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만여 명. 적지 않은 숫자다. 아니, 엄청난 숫자다. 6만여 명이 어떤 일로 인해 일시적으로 한자리에 모였다가 흩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스펙터클’이다. 더욱이 그 일이 자신의 정치적 관점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오로지 일순간의 강렬한 열정을 맛보기 위해 교통 혼잡과 주차 전쟁을 무릅쓰고 기꺼이 돈을 내고 바쁜 시간을 쪼개 모이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 사건이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로 하여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 현대 도시와 그 문화를 성찰하고자 한다면 틀림없는 ‘답사 1번지’가 될 것이다.
현대적 삶은 규율과 반복이다. 규율은 유무형의 총합이다. 그 속에 법적인 구속도 있고 민간의 풍습도 있다. 어느 것이든 한 개인이 그것을 거역하면 곧 구조의 보복이 엄습한다. 현행 법체계를 부정하는 정치범이나 풍속사범이나 일정한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이 일일이 간섭하지 아니하는 민간의 풍습에도 무형의 가시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무력한 개인은 그 울타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술기운에 취해 야밤에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거나 더러 소변을 참지 못해 어두운 골목의 전신주 아래 방뇨하는게 감히 범하는 일탈일 터. 그 순간에도 미력한 개인의 등에는 누가 볼까 두려운 기미가 얹혀 있다. 율법과 풍습의 제재 속에서 현대의 작은 인간은 살아간다.
그리고 반복이 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삶이란, 오늘날에 있어 실로 위험천만한 길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고사하고 하루가 백날같이 여일(如一)한 것이 어쩌면 축복이리라. 반복의 삶, 그 바깥은 위험하다. 테두리 바깥으로 뛰쳐나가거나 밀려나가는 것은 이 사회가 보장하지 않는 방식의 삶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자의로 선택하든 타의로 밀려나든, 반복의 삶 바깥은 전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반복의 삶을 승인하면 무엇보다 안전이 주어진다. 개인과 그 가족의 안전은 철두철미한 반복으로 인해 얻어진다. 오전 7시20분 서울지하철 신도림 환승통로 혹은 8시35분 서울시청 앞 지하통로를 기억해보라. 엄청난 인파가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늘의 삶을 반복하기 위해 앞 사람의 등줄기에 밴 땀 냄새를 맡으며 걷고 또 걷는다. 비루해 보여도 실로 엄숙한 생존의 행렬이다.
사랑, 여행, 예술
규율과 반복. 다만 이것뿐인가? 단 한 번 살고 나면 어쩌면 그것으로 그만일 뿐인 우리의 현대적 삶이 오직 이 명령에 의해 운행되는 것이라면, 이는 ‘죽은 삶’이라는 형용모순이 현실성을 얻는 기이한 상태가 되고 마는 것 아닌가.
물론 우리는 나날이 일상의 대안을 찾는다. 사랑을 하고 여행을 하고 예술을 찾는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일상의 관습적 틀을 벗어나게 하는 묘약이다. 사랑은 타인의 정신과 육체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존엄한 행위다. 사랑이 없는 연대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의 사랑이나 노년의 사랑 또한 청년의 사랑과 진배없는 엄숙한 일이다. 다만 이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내밀한 삼투과정이다.
그리고 여행이 있다. 모듈화한 이 도시를 벗어나는 기막힌 드라이브! 여행! 거대한 자연은 나약한 개인을 너그러이 감싸준다. 동해의 일출이나 서해의 일몰 혹은 오대산 비경 속의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작은 ‘나’는 큰 ‘나’의 품속에 잠이 들 것만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행은 낮은 숨소리의 적묵(寂默)이며 여전히 사적인 운행이다.
마지막으로 예술이 있다. 예술은 규율과 반복에 얽매이면 곧바로 사망선고를 받는 예술가에 의해, 현대의 작은 개인에게 예기치 않은 충동과 활활 불타오르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렇기는 해도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 역시 한 개인이 세상의 소음과 차단된 미술관 속을 거닐거나 컴컴한 공간 안에 들어가 말없이 스크린을 응시하는 행위로 요약된다. 요컨대 사랑, 여행, 예술 이 세 가지는 우리를 규율과 반복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구출해내는 아름다운 묘약임에 틀림없으나 대단히 은밀하고 사적이며 나지막한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