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1-05-19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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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手記), 기억의 현상학적 환원

    말테의 수기<br>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77쪽, 1만원

    때로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면, 침대에 잠시 그대로 누워 눈을 감고 생각해보곤 한다. 이곳은 아주 먼 곳, 아니 아주 오래전, 보름달 형상의 창문이 있던 생 미셀의 고미다락방은 아닌가. 때로 잠이 들려고 할 때면, 찰나적으로, 어떤 장면이 의식과 전(前)의식 사이로 왔다간다. 나는 파리 센 강 옆의 어느 거리, 바렌가(街)를 걸어가고 있다. 나는 어느 웅장한 건물 앞에 서 있고, 정문은 활짝 열려 있다. 나는 문을 통과하고, 드넓은 정원을 갖춘 성관(城館)과 마주한다. 앞뜰에는 조각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같이 낯익은 형상들이다. 그중 중앙에 있는 조각상은, 오른쪽 팔로 오른쪽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남자, 일명 ‘생각하는 남자’다. 나는 ‘생각하는 남자’ 앞에 서 있기도 하고, ‘칼레의 시민들’ 앞에 서 있기도 하다가, 어느새 성관 1층에 들어가 마룻바닥에 울리는 발소리를 조심하며 두 남녀의 격렬한 ‘입맞춤’ 앞을 지나가기도 하고, 로댕의 비운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의 앙상한 청동 조각상 앞을 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천천히 걸어들어갔던 문 밖으로 나오고, 처음 멈췄던 자리에 서서 내가 방금 들어갔다 나온 집의 주소와 정체를 확인한다. 바렌가 77번지, 비롱 공(公)의 성관, 공식명 국립 로댕 미술관. 꿈을 꾼 것은 아닌데, 모든 것이 꿈속 현실처럼 선명하다. 그런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침대 맡 탁자에는 한 권의 소설이 놓여 있게 마련인데, 방금 전까지 나를 파리의 고미다락방으로, 그 아래 강과 다리와 대성당과 광장, 그리고 광장에서 뻗어나간 골목골목으로 이끌던 주인공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분신, 말테다.

    나는 지금 파리에 있소.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기뻐하고 또 대부분 부러워한다오. 그들 생각이 옳아요. 파리는 별별 유혹으로 가득 찬 대도시라오. 나 자신 고백하자면,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유혹에 굴복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오. (중략) 그 덕분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소. 성격상으로는 아니더라도 나의 세계관이나 내 삶에서 말이오.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물들을 완벽히 다르게 보는 관점이 내 안에서 형성되었소. (중략) 변화된 세계, 새로운 의미들로 가득 찬 삶이오. 모든 게 다 새롭다 보니 지금 당장은 좀 힘이 드는군요. 내가 겪는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초보자에 불과하다오.





    소설 속 말테가 지금 있는 곳은 파리 한복판, 센 강 지척의 툴리에가(街). 프라하 출신의 릴케가 파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일곱, 1902년 8월. 바로 이 소설의 첫 문장으로 삼은 툴리에가 11번지다. 툴리에가(rue toullier)로 말할 것 같으면, 파리 센 강 좌안(左岸) 6구에 위치한 뤽상부르 공원과 팡테옹 언덕 사이에 있는, 파리에서 길이가 짧고 폭이 좁은 골목 중 하나다. 덴마크 청년 말테를 주인공으로 파리를 무대로 펼치는 ‘수기’라는 형식의 소설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릴케의 출신 성분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릴케는 독문학사에 빛나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 아래 있던 체코의 프라하 출신. 프라하란 어떤 곳인가. 소설가 카프카와 쿤데라, 위대한 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태생지 아닌가. 릴케가 태어나 자란 19세기 후반 프라하는 파리에 버금가는 예술의 성도(聖都). 릴케의 프라하는 ‘먼 곳에의 그리움’을 몸의 비늘처럼, 아니 피의 부름처럼 거느린 유럽의 문청(文靑)들이 꿈꾸는 도시 중의 하나. 그런 프라하를 두고 그는 왜 파리를, 그것도 덴마크 청년 말테를 주인공으로 ‘수기’ 형식의 소설을 썼을까.



    그래, 이곳(파리)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거리에 나가 보았다. 여러 병원을 보았다. 한 사람이 비틀대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중략) 나는 손에 든 지도를 살펴보았다. 산부인과병원이었다. (중략) 조금 더 가니 생 자크 거리가 나왔고, 거기엔 둥근 지붕의 큰 건물이 있었다. 지도에는 발 드 그라스 군인 병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안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골목길 사방에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분간할 수 있는 데까지 분간해 보면, 요오드포름 냄새, 감자 튀기는 기름 냄새, 그리고 불안의 냄새가 풍겨왔다.



    예술적 사유들에 대한 단상

    소설의 첫 대목인 위의 내용을 보면, 마치 파리 지도를 들고 거리거리를 답사하는 여행자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후 펼쳐지는 수기의 전모를 보면 여행 소설로서의 기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툴리에가의 숙소를 나와 생 자크 거리를 걸어가면서 만나는 이런저런 풍경은 결국 주인공 말테가 맡는 불안의 냄새, 곧 이방인 청년이 안고 있는 고독과 불안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공간적 디테일들일 뿐이다. ‘불안의 냄새’에 이르는 길, 이것이야말로 제목을 ‘수기’라 명명했지만 여행안내서가 아닌 소설로서의 정체성을 얻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1857년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따른 현대소설의 탄생 이후 20세기 새로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게 될 어떤 것, 곧 ‘내면의 발견’이 발설되는 의미심장한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그 장소가 ‘파리’라는 것.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까닭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여느 때 같으면 멈추었던 곳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전에는 몰랐던 내면을 갖고 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그곳을 향해 간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도 모른다.





    릴케가 처음 파리에 왔을 때, 그는 이미 유럽에 어느 정도 알려진 스물일곱 살의 시인이었다. 어려서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어머니와 함께 살며 가톨릭재단의 독일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열여덟 살 때 처녀 시집을 출간했다. 스무 살 때 프라하 칼 페르디난트 대학에 입학해 문학·철학·법학 등을 접했고, 이듬해 뮌헨으로 유학을 떠난 것을 시작으로 그는 평생 유럽 전역을 돌며 여행자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일찍이 노마드적인 삶을 실천한 셈인데, 이 소설의 무대인 파리는 그의 문학예술 인생에 큰 획을 긋는 체류지들 중의 한 곳이다. 그는 총 세 번 파리에 체류했는데, 이 소설의 첫 단락, 첫 문장인 ‘9월11일 파리 툴리에가’ 11번지에 처음 10개월간 체류했고, 이듬해 다시 돌아와 로댕의 문하에 들어가 바렌가의 비롱 저택에 머물며 로댕의 비서 생활을 했다. 그때 그는 로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끝에 ‘로댕론’을 집필하는데, 릴케의 예술론으로 유명한 ‘로댕론’의 핵심은 바로 ‘보는 법’과 ‘손의 사용’에 있다. ‘말테의 수기’는 두 번의 파리 체류 끝에 집필된 릴케 유일의 장편 소설로 파리 생활에서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과로와 쇠약으로 휴양차 떠났던 로마에서 쓰기 시작해 출간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그는 덴마크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도시를 거치게 되는데, 마침표는 세 번째 파리 체류 중에 찍게 된다.

    이렇게 홀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면서부터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이웃을 가졌다. 이웃은 위쪽에 있기도 했고, 아래쪽에 있기도 했으며, 오른쪽에 있기도 했고, 왼쪽에 있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 종류의 이웃을 한꺼번에 갖기도 했다. 내 이웃들 이야기만 써도 평생 작업거리가 될 만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 이웃들이 내 안에 만들어낸 증상들을 다룬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이야기, 곧 ‘수기’는 시인 릴케가 전 유럽을 떠돌며 겪은 인간과 종교, 문학과 예술, 나아가 대도시라는 근대의 문명에 대한 내면 일기이자 철학적 잠언록(아포리즘)인데, 흥미로운 것은 궁극적으로 이 글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총 7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수기’는 대부분 유년기 기억의 편린들과 체류지인 파리의 거리와 이웃들로부터 목격한 장면들, 그리고 살아오면서 풀리지 않았던 비의(秘意)들과 현재의 화자(작가)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예술적 사유들에 대한 단상들이다. 이렇듯 한 청년의 유년과 방랑의 기억들을 현재의 순수 의식 속에 환원시킨 ‘말테의 수기’는 소설사에 문제작으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내면의 발견’으로 20세기 현대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혁명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앞서 발표됐다는 점은 새삼 주목을 요한다. 특히 말테의 마지막 수기, 그러니까 말테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인 ‘돌아온 탕아’에 대한 삽화와 사유는 이 소설의 백미로 일독을 권한다.

    돌아온 탕아 이야기가 사랑받기를 원치 않는 자의 전설이 아니라고 누구도 나를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어릴 적엔 집안 식구들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는 다른 것은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자라났다. 그리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가족들이 다정다감하게 대해주는 것에 길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소년이 되자 그는 그런 습관을 버리고 싶었다. (중략) 그가 그 시절에 원했던 것은 그의 마음의 진정한 무관심이었다. (중략) 보잘것없는 짤막한 첫 문장 한 마디를 쓰려다가 인생이 다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 사이에 좀 더 늙거나 성숙해지기는 했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기억 속의 모습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중략) 그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았으랴.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분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그럴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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