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인생에는 방에 틀어박혀 돈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09-10-06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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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지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워런 버핏에게 그처럼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일 수 있었던 이유,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남다른 가르침을 전해주는 ‘현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않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워런 버핏의 영혼의 반려자이자 ‘샌프란시스코의 테레사 수녀’로 불렸던 수지 버핏이 그 주인공이다.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1. 가수로 데뷔했을 당시의 수지 버핏. 2. 3. 남편 워런 버핏과 함께 찍은 중년과 노년 시절의 모습.

    세계 금융의 중심 월스트리트에서 무려 50년 이상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2008년과 2009년 연속 포브스지 세계 최고 부자로 기록된 워런 버핏. 그는 2006년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의 85%를 기부해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회고록을 펴낸 적이 없는 그가 한 여성 애널리스트에게 털어놓은 ‘스노볼(snowball·랜덤하우스)’에는 그의 역정이 상세히 담겨 있다. 저자 앨리스 슈뢰더는 워런 버핏으로부터 받은 자료와 본인은 물론 가족, 친구,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무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5년간 버핏에 매달렸다. 직장에 사표까지 쓰고 써 내려간 역작이었다.

    저자는 버핏이 당부한 대로 “평이 엇갈릴 때는 아첨이 덜한 쪽으로 해달라”는 주문을 충실히 따랐다. 따라서 칭찬 일색이 아니다. 실수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는 평범한 인간, 그러나 평생 돈을 향해 집요하면서도 정직하게 살아온 한 인간의 여러 면모를 ‘팩트’를 바탕으로 빼곡히 담았다.

    그중에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워런의 사생활이 눈길을 끈다.

    워런 버핏 곁에는 두 여자가 있었다. 조강지처 수지와 그의 말년을 돌보고 있는 애스트리드다. 그중에서 수지 버핏은 오늘의 워런 버핏을 만든 ‘내조의 여왕’이자 그에게 끊임없이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준 ‘솔 메이트’였다. 일 중독자 남편 때문에 심한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자의식을 버리지 않고 뒤늦게 가수로 데뷔했으며, 별거를 선언하면서도 여자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남편을 위해 또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줄 정도로 관대했다. 이번 호 주인공은 워런의 또 다른 자아, 수지 버핏 여사다.



    첫눈에 반한 여자

    워런은 10대 시절에도 여자보다 숫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여덟 살 때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며 병뚜껑을 모아 종류별로 분류해 어떤 상품이 인기가 좋은지 알아내는 일을 즐겼을 정도로 사업가적 호기심을 타고난 그는, 고교시절 신문배달을 할 때에는 독특한 배달방식으로 고참 어른들보다 돈을 더 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늘 서툰 일이 있었으니 바로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이었다. 여자 앞에 서면 벌벌 떠는 부끄러움 때문에 데이트 신청하기를 끔찍이 싫어하던 그에게 첫눈에 반한 여자가 나타났다.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 입학 1년 전인 1950년 여름 여동생 버티가 소개해준 수전 톰슨이었다(‘수지’는 그녀의 애칭). 버티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인 수지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수줍음 많은 오빠에게 소개한 것이었다.

    워런은 수지를 보자마자 자기보다 내면적으로 훨씬 성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따뜻하고 상냥한 그녀에게 금방 호감을 느꼈다.

    수지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녀가 특히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릴 적 병치레가 잦았던 그녀는 각종 알레르기를 달고 살았고 만성 중이염 때문에 생후 18개월까지 고름제거를 위한 절개수술을 열두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병약했다. 류머티스로 고생해 유치원 생일 때는 다섯 달이나 집안에 갇혀 살기도 했다. 한창 뛰어놀 때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수지는 사람이 늘 그리웠다. 나중에 종교나 인종을 뛰어넘어 많은 친구를 사귀는 포용력을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지는 끼가 많은 여자였다. 고교 때는 연극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미스 센트럴(고등학교)’로 뽑히기도 했다.

    워런을 만났을 당시 수지에게는 이미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친구는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중산층 가정의 수지와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처졌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러시아계 이민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유대인이었다. 당시 수지의 고향 오마하는 종교가 다른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면 세금을 물어야 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편견이 많은 곳이었다. 소수자에 대한 연민이 깊었던 수지는 ‘말도 안 되는’ 전통에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워런 버핏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애스트리드 멩크스.

    마침내 결혼

    개신교도였던 부모는 수지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지가 선(禪)불교를 공부하며 마음을 달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러는 사이 워런의 구애가 시작됐다. 워런은 수지의 부모를 공략하는 전술을 폈다. 마침 수지의 아버지는 네브래스카 주 하원의원이던 워런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을 위해 한때 선거본부장을 맡을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다. 수지의 부모는 똑똑하고 개신교도이며 공화당원인 워런을 최고의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봐도 최고 신랑감이었다. 4선 하원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좋은 집안에 미국에서도 대졸자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1940~50년대에 최고경영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입학을 앞둔 수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지는 워런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데이트 때마다 온통 주식 이야기뿐인 재미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워런을 점점 알게 될수록 수지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류층이지만 특권의식이 없었고 겸손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수지를 흔들리게 한 것은 자신감 뒤에 가려진 허약한 내면이었다.

    알고 보면 워런은 우울증과 신경질 때문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쓸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반복했던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하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주식에 관한 한 거침없는 달변, 비범한 천재의 분위기 밑에는 부서지기 쉽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당시 수지는 오마하대학교 학생이었고 워런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성인이었지만, 워런은 수지 앞에서 세 살짜리 아이 같았다. 그는 수지에게 점점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수지는 워런의 내면을 치유해주고 싶었고 워런은 수지를 통해 보다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보살핌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워런은 훗날 회고를 통해 아내 수지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나한테는 온갖 방어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지만이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수지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수지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52년 4월19일 결혼한다. 워런의 나이 스물한 살, 수지는 열아홉 살이었다. 수지는 결혼 여섯 달 만에 임신을 해 대학을 자퇴했다.

    내조의 여왕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맡는 게 당연한 시대였지만 두 사람의 역할은 극단적이었다는 게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의 말이다. 수지는 “남편의 야망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꺼이 그를 감싸주는 고치의 껍데기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극정성으로 워런을 내조한 것이다.

    남편 워런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일 중독자였다. 아이들과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서도 벤치에 앉아 투자 관련 자료를 읽을 정도였다. 일을 뺀 나머지 일상에서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아침 출근 옷을 고르고 입을 때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발소에 가는 것도 싫어해 수지가 이발을 해줘야 할 정도였다.

    워런은 퇴근하면 “나 왔어요” 고함을 친 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로 바로 가 신문을 읽었다. 아침 식탁에서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에 오면 말이 별로 없었다. 일에 관련한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유일한 취미였던 브리지 게임도 금방 시들해졌다. 워런에 따르면 “수지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상대방이 이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는 것. 수지가 소화 장애로 구토할 때 대야를 갖다달라고 하자 물 거르는 여과기를 가져다줄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지는 이런 남편에게 실망하는 대신 “아예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포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그를 고치는 일’을 끈기 있게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는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니까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다짐하곤 했다.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에 따르면 수지는 1960년대 미국 중상류층 주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두 손으로 세 개의 공을 다루는 저글링을 하듯 능숙하게 해냈다. 시댁 식구를 돌보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시아버지가 결장암에 걸렸을 때는 최대한 남편이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하며 시아버지의 회복을 돕고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이혼 문제로 삶의 나락에 빠진 시누이를 구원한 것도 그녀였다.

    나아가 그녀는 가족 돌보기를 넘어 흑인 빈민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역사회 해결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나쁜 감정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오마하 현인(賢人)’의 솔 메이트 수지 버핏

    2007년 5월 아들 피터(왼쪽), 딸 수지(오른쪽)과 함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 참석한 워런 버핏.

    ‘내 남편이 이렇게 부자였나’

    젊은 시절 워런은 돈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많은 돈을 모으고 싶어했고, 돈을 모으는 과정을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돈을 포기하라고 하면 뼈다귀를 지키려는 개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구독료를 아끼기 위해 지난 잡지만 볼 정도로 적은 돈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분투했던 그를 두고 이웃들 사이에서는 인색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차를 빌려 쓴 뒤에도 기름을 채워 넣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날 수지가 집안청소를 하다가 남편 책상에 있던 수표뭉치를 무심코 버린 적이 있었다. 뒤늦게 안 수지는 기겁을 하고 쓰레기 소각장으로 달려갔고, 다행히 수표뭉치는 태워지기 직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수지는 수표뭉치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기껏해야 장당 25달러나 10달러일 거라고 생각했던 수표들은 수천달러짜리였다. 20대 중반의 남편이 이미 큰 부자라는 것을 수지는 그때서야 알았다.

    수지는 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생활비만 받으면 만족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데 익숙했다. 마침내 집을 갖게 되었을 때 수지는 남편으로부터 수리비를 타내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워런은 벽 색깔이나 벽지를 바꾸는 데에 왜 돈을 써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수지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워런에게서 돈을 더 빼내려고 갖은 수를 썼다. 몸무게를 53kg으로 유지할 테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돈을 달라고도 했다.

    이러다보니 워런의 아이들은 아빠가 부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다른 집 애들처럼 용돈을 받기 위해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해야 했다. 물론 남보다 모자라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한번도 아빠로부터 당연한 듯 용돈을 받지 못했다. 극장에 가도 팝콘조차 사주지 않는 아빠였다. 워런은 결혼한 딸이 집수리에 돈이 필요하다며 빌려달라고 하자 “돈을 빌릴 거면 은행으로 가야지”하며 거절했다. 아이들을 검소하게 키우는 데에는 수지도 동의했다. 이들 부부가 가르치고 싶어했던 것은 “돈은 중요하다”는 교훈이었다.

    ‘벌자’(워런)와 ‘베풀자’(수지)로 돈에 관한 가치관이 달랐던 두 사람은 때로는 이혼도 불사하는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믿었기에 원만한 부부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행복하길 바랐고 아내는 남편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결국은 스타일의 차이였다고 할까. 워런은 산 정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스타일이었고 수지는 천천히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스타일이었다.

    워런에게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업가의 본능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박애적인 선한 시민의 본능이 있었다. 무엇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피부색깔과 재산의 유무에 신경 쓰지 않고 이웃을 돌보는 아내를 좋아했다.

    가정부가 들어와 집안일에 여유가 생기자 수지는 점점 바깥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친구와 함께 잠시 화랑 일을 하기도 했다. 워런은 아내가 관심을 기울일 대상을 집 바깥에서 점점 더 많이 찾아나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지역사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워런이 점점 부자가 되면서 시작됐다. 수지가 남편을 향해 “이제 돈 버는 일에 그만 집착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966년 기준 미국 내 최고 부자가 된 남편을 향해 수지는 “인생에는 방에 틀어박혀 돈 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고 다그치곤 했다. 하지만 워런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수지는 변하고 있었지만 워런은 변하지 않았다.

    수지가 밖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술이나 여행, 박물관, 극장 같은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남편 대신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반면 남편은 새로 벌였거나 이미 벌인 사업들 때문에 오마하를 떠나 있는 일이 갈수록 잦았다. 집보다는 사무실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많았다.

    수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우울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대학시절 마음을 주었던 남자친구나 테니스 코치와 각각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포착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수지에게 워런과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비록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해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워런을 향해 고지식하고 돈에 얽매여 산다고 놀리긴 했어도 남편은 기본적으로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것은 캐서린 그레이엄이라는 여자가 등장한 이후였다. 어릴 적 신문배달을 한 이래 유달리 신문에 관심이 많았던 워런은 공식석상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던 캐서린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함께 뉴욕이나 워싱턴의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심지어 캐서린 집에 머물면서 파티에 참석했다. ‘워싱턴포스트’ 이사를 맡기도 했던 워런은 캐서린을 통해 당시 미국 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인사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반면 경영에 문외한이었던 캐서린으로서는 워런이 구루(스승)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자 갑자기 ‘워싱턴포스트’를 물려받은 캐서린은 자잘한 것들을 끊임없이 워런에게 물었다.

    쉰아홉 살의 그레이엄이 마흔여섯 살 버핏에게 애교 섞인 몸짓으로 자기 집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이 한 자선 행사장에서 포착된 것을 비롯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더 자주 목격됐다. 바야흐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가십성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워런과 수지 사이의 미묘한 균형은 깨졌다. 남편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에 변함은 없었지만, 수지는 더 이상 남자에게 매달리는 불쌍한 여자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행동에 분노한다는 말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이들도 속을 많이 썩였다. 큰아들은 학교와 룸메이트에 적응하지 못해 대학을 여러 군데 옮겨 다녔고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딸은 록밴드에 심취했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빠진 수지가 기댄 것은 뜻밖에도 음악이었다. 그녀는 작곡가인 조카가 만들어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 가수가 되었다. 비록 무대는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수지는 충만함을 느꼈다. 아내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에서 벗어나 한 여성으로 자기 인생의 무대에 새롭게 선 느낌이었다.

    수지는 마침내 홀로서기를 선언한다. 언니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집을 마련한 것이다.(물론 남편 돈으로) 수지는 워런에게 “당신을 떠날 생각은 없다. 갈라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전과 다름없는 부부다. 샌프란시스코에 나만의 공간을 만든다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미술품과 음악과 극장이 가득한 도시에 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별거의 고통

    워런은 충격을 받았다. 수지 마음이 왜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마흔일곱 살이던 워런은 자신이 상상하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재산은 7200만달러나 되었고, 자산가치 1억3500만달러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가 가진 신문사 ‘오마하 선’은 언론계 최고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현재의 삶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계속 돈을 버는 게 그가 원하는 전부였다. 비록 돈에 사로잡혀 있다고 아내가 생각할지언정 자신은 아내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함께 ‘팀’으로 무리 없이 25년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워런은 수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혼도 아니고 잠시 따로 사는 것뿐이었다. 이제 아이들도 제 갈 길을 가는 상황에서 아내도 하고 싶은 걸 할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내가 단지 변화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별거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워런의 삶을 흔들었다.

    워런에게 수지 없이 살아가기란 고통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했다. 날마다 맹렬한 두통에 시달렸다. 참다 못해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들고 수지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미 자신이 원하는 걸 워런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워런 버핏이 털어놓은 회고다.

    “(수지가 내 곁을 떠나버리게 만든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95% 아니 99%가 내 잘못이다. 수지는 언제나 나에게 주파수를 맞췄는데 나는 수지에게 맞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아내는 내가 사람 노릇을 하도록 붙잡아줬다. 아이들을 키운 것도 95%가 수지였다. 수지는 내로라하는 남편을 둔 여느 부인들처럼 누구 부인입네 거들먹거리며 살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이 수지를 사랑했다.…(별거는)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남편의 흔들림을 보고 수지가 선택한 것은 남편을 도와줄 또 다른 ‘여자’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수지의 남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수지가 택한 여자 애스트리드 멩크스는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카페의 지배인이었다. 1946년 서독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라트비아 사람이었다. 부모는 애스트리드가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오마하로 이사했다.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던 아버지는 운동장 보수 일을 했고, 애스트리드를 비롯한 형제들은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죽자 고아원에서 자랐다.

    불안한 삼각관계

    그녀는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대신 여러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성품이 착해 예술가들, 방황하는 독신자들, 동성애자들이 축제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수지와도 인연을 맺었다. 골격이 작고 피부가 맑으며 금발과 세련된 자태를 가진 전형적인 북유럽 미인형이었다.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는 수지와 애스트리드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음식솜씨가 뛰어났던 애스트리드는 워런 부부 집에 손님이 올 때 일을 돕기도 했다. 특히 워런이 좋아하는 탄수화물이 가득 든 프라이드치킨과 으깬 감자, 고기 국물, 알을 뜯어내지 않은 상태의 옥수수 같은 음식을 잘 만들어 워런을 즐겁게 했다.

    수지는 애스트리드에게 워런을 보살펴줄 것을 부탁했다. 애스트리드는 이따금씩 워런이 혼자 있는 집으로 가서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리라고는 수지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애스트리드는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를 버리고 워런의 집으로 들어갔다. 워런, 수지, 애스트리드 사이의 묘한 삼각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때로 불안했다. 워런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수지에게 여전히 잘하려고 노력했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애스트리드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워런이 결코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지와 애스트리드는 각자 맡은 역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애스트리드는 공식적인 ‘워런 버핏의 아내’ 자리를 전적으로 수지에게 양보했다. 두 사람의 혼인 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그저 자신은 집에서 워런을 돌보는 집사나 가정부 역할에 충실하고 만족했다.

    그녀는 버핏보다 16살이나 어렸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여자였지만, 고급 프랑스요리와 좋은 포도주를 잘 알았다. 밖으로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요리를 하고 정원을 꾸미고 싼 물건을 찾아다니는 게 관심의 전부였다. 펩시콜라를 사고 빨래를 하고 집을 돌보고 워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음식을 만들고 전화를 받고 필요할 때 동행해주는, 그야말로 워런이 원하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워런과 함께 있는 것말고는 자신의 헌신에 대한 어떤 보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기를 내세우는 성격도 아니었고 말도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에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대화를 듣는 성격이었다. 버핏의 명성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녀의 생활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집 부근에 얼쩡거리는 얼뜨기들에게 붙들려 가끔씩 질문세례를 받는 게 고작이었다.

    이에 비해 수지는 ‘워런 버핏의 부인’이라는 후광을 누리면서 그 역할과 관련 없는 영역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버핏 재단도 운영했고 워런의 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 역할도 했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버핏 그룹의 정기모임, 연말연시 가족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물질과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 ‘샌프란시스코의 테레사 수녀’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녀의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워런의 재력 덕분이었다. 관대하고 손이 크다는 수지의 명성은 모두 워런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수지에게 인색했던 워런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수지를 실망시켰던 것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수지가 청구하는 모든 영수증에 사인했다.

    그는 수지를 위해 비서를 고용했고 집도 한 채 더 사주었다. 세 자녀에게 5년마다 한 번씩 생일날 100만달러를 주자는 의견도 받아들였다.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난 대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엄청나게 많았던 수지는 마법사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롭고 활기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 사람 모두 각자 처한 자리에서 만족하는 최선의 위치를 고른 셈이었다.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사람답게 워런은 애스트리드와의 동거를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기자들의 질문에 딱 한 차례 공식적인 해명을 했다.

    “만일 관련된 사람들을 (질문하는) 당신이 안다면, 이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죽음, 그리고 빈 자리

    절묘한 삼각관계에 금이 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수지의 병 때문이었다. 수지는 비장과 췌장 사이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고 자궁절제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워런과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기로 한 날짜를 며칠 앞두고 장 폐색증으로 입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정밀검사 끝에 구강암 3기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수지는 처음엔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부했으나 워런의 집요한 설득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워런은 수지가 자기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기가 죽고 나면 수지가 가족을 평화롭게 이끌 것이고 재단도 알아서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스트리드도 잘 돌볼 것이고 어떤 반목과 불화도 다 매끄럽고 따뜻하게 녹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자기 장례식도 잘 치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수지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워런은 수지를 지극정성으로 찾았다. 주말마다 그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언제나 남이 주는 걸 받기만 했던 이 남자는 남에게 베푸는 걸 배우고 있었다. 비로소 아내를 보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지도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워런과 함께 지냈다.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수지는 200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워런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

    수지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식이 운영하는 ‘수전 톰슨 버핏 재단’에 기부했다. 이제 빈 자리는 애스트리드가 메울 차례였다. 그녀는 워런의 어엿한 공식적인 동반자가 되었다. 빌 게이츠 부부와도 정기적으로 어울렸다.

    수지가 죽고 난 2년 뒤, 워런은 자신의 일흔여섯 번째 생일에 딸의 집에서 애스트리드와 결혼했다. 가족만이 함께한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워런이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는 순간 애스트리드는 눈물을 쏟았다.

    현인(賢人) 버핏

    워런 버핏의 사생활은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혹자는 그가 현대판 1부2처제를 살았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사생활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워런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그 매력에는 그의 엄청난 재력도 포함될 것이다. 아내 수지조차 비록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에게 상처를 받고 별거까지 단행하지만 그에 대한 존경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는 ‘아내’라는 법적 제도적 지위는 하나도 누리지 못하면서도 그림자 삶을 자처했던 애스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워런을 찾은 이유는 그가 통이 크고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보고 욕심을 내야지 코앞의 욕심을 바라보지 말라”고 했다. 본질을 볼 줄 알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감각도 훌륭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조언을 듣기 원했다. 워런은 기꺼이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는 돈을 추구했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았다. 어릴 때 꾸었던 꿈보다 훨씬 더 거대한 부를 이뤘지만, 거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돈을 더 많이 더 빨리 벌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를 흘려보냈다. 원칙과 정도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렸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주변엔 사람들이 몰렸다. ‘워런 버핏’이라는 이름에는 흔히 재계의 거물이 주는 위압감 대신 존경심이 먼저 일었던 것이다.

    버핏은 삶의 지혜를 많이 얘기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말 중에 압권은 거의 전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면서 한 발표 연설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50년하고 한 달 전에 나는 작은 투자회사를 세우고 기꺼이 동업자가 되어서 나에게 15만달러를 투자한 사람 일곱 명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돈을 맡긴 이유는 자기들보다 돈을 더 잘, 많이 불려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50년 뒤 나는 나보다 돈을 더 잘 쓸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만,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생각은 보통 잘 하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내 돈을 잘 불려줄까’라는 분야에서는 기꺼이 전문가에게 맡기지만 자선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자선과 관련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은 투자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자선은 투자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1930년대에 태어났으니까요. (그것은)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은 훌륭한 분들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이 특수한 사회 속에서 (나는) 균형이 치우친 혜택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보다 오래전에 태어났거나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혜택의 양상은 달라졌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의 배분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시장경제체제 덕분에 나는 다른 어떤 시공간에서 살 때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나는 재산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하는 보관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왕조시대에서처럼 대를 이어 재산을 물려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열악한 삶을 사는 60억 인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아내 수지도 동의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올바른 목표와 훌륭한 철학을 바탕으로 성별과 종교 피부색 지역을 따지지 않고 전세계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자 온 열정을 다해 집중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이 결정을 내리기란 너무도 쉬웠습니다.”

    ‘참고도서’

    ‘스노볼’-이 책의 국내 번역서는 1권 1028쪽, 2권 812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원저자의 공력도 공력이지만 번역자의 공력도 대단하다. 분량에 압도되지만 번역이 물 흐르듯 되어있어 읽기가 쉽다. 원고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이 책에서 재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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