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이종욱 지음/ 김영사/ 525쪽/ 1만5900원
‘화랑세기’는 신라시대 귀족 김대문이 저술한 책으로, 당대 화랑들을 대표하는 풍월주 32명의 삶을 기록한 일종의 전기다.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나 고려 후기에 승려 각훈이 정리한 ‘해동고승전’에서도 ‘화랑세기’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는 이 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 오랫동안 사라진 책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1989년 ‘화랑세기’ 발췌본이 나타난 데 이어 1995년에는 발췌본의 원본에 해당하는 162쪽짜리 ‘화랑세기’ 필사본의 존재가 알려졌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남당 박창화씨가 1930~40년대 일본 궁내성 도서료(오늘의 서릉부)에서 근무할 때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필사자의 역할과 발견되기까지의 경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즉 근친혼, 통정 및 사통 등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섹스 스캔들’이 궁궐과 화랑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화랑세기’는 후대 사람들이 신라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위작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선덕여왕의 정치적 라이벌로 나오는 미실이 진흥왕, 진지왕 부자를 섬기고(후궁),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대에는 정비(正妃)가 되고자 하며, 세종 전군이라는 본남편을 두고도 애인 설원랑과 사통(私通)하여 아들을 낳는 등 한 여자를 중심으로 복잡한 남녀관계 구도가 펼쳐지는데도 시청자들이 부담 없이 이를 즐기는 것을 보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진위 논란을 떠나서 드라마 ‘선덕여왕’을 제대로 따라잡으려면 ‘화랑세기’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화랑세기’ 연구의 권위자인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이와 관련해 수많은 논문과 책을 썼다. ‘대역 화랑세기’(소나무, 2005)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번역해 주해를 단 것이고,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 2000)는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시대 풍속사를 정리한 책이다. ‘색공지신 미실’(푸른역사, 2005)은 왕들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며 30년간 정권을 장악한 신라 여인 미실에 대한 이야기이고, 가장 근래에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의 일대기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 2009)를 펴냈다. 물론 ‘춘추’ 역시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태종무열왕의 삶을 재구성한 것이다.
미실의 색공은 어디까지?
먼저 드라마 ‘선덕여왕’의 전반부를 이끌어간 주인공 미실에 대해 알아보자.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의 행적은 드라마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드라마가 ‘15금’이라면 책은 ‘18금’ 수준이랄까.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6세 풍월주인 세종 전군의 정부인이자 11세 풍월주 하종의 어머니로 소개된다. 전군이란 왕의 후궁에게서 난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종 전군은 누구인가? 지소태후와 태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진흥왕과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