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49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보다 정확히 49는 7곱하기 7로 해석돼 우리 민족의 사생관(死生觀)을 집약한다. 일단 역사적으로 숫자 7은 북두칠성과 동일시된다. 강원도 아리랑에도 “칠성당에 아들 딸 낳아달라고~”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삶의 시작이 칠성에서 비롯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애를 낳았을 때도 칠일로 시작해 한칠(7), 두칠(14), 세칠(21)을 보내고 일곱칠(49)이 지날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지금이야 많이 약해졌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 민족의 고유관습 중 하나다. 태어나 49일이 지나기 전에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으면 관 바닥에 칠성판을 깔았다. 칠성판을 통해서 하늘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의 첫째별인 천추성 쪽으로 머리를 놓고 일곱 번째 별인 요광성 쪽으로 다리를 향하게 해서 묻는다. 상두꾼은 방울을 흔들며 죽은 자를 묘지로 인도하는데, 하늘의 자손이 땅에 왔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수천 년이 되었지만 어지간한 절에는 지금도 칠성당이 있다. 칠성신앙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다. 49일은 북두칠성의 정기로 태어난 생명이 칠성의 첫 번째 별에서 일곱 번째 별을 돌며 우리 생명의 본래 면목을 찾아 영생불멸하는 참다운 나를 깨쳐가는 과정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생명의 흐름을 순조롭게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의식절차인 것이다.
하늘과 땅은 우리 선조가 자신의 동반자, 혹은 거울로서 본받고자 해온 생명의 뿌리다. 천문은 하늘의 무늬로서 로고스요 아르케였다. 하늘의 진리가 땅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기 위해 천문을 연구한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늘이 이 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기 위해 천문을 공부한 것이다.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지상의 시간과 온도 변화는 태양의 고도에 의해 일어나고 온도 차이에 의해 바람과 비와 습기와 건조한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 파악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북두칠성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천체운행의 기준점이다. 옥상에 올라가 북두칠성을 바라보면 국자모양의 손잡이가 반듯하다가 국물을 쏟을 듯 기울어졌다가 다시 쏟아져 내리는 모양으로 변한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축으로 도는 무수한 별의 운행과 사계절의 질서를 주관한다. 동의보감 양생문은 “하늘은 북두칠성을 기틀로 삼고 사람은 마음을 기틀로 삼아 움직인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은 모두 북두칠성의 힘으로 돌린다”고 했다.
북두칠성은 음양과 오행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집행하는 별이기 때문에 칠정(七政)이라고도 한다. 우리 선조들의 북두칠성과의 밀착감은 여러 방식의 상징에서도 나타났다. 윷놀이만 봐도 그렇다. 윷판의 29개 점은 중앙의 1점과 주변의 28점으로 나뉘어 28수 별자리를 나타낸다. 28개 점은 네 방향에 각각 7개 점으로 다시 나뉘는데, 이 7의 숫자는 북두칠성을 나타낸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자모의 수도 28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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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이 하늘의 천문을 관측하고 살핀 이유는 한 가지였다. 하늘이 어떻게 생겼고 그곳에 떠 있는 별들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하늘의 움직임이 인간이 살고 있는 지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하면 농사를 때맞춰 지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계산했다. 인간의 삶은 북두칠성, 혹은 일월과 오성이 일으키는 무쌍한 변화 속에 있다는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