 경기도지사 후보 중 한 사람이던 남 의원에게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선거운동 하느라 정신없는데 목사님이 밥을 먹자며 오라셨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싶어 좀 불길한 마음으로 집사람과 함께 갔어요. 목사님이 늘 제게 강조하시던 ‘사람은 때를 잘 가려야 한다’는 말씀이 떠올라서요. 목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대뜸 ‘이번에는 김문수 의원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어요. 경선에 이기겠다는 투지로 불타고 있던 제게 하신 말씀치곤 심하셨죠. 하지만 목사님도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을 거란 걸 알기에 ‘생각해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어요. 평소 새벽기도를 한 적이 별로 없는데, 이튿날 새벽기도를 하다 경선출마를 포기했죠.”

    김 목사는 왜 남 의원에게 경선 포기를 권유했을까.

    “남 의원이 3선이긴 하지만 아직 젊어서 만일 경기도지사로 당선된다고 해도 임기를 마친 뒤의 행보가 걱정스러웠어요. 준비된 자에게는 큰 결과가 오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효과를 볼 수 있지요. 결국 제 조언대로 경선 출마의 꿈을 접는 걸 보고 대견스러웠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니까.”

    김 목사와 남 의원을 잇는 다리 노릇을 해온 김 목사의 아들 김요셉 목사는 “아버지께서 늘 남 의원의 정치 행보에 제동을 거시는 편인데, 남 의원이 한 번도 그 뜻을 거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김 목사가 남 의원의 결심을 만류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지난해 8월 남 의원이 한나라당 경기도당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것은 김 목사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김 목사의 권유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남 의원은 경기도당위원장 선거 출마에 별 뜻이 없었다. 그런데 뒤늦게 선거에 뛰어들어 김영선 의원을 제치고 당선됐다.

    “목사님이 (훗날 큰일을 하려면) 기초부터 닦으라고 하시며 경기도당 위원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셨어요. 평소 ‘나서지 마라, 겸손하라’고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뭘 하라고 권유하신 거였죠. 참으로 기뻤어요. 목사님이 저를 인정하신다는 뜻이거든요.”

    “너희 아버지는 안 그러셨는데…”

    김 목사와 남 의원은 종종 골프를 함께 친다. 그런데 지금껏 남 의원이 필드에서 김 목사를 이겨본 적이 없다. 경기에서 불리해질 것 같으면 김 목사가 “남 의원, 장로 안 할 거야?” 하며 은근히 협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 의원은 허허 웃으며 이기려는 의지를 접고 만다.

    김 목사의 유머감각은 설교 때 빛을 발한다. 쉽고 재미있는 일상의 예화를 성경의 깊은 뜻과 접목시켜 감동을 주는 김 목사의 설교는 종교를 떠나 명연설이라 할 만하다. 따분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김 목사의 설교를 남 의원은 주의 깊게 보고 듣는다. 김 목사의 손동작과 시선 처리, 음성의 높낮이 등을 기억해뒀다가 정치연설을 할 때 응용한다. 흥겨우면서도 짧고 힘찬 그의 말솜씨는 김 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권위적이지 않고 잘 웃는 인상 또한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한 김 목사와 꼭 닮았다.

    어떤 이들은 남 의원을 ‘오렌지’라고 부른다. 정형근 의원이 “부친은 훌륭한 분이지만,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고 오렌지족으로 컸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2003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남 의원이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60대 용퇴론’ ‘5·6공 세대 용퇴론’을 주장했을 때 나온 말이다. 남 의원은 그때 처음으로 김 목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남 의원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어른을 공경하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치적으로 멀리 내다볼 때 위험천만한 주장이지요. 정치인이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그래서 불러서 주의를 줬어요.”

    남 의원은 김 목사가 자신을 나무라기보다 염려하는 마음이 컸다는 걸 잘 안다.

    “저를 꾸짖으신 게 아마 그때가 처음일 거예요. ‘너희 아버지는 안 그러셨는데, 너는 왜 그러냐? 그건 옳지 않다’고 하셨죠. 그렇게 된 배경을 차분히 설명 드리고 안심을 시켜드렸는데 그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셨는지 2005년에 함께 외국에 갔을 때 목사님이 그때 일 꺼내시더라고요. 걱정 많이 하셨다고.”

    김 목사는 유학시절 밥 존스대 동창인 네 살 연하의 투르디(Gertrude Stephens) 여사와 결혼해 3남매를 뒀다. 김 목사가 ‘단호한 사랑’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온 덕분에 세 자녀 모두 혼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딛고 당당하게 제 몫을 하고 있다. 큰아들 김요셉 목사는 남 의원과 절친한 친구이고, 그 우정은 그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요셉 목사는 남 의원의 가정적인 면이 자신의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모범’ 꿈꾸다

    “남 의원은 가정과 자녀에 매우 헌신적이에요. 아이들 교육에 관해서도 부인에게 전담시키지 않고 일부러 시간을 내 아이들과 놀아주고 여행도 가죠. 어떨 때 보면 저보다 오히려 남 의원이 우리 아버지 자식 같아요.”

    남 의원 역시 자신이 가정을 최우선으로 여기게 된 데는 김 목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대학생 때부터 목사님 댁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굉장히 바쁘고 엄해 보이는 목사님이 집안에선 그렇게 다정다감하실 수가 없어요. 특히 시간이 날 때마다 자녀 하나 하나와 집중적으로 놀아주시죠. 그래서 목사님 자녀들은 목사님이 선교 및 방송국 일로 바쁘셔도 아버지의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진 않는 것 같았어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이상적인 가정이었죠. 저도 결혼하면 저런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가정이 풍비박산이면 아무 소용없다는 게 그의 인생철학이다.

    그의 삶 곳곳에 영향을 끼친 김 목사지만, 남 의원이 김 목사를 존경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김 목사가 35년간 목회를 해온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목사인 두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 목사는 2004년 퇴임하면서 수원중앙침례교회 부목사로 시무했던 고명진 목사를 후임자로 정했다.

    “종교계에서 김장환 목사님을 종교지도자의 모델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인이 되려거든 남경필처럼 되라’는 말을 듣는 ‘정치인의 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적 기술과 정체성, 그리고 철학이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진정한 리더로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타고난 정치 기술을 기반으로 중도 보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리더로서의 철학을 다듬는 중이라고 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