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런 버핏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애스트리드 멩크스.
개신교도였던 부모는 수지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지가 선(禪)불교를 공부하며 마음을 달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러는 사이 워런의 구애가 시작됐다. 워런은 수지의 부모를 공략하는 전술을 폈다. 마침 수지의 아버지는 네브래스카 주 하원의원이던 워런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을 위해 한때 선거본부장을 맡을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다. 수지의 부모는 똑똑하고 개신교도이며 공화당원인 워런을 최고의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봐도 최고 신랑감이었다. 4선 하원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좋은 집안에 미국에서도 대졸자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1940~50년대에 최고경영대학인 펜실베이니아 와튼 스쿨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입학을 앞둔 수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지는 워런에게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데이트 때마다 온통 주식 이야기뿐인 재미없는 남자였다.
그렇지만 워런을 점점 알게 될수록 수지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류층이지만 특권의식이 없었고 겸손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수지를 흔들리게 한 것은 자신감 뒤에 가려진 허약한 내면이었다.
알고 보면 워런은 우울증과 신경질 때문에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쓸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반복했던 어머니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하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주식에 관한 한 거침없는 달변, 비범한 천재의 분위기 밑에는 부서지기 쉽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
당시 수지는 오마하대학교 학생이었고 워런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성인이었지만, 워런은 수지 앞에서 세 살짜리 아이 같았다. 그는 수지에게 점점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수지는 워런의 내면을 치유해주고 싶었고 워런은 수지를 통해 보다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보살핌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워런은 훗날 회고를 통해 아내 수지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나한테는 온갖 방어기제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지만이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설명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수지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수지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52년 4월19일 결혼한다. 워런의 나이 스물한 살, 수지는 열아홉 살이었다. 수지는 결혼 여섯 달 만에 임신을 해 대학을 자퇴했다.
내조의 여왕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맡는 게 당연한 시대였지만 두 사람의 역할은 극단적이었다는 게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의 말이다. 수지는 “남편의 야망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꺼이 그를 감싸주는 고치의 껍데기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극정성으로 워런을 내조한 것이다.
남편 워런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일 중독자였다. 아이들과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서도 벤치에 앉아 투자 관련 자료를 읽을 정도였다. 일을 뺀 나머지 일상에서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아침 출근 옷을 고르고 입을 때도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발소에 가는 것도 싫어해 수지가 이발을 해줘야 할 정도였다.
워런은 퇴근하면 “나 왔어요” 고함을 친 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로 바로 가 신문을 읽었다. 아침 식탁에서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에 오면 말이 별로 없었다. 일에 관련한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유일한 취미였던 브리지 게임도 금방 시들해졌다. 워런에 따르면 “수지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보다 상대방이 이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다”는 것. 수지가 소화 장애로 구토할 때 대야를 갖다달라고 하자 물 거르는 여과기를 가져다줄 정도로 무심한 남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지는 이런 남편에게 실망하는 대신 “아예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포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그를 고치는 일’을 끈기 있게 해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는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니까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다짐하곤 했다.
‘스노볼’의 저자 앨리스에 따르면 수지는 1960년대 미국 중상류층 주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두 손으로 세 개의 공을 다루는 저글링을 하듯 능숙하게 해냈다. 시댁 식구를 돌보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시아버지가 결장암에 걸렸을 때는 최대한 남편이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하며 시아버지의 회복을 돕고 시어머니를 위로했다. 이혼 문제로 삶의 나락에 빠진 시누이를 구원한 것도 그녀였다.
나아가 그녀는 가족 돌보기를 넘어 흑인 빈민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역사회 해결사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나쁜 감정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