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호

헛발질 인턴 정책 예고된 실업 대란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10-07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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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발질 인턴 정책 예고된 실업 대란
    K씨는 4월 A은행에 인턴사원으로 취업했다. 계약기간은 9월 말까지. 이후엔 다시 ‘백수’가 된다. 인턴 채용 공고에는 ‘인턴십 우수자 정규직 채용시 우대’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정작 별다른 ‘우대’ 정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다른 지원자들과 똑같이 원서를 쓰고,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K씨는 “인턴 기간 내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윗분들 눈치 보며 자리를 지켰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일찌감치 그만두고 취직 준비에만 매달린 친구들이 더 똑똑했던 것 같다”고 했다.

    올가을, K씨 외에도 많은 청년이 우울한 추석을 맞게 될 것 같다. 상반기에 시작된 각종 인턴 프로그램이 하나 둘 마무리되면서 ‘돌아온 백수’가 사회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추석이 무서운 청년들

    4월 한국전력이 채용한 인턴사원은 525명. 이 가운데 6개월 계약기간을 채운 439명이 9월 말 전원 ‘백수’가 된다. 한전이 인턴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인 20개 대형 공공기관 가운데 청년인턴의 정규직 전환이나 계약 연장을 검토하는 곳은 한국도로공사 한국농어촌공사 수출입은행 인천국제공항공사 4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16개 기관의 인턴들은 계약 만료와 동시에 취업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관공서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일하는 행정인턴 역시 줄줄이 실업자 신세다. 정부가 2월 행정인턴 및 공기업 인턴제를 시작하며 채용한 인턴은 공공기관 1만 2000여 명, 중앙 및 지방정부 1만 7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짧게는 3개월부터 길게는 9개월까지 계약을 맺었다. 역시 늦가을이 지나기 전 모두 기간이 만료되는 셈이다.



    국무총리실은 8월 공보비서관실에서 근무하던 행정인턴 1명을 문화체육관광부 별정직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인턴은 정규직 전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채용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서울 시내 한 관공서에서 행정인턴으로 일해온 Y씨는 “시작할 때만 해도 관공서에서 일한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인정해줄 곳이 없을 것 같다. 그동안 실무를 배운 게 아니라 그저 구경만 했다. 내년 초 나올 새로운 졸업생들과 취업전선에서 경쟁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고 했다.

    ‘88만원 세대’ 저자인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는 “원래 인턴은 채용을 전제로 한 개념인데, 정부는 개념 자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인턴 정책 때문에 비정규직만도 못한 초단기 일자리가 양산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기업 등에) 인턴이 정규직에 응시할 경우 인센티브를 부여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채용 계획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또 인턴 모두를 정규직으로 뽑으면 역차별의 문제가 발생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올 초부터 최근까지 정부와 지자체, 중소기업 등에서 각종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마련한 일자리는 6만6000여 개. 여기에 채용된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올 것으로 예상되면서 고용시장에는 태풍 전야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계약 만료를 앞둔 인턴들이 ‘인턴 경력’이라는 유리한 ‘스펙’을 갖고도 신규 졸업생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인턴 기간에 사실상 실무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기 때문.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십이 아니다보니 기업체나 관공서에서 이들에게 정식 업무를 맡기지 않은 것이다. Y씨는 “주사님에게 일을 좀 달라고 하니 ‘네가 업무를 처리하면 나중에 인턴을 그만뒀을 때 책임 소재가 문제된다. 미안하지만 시킬 게 없으니 알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금융기관의 경우도 현금이 오가는 업무 특성상 몇 개월 뒤 그만둘 인턴에게 제대로 된 일을 주기 어렵다. 결국 인턴들은 민원인 안내나 복사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나 소속감이 생길 리 만무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청년인턴 관련 카페를 보면 “오늘도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만 했다” “이젠 나한테 걸레질까지 시킨다. 그만둘까보다” 따위의 글이 넘쳐난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대졸 미취업자들이 행정조직에서 인턴 업무를 하며 경력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그런 잡일을 하는 것보다는 영어, 전문강좌 등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게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년 백수 대란

    ‘인턴무용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9월 초 행정안전부는 정부기관에서 일한 행정인턴 가운데 3분의 2가 취업에 성공했다고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행정인턴들은 “의미 없는 통계를 발표해 현행 인턴 제도의 문제점을 덮으려 한다”고 반박한다. 문제로 지적하는 부분은 행안부가 올 초부터 8월까지 중앙행정기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한 행정인턴 1만9242명 가운데 퇴직자 4335명을 대상으로 취업 여부를 조사했다는 점. 행안부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64.7%인 2806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을 전체 인턴 대비 취업률로 계산하면 14%대에 불과하다.

    9월말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는 한 행정인턴은 “행안부 발표 내용을 보고 인턴 모두가 웃었다. 올 초에 행정인턴으로 뽑힌 사람이 8월 전에 퇴직했다면 인턴 기간에 계속 취업을 준비하다 성공한 뒤 그만뒀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나. 그걸 어떻게 ‘행정인턴 경력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포장하는지 기가 막힌다”며 “정말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들려면 9월 이후, 아직 1만5000명이나 남아 있는 행정인턴이 정말 이 경력을 발판으로 취업하는지를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그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체감하는 취업 경기가 최악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위기감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통계청의 고용동향에 따르면 7월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 3.7%의 두 배가 넘는 8.5%다. 여기에 인턴들이 쏟아져 나오고, 내년 초 대학 졸업자들까지 더해지면 청년실업은 한층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신규 채용 규모가 나날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매출액 상위 30대 그룹 중 공기업을 제외한 23개사의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채용 규모는 19개사 1만5035명. 지난해 하반기보다 3.4%가 줄어들었다. 공공기관 채용은 아예 꽁꽁 얼어붙었다.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인 20개 대형 공공기관 가운데 하반기 직원 채용계획이 있거나 채용 일정을 진행 중인 곳은 기업은행과 한국농어촌공사, 한국수력원자력 3곳뿐. 대한주택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철도공사 한국토지공사 5곳은 지난해 이후 신입직원을 한 명도 뽑지 않았다. 정부가 4월 28조4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며 ‘민생 안정을 위한 일자리 추경’이라는 별칭까지 붙였지만, 기대와 달리 고용시장에는 찬바람만 불고 있다.

    헛발질 인턴 정책 예고된 실업 대란

    최근 한양대에서 열린 채용 박람회에서 구직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각 기업이 마련한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고용대책이 예비 실업자와 실직자들에게 한시적이나마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대량 실업난을 억제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최근의 ‘인턴 대란’ 같은 또 다른 문제점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삼성경제연구소 류지성 연구위원은 “청년인턴이나 희망근로 등 급한 불을 끄기 위한 긴급 처방은 있는데, 취약한 고용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언 발에 오줌 누기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인턴 채용을 통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추진 중인 인턴 교사 채용 정책도 그중 하나다. 7월 중순 발표된 채용 공고에 따르면 인턴 교사의 신분은 ‘공무원이 아닌 근로자’로 급여는 한 달에 120만원, 계약기간은 4개월이다. 담당 업무는 정규직 교사의 수업 준비 지원, 학생들의 보충수업 및 생활지도 등으로 정해져 있다. 교과부는 당초 교사자격증 소지자 가운데 이 같은 인턴 교사 1만6250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원자가 턱없이 부족하자 ‘4년제 대졸자’ 등으로 자격 요건을 낮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시도 교육청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자격증을 가진 예비교사 대부분이 하반기에 치러지는 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다, 일반 대졸자도 ‘고용 보장 없는 4개월짜리 아르바이트’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시 교과부가 추진 중인 대졸 미취업자 지원사업도 난항을 겪고 있다. 정부는 올 하반기부터 대학 졸업생 중 미취업자를 출신 대학에서 채용하거나 교육하는 ‘미취업 대졸생 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들을 6개월간 학내 인턴직원으로 채용하거나, 취업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해 참여하도록 하면 필요비용의 50∼70%는 국가가 지원하겠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7월 말 각 대학을 통해 참가신청을 마감한 결과 신청자는 예상 인원의 7.6%인 6260명에 불과했다. 신청 대학도 4년제, 전문대 통틀어 71곳에 그쳤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인턴 자리를 제안하는 방식으로 실업 문제를 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인턴을 몇 번 돌다보면 결국 계약직 같은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를 꺼린다”고 설명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비율은 대략 10명 중 1명 꼴. 일단 비정규직의 길에 들어서면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셈이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단기적인 일자리 제공은 취업자 수의 탄력적 조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취업과 연계되지 않은 채 반복되면 실직과 빈곤의 구조화 추세를 막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벨기에에서 시행 중인 ‘로제타 플랜’은 한 가지 대안으로 거론된다. ‘로제타 플랜’은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에 고용 인원의 3%에 해당하는 청년실업자를 의무 채용하도록 하는 제도. 이를 어긴 기업에 대해서는 채용 인원 1명당 매일 74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 의무를 이행한 기업에는 고용인원에 대한 첫해 사회보장 부담금 면제라는 혜택도 준다.

    로제타 플랜

    강력한 청년 의무고용 제도인 ‘로제타 플랜’의 이름은 199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로제타’에서 나왔다. 이 영화의 주인공 로제타는 좁다란 트레일러 집에서 사는 17세 소녀. 공장에서 해고된 뒤 온종일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 끼니는 근처 호수에 유리병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를 좋아하는 와플가게 종업원 리케는 어느 날 로제타가 저녁거리로 물고기 잡는 걸 돕다가 저수지에 빠지지만, 그 모습을 본 로제타는 리케를 놔둔 채 숲으로 도망친다. 그가 죽으면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망설임 끝에 되돌아가 리케를 살려낸 뒤에도, 그가 와플을 몰래 빼돌려 판다는 사실을 와플 가게 사장에게 일러 결국 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한 청년실업자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은 이 영화는 개봉 이후 큰 반향을 일으켰고 로제타 플랜을 이끄는 견인차가 됐다.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벨기에는 로제타 플랜을 통해 청년실업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다소 변형해 100인 이상 기업에 5% 의무고용제만 도입해도 14만1533명의 청년실업자를 고용할 수 있다(2007년 기준)”고 설명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사회서비스 부문 확대를 제안한다. 그는 “공공부문 일자리와 사회적 서비스 확대를 통해 실업을 해소하고 대졸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안정적으로 설계하고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당장 실업자 수를 줄이기 위해 인턴 정책만 추진한다면 청년들을 좌절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될 것이다.”

    이 교수의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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