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건국의 ‘최대 주주’ 내려놓은 민족적 통합주의자

주제발표 ① 인촌과 대한민국 건국

  • 진덕규|이화여대 석좌교수·이화학술원장·정치학

    입력2011-10-19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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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15일의 해방은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정치 과제를 안겨주었다. 해방을 독립국가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민족적 당위의 실현이 그것이었다. 비록 ‘강대국에 의해 주어진 해방’이지만 독립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적 협력도 절실했다. 그런데도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만의 집권을 위해 상대방을 배격하는 극심한 파쟁으로 치달았다.

    이 시기 정치투쟁의 선두에는 여운형, 박헌영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공산당이 자리 잡고 있었고, 여기에 맞서서 김성수, 송진우 등의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귀국한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도 그 나름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공산주의 계급투쟁에 의한 좌파 정권의 수립이 획책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의 정치가 추구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된 김성수에게 현실 정치는 그의 정치이념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밀어닥친 정치 혼돈에 대해서 어떤 편의적인 대응이 아닌, 확고한 정치적 원칙과 이념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이 시기 그에게 맡겨진 정치적 과제는 독립국가 수립이며, 이는 구체적으로는 38도선의 철폐에 따른 통일된 자립자강의 민족국가 확립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좌파의 이념 공세를 차단해야 했다. 그는 좌파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 분열을 가져올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특정 계급 독재를 추구하는 소련권으로 전락하고 말 것임을 확신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일본 유학 때부터 잉태되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조선총독부의 억압적인 약탈과 강제의 제거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깨어난 민족, 즉 민족 구성원의 일대 각성이었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그의 일관된 사상체계였으며 정치적인 행위 원칙이었다.



    김성수의 정치활동의 행동원칙은 타협적 통합주의였다. 타협적 통합주의는 자신의 주관이나 일방적인 의지의 관철이 아닌 모두에 의한 최선의 모색을 추구하는 행위원칙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특정 사항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모두에 의한 협의 과정을 중시했으며, 함께 토의하고 공박함으로써 더 좋은 해결책을 얻는 것이야말로 그의 실천적 지향이자 삶의 철학이었다.

    순고 원만한 국가의 조성

    그의 이러한 성격은 민주주의적 일상성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타협만을 중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자신의 주관이나 신념의 약함이나 상대방의 주장에 맹목적인 추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이 점에서 김성수가 추구했던 타협적 통합주의는 모두 참여자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적인 일상성의 전개를 의미했다. 김성수 자신의 생활신조로 평생 추구했던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담박명지(淡泊明志)도 더 좋은 것을 함께 추구하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자 생활철학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인촌 김성수 자신의 정치적 견해로는 동아일보 1946년 8월15일, 17일, 18일 3회에 걸쳐 연재된 ‘朝鮮의 將來: 純固 圓滿한 國家를 造成하자’에서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모두에서 그는 해방 1년을 보내면서 그 자신의 회한으로 지나치게 흥분했기 때문에 환멸만을 안게 되었음을 밝혀놓았다. 해방이 “또 다른 무거운 종적(從的) 경애(境涯)의 침륜(沈淪)이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참하게도 38도 단절”의 비극을 가져왔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각자는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통합이 아니오 분산, 협조가 아니오 대립, 건설이 아니오 파괴”로만 치달았음을 통탄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순고(純固) 원만(圓滿)한 국가’는 자립자강의 민족국가로, 그것에 의해 이 땅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자유를 누리고 개개인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확보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이는 먼저 외세를 추종하는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민족적 관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정객이 조선 독립과 경쟁력이 순전히 국제정세의 여하에 매여 있는 듯이 선동하며 신탁의 감수를 곡설하는 것”은 그 목적이 여하하든 결과적으로 민족 분열로 귀결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반민족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건국의 ‘최대 주주’ 내려놓은 민족적 통합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오른쪽)과 담소하고 있는 김성수 부통령.

    이 글에서 김성수는 특정의 이념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계급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에는 반민족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임을 주장했다. 그의 순고 원만한 국가는 자립자강에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자립자강의 도리는 자조의 정신을 개발하고 자구의 능력을 함양함에 있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민족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민족의 일치가 촉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이념도 민족사회에서 벗어난 것은 강대국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에 불과하며 그 때문에 민족의 역량을 길러 국제사회에 반듯하게 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족과 세계의 올바른 관계라고 주장했다.

    민족적 민주주의의 선택

    김성수는 정치적 선택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손잡는 것이며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반이요, 민족주의의 올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을 말하면서 독재를 하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반민족적 모습이며,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민족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사대주의로 전락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곧 민족주의의 유일한 정치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들 양자의 접합과 일치는 일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 성원의 일치된 의식 위에 점진적이고도 개혁적인 지향성에서만 추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수의 이러한 인식은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상황적인 조건에 대한 유념이었다.

    1944년의 조사통계 자료에 따르면 총인구는 2500만명으로, 일본인이 약 70만명이었으며, 이들 일본인이 사실상 사회의 요직과 중요한 위치를 점유했으며 경제적 이권도 독점했던 상황이다. 무직자가 총 인구의 52%로 이들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학력만 해도 대학졸업자 수는 불과 7000명 정도였으며,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었다. 전국적으로 읍면 직원이 2200여 명, 한국인 경찰관은 8600명에 불과했다. 극도의 빈곤은 거의 일상적이었으며, 춘궁기가 되면 지방이나 도시에서 아사자가 속출했고 각종 전염병은 예외 없이 되풀이되었다. 일본 식민지 통치의 약탈과 억압이 민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또다시 강대국의 속국이나 위성국으로 전락함은 민족적 반역이며 그 때문에 김성수는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는 적색 제국주의에 희생됨을 자초하는 논리에 불과하며, 임정의 사회민주주의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논리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김성수의 선택은 이른 시일 내에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민족의 숙망을 이뤄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의 단정론(單政論)을 지원했고 5·10 총선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이승만의 집권을 지원했다. 심지어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이승만의 권력 점유로 빚어진 정치 행태를 바라보면서도 김성수의 한민당은 대한민국 건국만을 최대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감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김성수 자신은 어떤 고위직도 탐하지 않았으며 이승만이 집권하는 데 충실한 협력자로 일관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김구, 국무총리 김성수를 기대했던 국민적인 열망도, 내각책임제 헌법에 의한 국정의 합리적이고도 연대적인 정치화조차 이승만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도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만을 전부로 여기면서 이를 감수했다. 그가 1952년 5월29일 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발표했던 사퇴 이유서는 이미 한국 정치의 암운을 예고했는데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해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직선제는 곧 현 집권자의 재선을 보장하는 의미이며 그가 재선되면 국회는 장차 그 추종자 일색으로 변할 것이며 그 후 그의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을 자유자재로 변개할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봅니다. 나는 여기서 그의 정부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의 지위가 시위소찬에 불과하지만 현 정부의 악정에 가담한 일도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름을 정부에 연하는 것만으로 내 성명 삼자를 더럽히는 것이며 민족 만대에 작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의 ‘최대 주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최고위직을 차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지원했고, 때로는 부통령직도 맡았지만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그것을 내던졌다. 그에게는 대한민국만이 절대적으로 소중했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립자강의 민족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김성수 없는 대한민국의 성립이란 사실상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력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민족을 위한 정치가의 길이 무엇인지를 역사로 증언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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