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희 교수는 “지휘의 매력은 나의 해석을 바탕으로 음악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왜 지휘자가 되려 하느냐’고 물으셨어요. 제가 ‘나는 지휘자도 하나의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다만 연주하는 악기가 사람일 뿐이다. 다른 악기는 모두 여자도 연주하는데 왜 지휘만 할 수 없다고 하느냐’고 되물으니 고개를 끄덕이셨지요.”
그는 김 교수에게 시험을 치를 자격을 줬고, 평가가 끝난 뒤 “여자라는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네가 가진 능력은 인정한다”며 독일어로 ‘Yes’를 뜻하는 ‘야’와 ‘No’를 뜻하는 ‘나인’ 사이의 대답 ‘야인’으로 그를 합격시켰다.
“일단 제자로 받아들이고부터는 한 번도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았어요. 독일에서 결혼한 뒤 임신했을 때도 오히려 격려해주셨지요.(김 교수의 남편은 유학 시절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경희대 음대 정준수 교수다) 그 덕분에 임신 7개월 때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기도 했어요.”
라벤슈타인 교수의 가장 큰 가르침은 그것이라고 한다.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오케스트라 앞에 섰을 때는 그저 지휘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여성이 권위 있는 모습을 갖는 걸 불편해 하기 때문에 여성 지휘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묻자 김 교수는 “나는 지휘를 하면서 한 번도 권위를 내세운 적이 없다”고 답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에서 제 별명은 ‘살인미소’입니다. 연습 도중 누군가 실수를 하면 정확히 그를 향해 웃음을 날리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틀린 걸 알고 있다, 지금 그 부분에 문제가 있다, 다시 연습하라’는 메시지를 미소로 전달합니다. 그럼 단원들은 ‘저 사람이 음악 전체를 꿰뚫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존중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수많은 단원을 이끌며 음악을 창조해야 하는 지휘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권위가 아니라 실력입니다.”
수십 개의 악기가 일제히 울리는 가운데 음정과 박자를 하나하나 구별해 듣는 것은 굉장한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일. 김 교수는 “다행히 체력을 타고났다”고 했다.
“하루에 세 팀, 9시간을 연달아 지휘한 날도 있어요. 하지만 연습이 아무리 길어져도 절대 의자에 앉지 않습니다. 끝까지 서 있지요. ‘여자라서 약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지난 20년간 지켜온 저만의 원칙이에요.”
김 교수의 팔에 단단히 잡힌 근육은 이처럼 남다른 노력으로 ‘최초’의 길을 걸었을 그의 지난 20년을 짐작케 했다. 이제 국내 최초 여성 상임지휘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그의 목표는 과천시립아카데미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키우는 것. 이 오케스트라는 최근 2010년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의 교향악 페스티벌 ‘영 유로 클래식’에 한국 단체로는 최초로 초청돼 성가를 높였다. 김 교수는 “우리 오케스트라가 과천의 자랑, 나아가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더 이상 여성 지휘자가 특별하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성시연, 여자경, 채지은 등 많은 후배가 멋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지요. 숙명여대 제자들 중에도 지휘자의 꿈을 꾸는 이가 적지 않아요.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이들이 정말 훌륭한 지휘자로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