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100년 전 우리는…되새기는 부끄러운 역사

  •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9-11-03 16: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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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우리는…되새기는 부끄러운 역사

    ‘한일병합사’신기수 지음/ 이은주 역/ 눈빛/ 328쪽/ 3만5000원

    1895년 10월8일,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낭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을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을미사변). 당시 광화문을 경비하던 병사들은 10여 분 만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빴고, 폭도는 거침없이 경복궁 건청궁까지 난입하여 한 나라의 국모를 칼로 베고 사체를 불태웠다.

    을미사변의 충격을 딛고 고종은 1897년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며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따라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국왕은 황제로 승격되었다. 민비도 이때 ‘명성’이라는 시호를 얻어 이후 명성황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허약한 체질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05년 일본은 소위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자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을사늑약),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폐위하고 황태자를 새 황제로 즉위시킨다. 순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망국(亡國)의 어둠은 더욱 짙어갔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고 그럴수록 일본은 차근차근 ‘병합’을 준비했다.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하자

    1909년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한일가설(日韓一家說)’로 병합론에 힘을 싣자 그해 10월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한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한일조약은 이토 히로부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되었으므로 만국 공법에서는 무효이며, 민족 · 국가의 존망 위기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 된 자로서 도리가 아니다”는 내용의 마지막 진술로 한일조약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고 1910년 3월26일 처형당한다. 안중근 의사의 사생취의(捨生取義)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은 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인시켰다. 그날 밤 데라우치는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바야가와, 고니시, 가토가 이 세상에 있다면 오늘밤 저 달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꼬?” 고바야가와 등은 모두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왜장들이다. 이 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루지 못한 조선 정복을 이뤄냈다는 데라우치의 자만심을 드러낸다.

    모든 과정은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병합되길 원했고, 일진회 조선인들이 병합되길 희망하여, 일본 천황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위장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은 강압에 못 이겨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에 서명 날인했으나 비준서에 해당하는 공포 조칙에는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비준을 거부했다.



    을미사변 114년, 을사늑약 104년, 안중근 의거 10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99년…. 2009년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슬픈 역사다. 우리는 개천절, 광복절과 같이 경축할 일들을 기념할 뿐 부끄러운 역사는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유대인은 다르다. 유대문화 전문가인 현용수 박사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는 것은 후손들에게 ‘고난의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현용수의 인성교육 노하우’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민간 차원에서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첫 사업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앞두고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통감 관저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

    출판계도 이 시대를 재조명하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일병합사 1875~1945’(눈빛)다. ‘사진으로 보는 굴욕과 저항의 근대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사진집은 재일교포로 한일관계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신기수씨가 주로 일본인이 찍은 조선 관련 사진들을 수집하여 1987년 일본에서 출간한 것이다. 엮은이는 고인이 되었지만(2002년 작고) 그가 수집한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들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군국주의 선동용으로 이용

    ‘한일병합사’가 굴욕의 역사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1875년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을 앞세워 조선 침략을 꾀하는데, 그 시작이 일본 함대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투한 사건이었다. 이듬해 조선은 일본의 무력에 무릎을 꿇고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된다. 이어 1890년 서울에 일본공사관이 설치되었고 이들과 함께 일본의 사진가들도 현해탄을 건넜다.

    100년 전 우리는…되새기는 부끄러운 역사

    ‘한일병합사’신기수 지음/ 이은주 역/ 눈빛/ 328쪽/ 3만5000원

    그 가운데 일본 왕실 전용사진사인 무라카미 덴신도 있었다.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그는 명성황후와 왕궁 관계자들의 사진을 찍어 일본군 수비대에 넘겼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을미사변 때 왕궁의 수많은 여인 가운데 명성황후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본의 아마추어 사진가였던 하야시 다케이치는 1888년 조선 일본공사관에 부임하자 조선의 성과 성문, 풍속 등을 촬영하기 시작했고 이 사진들은 그의 사후인 1892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일병합사’에는 조선의 풍물을 소개하는 사진 외에도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자주 등장한다. 포승에 묶인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한 의병장들, 고문당하는 모습, 교수형을 당한 뒤 흔들리는 시체들, 효수된 목. 왜 사진가들은 이처럼 참혹한 장면들을 열심히 찍었을까? 신기수씨는 설명한다.

    “동학당 지도자의 잔혹한 처형과 처형한 후의 사진은 일본에서 온 사진사가 촬영한 것이었다. 조선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사회개혁을 하려는 동학 농민들의 무장봉기를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으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서울과 인천에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종군사진가는 무거운 대형 카메라를 여러 사람이 운반하게 하여 전쟁사진을 찍어서 일본으로 보내 군국주의 선동용으로 사용하게 했다. …일본의 사진은 전쟁과 함께 발전했다.”

    이 책의 앞표지는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천황)가 순종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줄 오른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일본 황족의 일원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순종의 동생인 의민태자 이은, 요시히토 황태자, 둘째 줄 오른쪽부터 조중웅, 한 사람 건너 가쓰라 타로(일본 총리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며 한국병합을 성사시킨 인물), 도고 헤이하치로(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제독),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등이 함께 찍었다. 두 달 뒤 조선의 황태자 이은은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들은 3년 뒤 벌어질 한국병합을 알고 있었을까?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경술국치의 주인공들이 자리했다는 사실로도 흥미롭다. 책의 뒤표지는 1945년 8월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투사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이 책은 일본인이 찍은 사진 속에서 치욕의 우리 역사를 정리한다.

    100년 전 우리는…되새기는 부끄러운 역사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오타베 유지 지음/ 황경성 역/ 동아일보사/ 328쪽/ 1만3000원

    일본의 한국병합 과정을 또 다른 시선으로 다룬 책이 있다. 일본 시즈오카복지대학의 오타베 유지 교수가 쓴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원제 이방자)’(동아일보사)은 앞에서 소개한 사진 속의 어린이 이은과 결혼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된 이방자 여사의 평전이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나시모토미야 마사코. 나시모토미야가는 황족의 일원으로 마사코는 히로히토 황태자(훗날 쇼와 천황)의 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황태자비 후보가 결정되기 1년 반 전인 1916년 영친왕 이은과의 혼약이 발표되어 동갑내기 황태자와의 인연은 멀어졌다. 이때 이미 대한제국은 사라졌고 이왕가는 일본 왕공족으로 편입되었다.

    한일융화의 상징이 된 정략결혼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은 일본 황족 가문의 딸로 자라나 정략결혼으로 이왕가에 시집가서 특권을 누리다가 종전(제2차 세계대전) 후 평민으로 신분이 하락하여 한일 양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남은 생을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던 한 여자의 일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는 비교적 담담하게 이방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한일관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특히 결혼과 관련하여 망국의 황태자이긴 해도 여전히 많은 재산과 특권을 누리고 있던 이은을 ‘좋은 혼처’로 여기고 결혼을 추진했던 방자의 어머니 이쓰코의 심경과 황족의 경우 나라와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던 방자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는 대목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들이 이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든 일본 정부는 한일융화의 상징으로 삼아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 결혼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는 이왕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다

    이 책의 역자인 홋카이도 대학의 황경성 교수는 한일 양국의 전후 세대 가운데 이방자라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불행했던 역사를 씻은 듯 말끔하게 청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듯이 시간이라는 비인위적인 도구에 의해 ‘망각’이라는 위안을 얻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망각이 때로는 평화와 평온을 주지만, 확실한 기억이라는 망령은 그런 평화로움을 결코 원하지 않기에 질투하듯 둘 사이의 관계를 들쑤시곤 한다.”

    1875~1945년 우리의 모습은 결코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은 치욕의 사진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덮어둔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듯 더 이상 망각 속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00년 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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