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6월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홍준표 원내대표(왼쪽에서 네 번째)가 “권력사유화 논쟁으로 불거진 당내 분란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이상득, 정두언 의원은 자중하라”고 말했다.
기자는 당시 SD계와 소장파 간 공방을 취재하면서 SD계와 반SD계의 잠재된 갈등은 ‘이상득 저격’으로 수면으로 떠올랐고, SD 공격의 최초 진원지는 박 전 특보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대답 대신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아래턱을 몇 차례 위로 밀어 올리더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경험칙상 이런 경우는 ‘나는 대답할지를 갈등하고 있다’는 신호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초기 조각(組閣)으로 민심이 흉흉했어요. 여기에 박희태 선대위원장 등 원로 정치 선배들은 공천을 못 받는데 SD는 살아남았죠. 일관성도 공정성도 없고, 도의적으로도, 그리고 한국적 정치 풍토를 감안해도 이해할 수 있는 ‘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MBC 여론조사에서도 ‘SD는 공천을 반납해야 한다’는 의견이 76.6%였어요. ‘이래 가지고 나라가 되겠느냐’는 고심이 깊어졌죠. 남(경필) 의원과 얘기하고, 지역 순방 중인 정 의원을 찾아갔어요. 남 의원은 ‘나가떨어지더라도 옳은 말을 해야겠다’고 하더군요. 정 의원도 흔쾌히 동의하면서 ‘나 혼자 해서 힘이 되겠느냐? 개혁적 이미지(남경필, 원희룡을 지칭)를 주든지(함께하든지)’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섰습니다. 소장파 의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촉매 역할을 한 겁니다.”
SD 총선 불출마 기획
▼ 동참한 출마자도 19명에서 55명으로 급격히 늘었는데요.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 원희룡 의원은 다른 길을 걸었는데요.
“희룡(그는 원 의원과 같은 82학번 친구다)이와 호프집에서 만났어요. 한 시간 반 얘기했는데 ‘뉘앙스’가 안 맞더라고요. ‘친구로서 부탁인데, 동참하지 않아도 중립은 지켜달라’고 했어요.”
▼ 뭐라던가요?
“‘알겠다’고 했죠.”
▼ 이후 원 의원은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는 등 SD 측과의 관계가 좋아졌는데요.
“원 의원도 소장파 비주류로 크는 것보다 주류 안에서 활동해보고 싶었겠죠. 그 친구는 그 친구 스타일이 있으니까….”
▼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3월 중순에 남 의원이 SD 지역구(경북 포항 남·울릉군)로 찾아갔어요. 포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 의원이 전화했기에 ‘진정성을 잘 말씀드리고, 후배들이 원로 선배를 잘 모시겠다’는 뜻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죠. 예상은 했지만 안 받아들이시더라고요.”
▼ ‘형님’과의 일전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네요.
“아니요. 오히려 쉬웠습니다. 누가 봐도 아닌 길로 가는데, 정권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사람이 ‘아니다’고 해야죠.”
같은 친이계로 대선 승리를 일궈냈지만 서로 간 깊은 불신 속에 일전을 벌였던 SD계와 소장파. 그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기자는 화제를 돌렸다. 속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그의 답변은 자주 끊겼다.
▼ 캠프 시절 조직과 정무팀을 두루 오간 걸로 압니다만.
“처음엔 정무팀이 없었어요. 조직팀에서 일하다가 정 의원을 알게 됐고 함께 손발을 맞췄습니다. 조직팀 손놓고 정무 쪽 일을 했어요. 그땐 자다가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 자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친인척 문제부터 BBK 방어까지 안 한 게 없었죠. 처음에는 캠프가 꾸려진 (서울 여의도동) 용산빌딩에서 함께 일하다가 나중에는 인근 오피스텔을 구해 일했습니다. 상대방의 ‘네거티브 전략’을 분석하거나 MB 친인척 문제를 다루는 일은 보안 유지가 필수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