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하오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 장칭웨이 중국상용항공기유한공사 이사장
- 누얼 바이커리 신장위구르 자치구 주석
- 쑤수린 푸젠성 대리성장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제17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2007년 10월15일, 한 언론인이 쌍안경으로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사람은 이들 외에 나머지 4명으로 루하오(陸昊·44)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와 장칭웨이(張慶偉·50) 중국상용항공기유한공사 이사장,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50) 신장(新疆)위구르족 자치구 주석, 쑤수린(蘇樹林·49) 푸젠(福建)성 대리성장이다.
이들 4명 가운데 장칭웨이 중국상용항공기유한공사 이사장은 2002년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당 중앙위원에 뽑히기 시작해 2007년 가을에도 연속 선출됐다. 누얼 바이커리 신장위구르 자치구 주석과 쑤수린 푸젠성 대리성장은 2007년 가을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당선됐다. 루하오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는 최연소 부장급 인사지만 아직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 루하오
연경화 신기록 제조기
2008년 5월4일 중국 정계에서는 정치분석가들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약 8000만명의 단원을 거느린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부장급·장관급)에 만 40세의 루하오 베이징(北京)시 부시장이 임명된 것이다. 당시 많은 언론매체가 루 부시장의 나이를 41세로 보도했지만 실은 만 41세에서 한 달이 모자라는 40세였다.
중국 공산당이 최근 간부들의 연경화(年輕化)를 외치고 있다지만 루 부시장의 승진은 실로 기록적이다. 4세대 지도부의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게 만 41세이던 1984년이었다. 전임자인 후춘화 네이멍구 자치구 당 서기 역시 만 43세이던 2006년 11월에 공청단 제1서기에 올랐다.
물론 루 서기의 기록이 공청단 사상 최연소 기록은 아니다. 리커창(李克强·53)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저우창 후난성 당 서기는 각각 38세에 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현재 중국 내 중앙과 지방을 망라해 정(正)부장급(성장급) 이상 간부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 정계에서 ‘연경화 신기록 제조기’로 불린다. 만 27세이던 1995년 그는 직원이 5000명이나 되는 베이징시 칭허(淸河) 방직공장의 공장장에 임명됐다. 역시 당시의 최연소 국유기업 최고책임자였다.
32세이던 1999년 11월엔 청장(廳長)급인 베이징 중관춘(中關村)과기원구 관리위원회 당조(黨組)서기 겸 주임으로 승진했다. 이어 2003년 1월엔 만 35세의 나이로 베이징 부시장 자리에 올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베이징시 부시장 역사상 최연소였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과 정부 간부의 급속한 연경화’를 뜻하는 ‘루하오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산시(陝西)성의 성도인 시안(西安)에서 85중을 다니던 고교시절 그는 줄곧 반장을 맡았다. 주위 사람을 끌어 모으는 조직능력도 탁월했다. 고교 1, 2년 때 그의 반주임(班主任)이었던 구밍친(顧銘琴) 선생은 “다른 동료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스스로 외부에서 원로 음악선생님을 모셔와 동료들과 함께 노래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수업이 끝나고 화학실험실 화장실의 청소가 잘 안 됐다고 질책했는데 그가 자원자를 모으자 곧바로 전 반의 동료들이 모두 호응했다는 것.
국어 수학에서 체육까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그는 평소 동료 학생을 가르쳐주고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 급우들이 ‘어린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샤오라오스(小老師)’라고 불렀다. 85중의 배구부 코치를 맡았던 정주펑(鄭九峰) 교사는 “어린 시절의 루하오는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며 “배구팀에서는 상대방의 전술 변화를 읽어 우리 팀의 전술을 수시로 바꿔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주 탁월하게 수행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곤 했다”고 회상했다.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도 뛰어났다. 고교시절 이미 시안 공청단 위원회의 유일한 중고생 위원이었던 그는 발이 넓고 모범생이었던 덕분에 고교도 졸업하지 않은 1985년 5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었다. 공산당원이 된 시기가 아버지인 루훙성(陸鴻生) 시안건축과기대 교수보다도 1년이 빨랐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베이징대에 들어가서도 그의 독보적인 위치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만 20세이던 1987년 그는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직선제로 선출하는 학생회 주석에 당선됐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학교와 사회를 넘나들었다. 대학시절에는 베이징시 학생연합회 부주석을 맡았고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1990년 8월부터는 베이징시 칭허 방직공장의 공장장 조리(助理)로 들어갔다. 부공장장을 거쳐 1995년 공장장으로 승진한 그는 과감한 개혁 끝에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던 이 국유기업을 단번에 흑자로 전환해 2년 연속 우수공장장 영예를 얻었다. 베이징시 제3기 ‘10대 걸출 청년’ 선정은 덤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기 효익과 국유기업의 존망’이라는 학술논문 겸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국유기업의 채무 문제를 다룬 이 보고서 내용은 후일 그대로 채택돼 시행됐다.
공업경제와 식품 등 제품의 안전 및 품질감독 업무를 맡았던 베이징시 부시장 시절에는 풍부한 경제학 소양과 현대경영관리 경험을 잘 결합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한번은 베이징시내의 대형매장 주인들이 주차장을 빨리 확보하라고 지시했는데도 꾸물대자, 그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시단(西單) 등의 주요 업장에 직접 차를 몰고 가 시간을 잰 뒤 자신의 사례를 설명하며 이들을 설득해 관철시켰다.
그가 벼슬길에서 이처럼 독보적인 선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6년간 베이징시장과 당 서기를 지낸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후원이 컸다. 특히 중관춘과기원구 관리위원회 주임과 베이징시 부시장에 발탁되는 데는 자 주석의 힘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 주석의 정치계파인 장쩌민(江澤民) 계열 인사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의 계파 성향이 짙은 것은 아니다. 그는 베이징대에서 중국 유명 경제학자인 리이닝(?以寧) 교수의 마지막 수제자였다. 리커창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도 모두 리 교수의 수제자들이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점찍은 왕자오궈(王兆國) 제2자동차 부공장장을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한 이후 26년간 계속 내부 승진하던 공청단의 인사 관행을 깨고 그가 외부에서 최고책임자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공청단 출신 핵심 권력자들과의 인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그가 여기까지 이처럼 잘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가진 정치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이지만 파벌관계에서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점도 작용했다”며 “상급자들은 그가 계파 사이의 의사소통과 지도부 단결에 나름대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정치분석가는 “루 서기는 현재까지 너무 잘 나왔는지도 모른다”며 “괄괄한 성미와 독단적인 성격을 고쳐야만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장칭웨이
중국 대형항공기 국산화 최고책임자
2008년 5월11일 중국이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꿈을 안고 설립한 중국상용(商用)비행기유한책임공사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장칭웨이 전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주임. 그는 당초 중국의 국방과학을 책임지는 장관급 관료 가운데 한 명이었다. 현재 중국의 40대 장관급은 단 7명에 불과하다. 6세대 선두주자인 그가 새로 설립된 국유기업의 최고 책임자로 나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자본금 190억위안(약 2조8500억원)을 들여 설립한 이 기업은 앞으로 이륙중량 100t, 승객 150명 이상의 대형항공기를 2020년까지 세계시장에 출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양분하고 있는 세계 대형항공기 시장을 중국의 자주 기술로 뚫어보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다.
중국 정부가 이런 막중한 임무를 장 전 주임에게 맡긴 것은 그가 중국이 자랑하는 ‘항공 우주 분야의 젊은 1인자’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운반로켓 핵심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 위성발사에 계속 실패할 때 이를 극복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그였고, 유인우주선의 성공발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실현시킨 주역’으로 불리는 이유다.
조적은 허베이(河北)성 라오팅(樂亭) 현이지만 지린성 지린시에서 태어나 장시(江西)성에서 자랐다(한자 ‘樂’은 보통 ‘러’나 ‘웨’로 읽지만 이곳의 지명은 ‘라오’로 발음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다.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잘 연주했고 피리도 곧잘 불어 학교 악대에서 활동했다.
학교 성적 또한 매우 뛰어났지만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1977년 12월 실시된 대학입학 시험에서 뜻밖에 낙방했다. 1년을 더 공부해 이듬해 시안에 위치한 시베이(西北)공업대에 합격했다. 석사까지 마치고 1988년 4월 항공항천(航空航天)공업부 1원1부11실 공정조에서 항공 설계 및 우주개발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중국 우주항공 개발사나 마찬가지다.
1996년 2월과 8월 발사한 운반로켓이 도중에 추락하거나 싣고 올라간 위성이 목표 궤도에 도달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그는 중국운반로켓기술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이듬해 5월 결국 성공시켰다. 2002년 12월에는 마흔 살의 젊은 나이에 중국우주항공과기집단공사의 총경리 겸 당조(黨組)서기를 맡아 2002년 3월 무인우주선 선저우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하지만 항공우주 산업과 대형항공기 산업은 크게 다르다. 게다가 대형항공기 제작은 현재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단 6개국만이 가능할 정도로 첨단기술을 필요로 한다. 지난해 겨우 70~90석 규모의 중형 비행기 국산화에 성공한 중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주공간에 우주선을 쏘아 올려 ‘중국 천년의 꿈’을 실현한 그가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또 다른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 누얼 바이커리
6세대 유일의 소수민족 선두주자
2008년 1월 신장위구르 자치구 주석으로 선출된 누얼 바이커리는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의 40대 부장·성장급(장관급) 인사다. 6세대 지도자의 40대 부장급 인사는 앞서 말했듯 7명에 불과하지만, 중화권 언론은 그에게 선뜻 ‘6세대 선두주자’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있다. 40대 나이로 주석 직에 올랐지만 능력보다는 소수민족 배려 인사라는 의구심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한족(漢族) 동화정책에 호응하는 철저한 반(反)분리주의자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 친구가 “신장이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보다 1500년 전인 서한(西漢) 때부터 중국은 신장을 통치하기 시작했다”고 답했을 정도다. 그는 평소 “나는 위구르족 주석이기에 앞서 중국인이고 공산당원”이라고 강조한다.
누얼 주석은 또한 소수민족 언어와 함께 반드시 한어를 배우도록 한 중앙정부의 이중 언어교육(雙語敎育) 정책을 철저히 지지한다. 상당수 위구르인은 “이 정책은 우리 언어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거부하지만, 그는 “그럼 왜 외국어는 배우느냐”며 “한족의 말을 배우는 것은 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중국어 구사능력은 한족을 뺨칠 정도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가장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소수민족 출신 간부인 셈이다.
누얼 주석은 1961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서쪽으로 500㎞가량 떨어진 보러(博樂)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 1년 때 신장대 정치학부에 합격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대학에 남아 10년간 재직하면서 대학의 공청단 서기와 대학 당위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인구 350만명의 변경 도시 카스(喀什)시 행정공서(行政公署) 부(副)전원(專員·최고지도자)을 거쳐 36세의 젊은 나이로 자치구 성도인 우루무치의 시장을 지냈다. 당시 그는 자치구 내 시장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
우루무치 시장 시절엔 산업시설과 자동차에서 나오는 오염을 크게 줄이고 녹화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해 맑은 날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시내 대기오염을 크게 줄였다. 2000년 12월 중국 공산당 신장자치구 당 위원회가 젊은 상무위원을 찾을 때는 이미 적임자로 성장한 것이다.
47세의 젊은 나이에 자치구 주석의 자리에 오른 그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해 부총리급 이상의 영도자급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 쑤수린
석유방 출신의 제6세대 선두주자
6세대 지도부 후보군 가운데 최근에 부장급(장관급) 이상 선두대열에 합류한 사람은 올해 4월11일 임명된 쑤수린 푸젠성 대리성장이다. 중국 언론은 석유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 49세의 중국석유화공그룹(SINOPEC) 최고경영자(CEO)가 푸젠성 대리성장에 임명되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푸젠성장이라는 직책에 무게를 두는 정치분석가도 있다. 이 자리는 전통적으로 중국 차세대 지도부가 행정경험을 쌓는 요직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5세대 최고지도자로 유력시되는 시진핑(習近平) 부주석과 제4세대 지도부 가운데 권력서열 4위인 자칭린 전국 정협 주석이 모두 푸젠성장 출신이다.
쑤수린은 대표적인 석유방(石油幇) 출신 인사다. 석유방 인사로는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이나 우이(吳儀) 전 국무원 부총리 등이 대표적이다. 현 지도부 가운데는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 CEO 출신인 저우융캉(周永康)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공안부장이 있다. 베이징석유학원을 졸업한 우이와 저우융캉은 석유부문에서만 무려 30년 이상 일해왔다.
쑤수린은 1962년 평범한 농민가정에서 일곱 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부친을 잃으면서 간난신고를 겪었다. 하지만 다칭(大慶)석유학원에서 학사, 하얼빈(哈爾濱)공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칭석유에서 말단으로 시작해 25년 만에 매출1위 기업 CEO에 오르는 입지전적인 성공신화를 일궈왔다.
31명의 차세대 지도자
지난해 7월호부터 시작한 이 시리즈는 이번 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간 소개한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는 총 31명으로, 이들 중 시진핑 국가부주석이나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는 이미 중국의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이다. 리위안차오 당 중앙조직부장이나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서기는 중앙정치국 위원이다. 또 링지화(令計劃), 왕후닝(王?寧) 중앙서기처 서기 등은 지위와 권력이 중앙정치국 위원에 맞먹는다. 왕민(王珉) 랴오닝(遼寧)성 서기와 자오러지(趙樂際) 산시(陝西)성 서기, 루잔궁(盧展工) 허난(河南)성 서기, 장춘셴(張春賢) 신장위구르 자치구 주석 등 지방 제후도 있다. 이들 10명은 모두 1950년대에 출생한 제5세대 지도부 선두주자로 2012년 가을 구성될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위원이 되어 중국 국가 주요기관의 책임자가 될 사람들이다.
그러나 5세대 지도부가 권력의 전면에 나서는 시기(2012~22)에 중국의 지도부가 5세대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5세대 인사는 아니지만 2012년부터 2017년 사이, 즉 5세대 지도부의 전반기엔 4.5세대(1945~49년 출생자)도 여전히 5세대 지도부와 함께 중국을 이끌어간다. 왕치산(王岐山) 부총리와 위정성(兪正聲) 상하이(上海)시 서기, 장더장(張德江) 부총리,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장가오리(張高麗) 톈진(天津)시 서기, 류윈산(劉雲山)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선전부장,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 등의 4.5세대 지도자를 소개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1960년대에 출생한 6세대 간부 중 일부 선두주자도 2012~22년 사이에 5세대와 더불어 중앙정치국에 진출해 중국을 이끌어갈 것이다. 지난 호와 이번 호를 통해 이들 6세대 지도부의 부장급 이상 선두주자 7명을 소개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소개된 4.5세대와 5세대, 6세대의 차세대 지도자 31명은 내년 가을 당 대회를 계기로 국가 주요권력의 핵심에 본격적으로 포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