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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④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싸움

  • 김민경| 전략기획팀 기자 holden@donga.com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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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구찌(왼쪽 페이지)와 루이비통 매장.

“그 브랜드와 우리 브랜드를 한 기사 안에서 언급하시면 안 됩니다. 본사 원칙이거든요.”

“그 이야기는 절대 쓰지 마세요.”

흔히 ‘명품’이라 부르는 럭셔리 브랜드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라면 종종 듣는 말이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구찌 같은 패션 브랜드나 롤렉스, 블랑팡 같은 시계 브랜드들 말이다. 홍보 담당자들은 기자들의 자료 요청에 친절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곤 한다.

명품 브랜드들의 ‘원칙’은 분명하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차단하는 것이다. 오늘날 명품의 본질이 곧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명품 가방의 소매가가 원가의 12배 정도라고 하니, 11분의 1은 ‘꿈’과 ‘환상’의 가격이라고 하겠다(나는 이를 ‘폭리’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여기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명품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물건이 쏟아지지 않는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로고가 상징하는 호화로운 삶에 속한 종족임을 확인해주는 신분증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아야 하는’ 명품 브랜드들 사이에서 세기의 라이벌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한 세기 넘게 소비자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은 브랜드라면, 각각의 고유한 세계 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중에서 구찌와 루이비통, 루이비통과 구찌(이후 언급은 가나다 순) 두 브랜드를 선정한 건, 물론 모두 다 존경할 만한 장인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 밀워드브라운의 발표에 따르면 2012년 루이비통이 7년째 ‘가장 가치 있는 럭셔리 브랜드’ 1위(196억 달러)를 차지하고, 구찌가 5위(64억 달러)를 차지해 격차가 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에르메스, 롤렉스, 샤넬 등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구찌, 루이비통과 다른 길에 있다.

나이, 인종, 경제적 장벽 초월해야 명품

구찌와 루이비통은 대량생산 시대에 침체와 위기를 겪은 뒤 혈투를 벌인 세기말의 인수합병(M·A)을 통해 각각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다분히 감정적이었던 구찌와 루이비통의 ‘핸드백 전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몬테규가와 캐플럿가의 머뭇거림 없는 칼싸움이 떠오른다.

현재 구찌와 루이비통은 비슷한 가격대에서 같은 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무엇보다 한국의 명품 소비자에게 폭넓게 사랑받는다. 샤넬 백을 든 남성은 드물지만, 루이비통 지갑이나 구찌 구두, 벨트를 가진 남성은 흔하게 본다. 최근 지방의 소도시에서 만난 남성 신입사원들의 휴대 단말기 커버도 구찌나 루이비통이었다.

젊은 여성들에게 루이비통의 스피디백이나 구찌의 재키백은 ‘하나쯤 꼭 가져야 할 것(must-have)’이다. ‘명품중독’의 출발선에서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도 구찌와 루이비통이다. 구찌냐, 루이비통이냐의 문제는 구입의 순서일 뿐이다.

결국 구찌와 루이비통은 전 세계 여성과 남성에게, 할머니에서 손녀에 이르는 전 세대에 걸쳐, 대중적인 상품에서 초고가 주문제작품까지 팔리는 아주 드문 브랜드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루이비통이 속한 세계 최대의 럭셔리그룹 LVMH(루이비통-모에-에네시)의 임원 다니엘 피에트는 이렇게 말한다.

“명품은 나이, 인종, 지리적, 경제적 장벽을 초월한다. 우리는 부유층 훨씬 너머까지 고객을 확대했다.”(1997,)

루이비통은 1854년 프랑스 파리의 가방 전문점으로 시작했고, 구찌는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마구용품점으로 문을 열었으니, 설립 연대로 보면 구찌보다 루이비통이 반세기 이상 앞서 있다.

이탈리아의 구찌 vs 프랑스의 루이비통

2010년 중국 베이징 세계초콜릿드림파크에서 전시한 초콜릿으로 만든 루이비통 가방.

프랑스의 알프스 산기슭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열세 살 소년 루이 비통(1821~1892)의 소원은 파리에 가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의 중심이었고, 이곳에서 혼맥(婚脈)으로 이어진 유럽 귀족과 정부들 사이 사치 경쟁은 극에 달해 있었다.

앙리 4세의 둘째 부인 마리 드 메디치는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각각 3000개씩 박힌 드레스를 주문하기도 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상비는 늘 국고의 예산을 초과했다.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은 프랑스가 미국에 루이지애나 땅을 팔고 받은 돈 절반을 단 10년치 옷값으로 썼다. 남보다 더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들은 공예 장인들을 발굴해 지원했다. 이러한 투자는 헛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유럽에 큰 수익을 안겨주는 럭셔리 산업의 토대가 이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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