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이카루스의 날개로 날다’ ⑧

  • 안경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ahnkw@snu.ac.kr

    입력2012-07-24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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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봄, 내 생애 가장 길었던 100일
    • 소송을 해서라도 막고 싶었던 인권위 조직 축소
    • 인권위 건물에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포스터 붙인 이유
    • 수포로 돌아간 ICC 의장국 선거 운동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조문하고 있는 안경환 당시 국가인권위원장.

    “사랑은 자신에 대한 기망에서 시작해 상대에 대한 기망으로 끝난다.”

    수많은 사랑의 경구 가운데 왜 이 말이 요즘 들어 가슴에 절절한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인권’이란 정체불명의 여인의 환영을 붙잡고 허덕이는 것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나 자신에 대한 기망은 아닐까?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에’라는 자기최면으로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대한 내 애정의 정체도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의 역경을 외면하고 떠난 나그네의 객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 만년의 삶은 진정한 자기가 아닌, 또 다른 자기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죽어가는 인생인가? 지난 3년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물음들이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은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 에미 씹이다. 統一(통일)도 中立(중립)도 개좆이다. … 아이스크림은 미국 놈 좆 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무식)쟁이, 이 모든 無數(무수)한 反動(반동)이 좋다.”

    때때로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1964)의 구절이 입 언저리에 맴돈다. 동원된 시어(詩語)들의 정확한 의미나 심오한 속내는 제대로 알 수 없고, 내 나이나 알량한 세속의 자리에 걸려 드러내놓고 옮길 수도 없지만, 가슴속에 눌려 담긴 막연한 울분을 대변하는 듯해 적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내가 인권과 연애하는 동안 부딪친 무수한 적과 벽들을 향해 내뿜는 한줄기 취중수액과도 같은 느낌이다.

    “상대가 보통 인간임을 깨우치는 순간 연애는 종말이다.” 한 연륜 지긋한 ‘연애의 달인’이 들려준 말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의 상식과 선의를 믿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여인, 인권의 너른 품에 함께 안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5년 내내 그들이 보여준 인권 관과 민주의식은 보통의 수준을 한참이나 밑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은 사내에게 몸을 주고서도 진정한 자신을 주지 못하는 여인의 사랑이다. 도대체 그게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자신도 찾아낼 수 없으니 말이다.” 영국 작가 로렌스 듀렐의 역설이다. 필경 내 참담한 심경을 그린 말이려니.



    한 헌법학자는 이명박 정부를 ‘인권 알레르기 정권’ ‘민주주의 알레르기 정권’이라고 비판하면서 ‘인권=민주주의=반정부=좌파’라는 등식을 신봉한다고 혹평했다. 마치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반미=반정부=반국가=용공’이라는 공식이 사실상 정권의 지도이념이 됐듯이 말이다. 평소 그 헌법학자의 거친 언어가 적잖이 부담스러웠던 나지만, 이 말만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선 실체를 담고 있다는 느낌이다.

    행안부 직제령 불복 소송

    2009년 3월 30일부터 7월 8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100일이었다. 하루도 편히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된 듯한 징후도 있었다. 이미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기관의 수장으로서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많은 직원의 일자리를 빼앗아야 한다. 위축된 동료들의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그러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위용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에서 손상된 나라의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정부의 인권위 탄압에 항의하는 각종 시위와 성명이 잇따르는 가운데 전직 위원 16인도 성명을 발표했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초대 상임위원을 지낸 유현 변호사도 동참해주었다.

    그해 3월 20일, 나의 사퇴를 촉구하고 인권위 조직 축소에 찬성하는 뉴라이트계 시민단체의 집회가 있었다. 규모도 조직력도 보잘것없지만 ‘동원된 흔적’이 역력했다. 집회 참석자 중 한 연로한 분이 지인을 통해 본의가 아니었다며 나에게 격려와 위로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몇몇 신문은 인권위의 저항은 적반하장이니 자업자득이니 하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과 언론은 침묵으로 탄압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다.

    그 무렵 MBC의 ‘100분 토론’에 김칠준 당시 인권위 사무총장과 행정안전부(행안부) 조직실장이 출연했다. 맞상대가 되는 토론일 수 없었다. 행안부 주장대로 인권위의 방만한 조직운영을 입증할 근거자료가 있을 리 없었다. 정부 방침이 미리 정해져 있듯, 시청자의 관점도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다만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데 간접적인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이 토론이 진행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00분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 손석희 씨가 교체됐다.

    인권위 조직을 축소하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그 소속기관 직제 전부개정령안(직제령)’이 국무회의에 상정된 3월 30일, 인권위는 헌법재판소에 직제령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서와 권한쟁의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미 예고하고 준비해 온 일이다. 헌법 제 111조 4항과 헌법재판소법 제 62조 1항 1호는 국가기관 상호 간의 권한쟁의 심판을 헌법재판소 관할로 규정한다. 인권위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기관은 아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시민항쟁’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고, 인권위는 2001년 비로소 창설된 기관이기에 헌법에 반영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국가기관도 당연히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할 ‘당사자 능력’이 있다. 헌법재판소도 이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해양수산부장관은 헌법과 정부조직법에 의하여 행정 각부를 구성하는 국가기관으로서 독자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으므로 권한쟁의심판의 당사자 능력이 있다.” (2008. 3. 27 2006 헌라1)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인권위의 권한쟁의 심판 청구를 ‘헌법에 따라 설치된 기관이 아니어서 심판청구 당사자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그것도 18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2010. 10. 26. 2009 헌라6)

    끝내 막지 못한 조직 축소

    4월 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가인권위원회 직제령이 관보에 게재됐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법적 현실이 된 것이다. 당일 아침 인권위 전원위원회를 열고 대국민 호소문을 결의했다. 오전 10시, 기자가 모인 가운데 호소문을 발표했다.

    “조속한 업무 정상화를 위해 헌법재판소가 가처분에 대한 판단을 신속히 내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 국가인권위원회는 헌법재판소를 통한 법적 대응과는 별도로 향후 국가기관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적극 모색할 것입니다. … 직제령 개정에 따른 일련의 후속조치를 인권위답게 객관성, 공정성, 투명성을 기초로 진행할 것입니다, 또한 업무수행의 집중도와 효율성도 제고할 것입니다. 직제령의 시행은 우리 위원회의 구성원들에게 쓰라린 상처를 안겨줄 것이나, 우리는 그 아픔을 달래면서 국민이 부여한 소임을 차질 없이 수행할 것입니다. 절차와 내용에 흠이 많은 직제령을 하루속히 원점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동시에 직제령의 시행이라는 법적 책무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인권위 직원 208명 전원을 일단 사무처로 발령 내고 새 조직에 맞춰 각 부서에 일시적으로 지원 근무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어서 구체적인 인원 배치 작업에 들어갔다. 일반직 공무원은 신분에 영향이 없지만 별정직은 6개월 후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잃게 된다.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후에는 재계약이 불가능하다. 직급마다 정원이 정해져 있고, 그 외 사람은 정원 외 ‘초과인원’으로 분류해야 한다.

    2002년 11월, 출범 1년이 지난 시점의 인권위는 직원의 약 60%가 직업 공무원 출신이었다. 당시까지 공무원에게 인권 업무는 생소했다. 정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인권위 업무는 정부의 입장을 지키도록 훈련된 이들에게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40%는 시민단체, 연구소 등 사적인 기관 출신이었다. 이들은 직업 공무원과는 정반대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부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푸는 지혜를 배양할 기회는 없었다. 이렇듯 확연하게 다른 경력과 성향의 두 부류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설립 5년이 지나 내가 취임한 시점에는 나름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초기에 일반직 공무원이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의 여운은 있었기에 나는 이 점을 유념하고자 애썼다.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별정직, 계약직 공무원의 일반직 전환이 필요했다. 내가 부임하기 얼마 전, 경력요건을 갖춘 민간 출신 직원이 대거 일반직으로 전환했다. 소정의 법적 절차를 거친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보수 성향 언론은 이런 조치를 고깝게 여겼다. 나도 기회가 되면 나머지 별정직, 계약직을 일반직으로 전환시키고 싶었지만, 재임 중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마치 내 속내를 간파라도 했는지 한 일간지는 나의 취임 직후 대대적인 일반직 전환이 이뤄졌다는 오보를 냈다. 청년 시절부터 흠모에 가까운 애정을 가꿨던 신문이라 더욱 실망이 컸다. 그 신문은 4월 7일 “인원감축 시행령 막판 수정 - 시민단체 출신 별정직 간부 살리기”, 8일“청와대 ‘인권위 별정직 간부 살리기’ 진상조사”, 9일 “인권위 11명 줄이고 인사마무리 - 행안부 ‘추가 감축해야”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면서 인권위 탄압의 정당성을 끈질기게 홍보했다.

    한국 인권史의 순교자들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챙기는 것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인가. 이 틈을 노려 ‘외인부대’ 동료를 몰아내려는 정부의 음모에 은밀하게 가담한 내부인도 있었다는 씁쓸한 후문을 들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동료를 위해 ‘정원 외 초과인원’으로 분류되기를 자원한 이들의 눈물겨운 미담도 있다.

    4월 8일, 인사 절차를 마무리했다. 팀장급 중 11명은 보직 발령을 받고 나머지 11명은 대기 발령을 받았다. 직원 33명도 대기 조치됐다. 인사 결과를 통보하면서 내부통신망에 ‘동료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올렸다. 내게 사본은 남아 있지 않다. 다음 날 나온 한 신문에 몇 구절이 인용돼 있다.

    “지금 이런 현실이 닥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오늘처럼 야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 저의 60평생에 가장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누구를 선택하기도 버리기도 힘든 인사권자로서 ‘사람은 운명 아래서만 죽을 수 있다’는 비장한 수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후일 우리의 인권사에 장엄한 순교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 지식인 독자에게는 광복 후 한국문학사상 최고 작품의 하나로 인식되는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 신문은 “대기 발령을 받은 팀장조차 위원장의 편지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월 23일, 토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택했다. 바로 그날 인권위는 경기도 과천의 한 공원에서 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조촐한 체육대회를 열고 있었다. 전통대로 가족을 동반한 행사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몸담고 있는 기관의 불행에 봄조차 빼앗겨버린 직원들의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자는 뜻이었다. 행사 도중 비보를 전해 듣고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주체할 수 없었다. 후미진 곳으로 몸을 감추는 내 뒤를 한 직원이 따라와서 쪼그려 앉은 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녀의 마음의 온기를 오래 기억한다. 서둘러 행사를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내몰린’ 죽음에 청와대도 몹시 당황했다. 논란 끝에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결정됐다. 정부의전에 따른 의식이다. 외적인 형식은 결정됐지만 정부의 어느 누구도 선뜻 성의 있게 챙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일군의 사람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임시 조문소를 설치했다. 많은 사람이 정부가 곳곳에 설치한 공식 조문소를 외면하고 비공식 조문소에 몰려들었다. 당황한 경찰이 조문객을 차단했다. 나는 정부의 옹졸한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점심시간에 비서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문소에 들렀다. 행여 나를 제지라도 하면 정식으로 문제 삼을 생각이었다.

    주말에 봉하마을 조문소에도 들렀다. 현직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봉하마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인권위원장에서 퇴임하면 노 전 대통령을 정식으로 방문해 예의를 갖추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떠날 줄 알았더라면 몹시 힘들어했을 그때 전화라도 한 통 드릴 것을, 하는 회한도 들었다. 우울한 날이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애도 포스터

    인권위 건물이 있는 시청 인근에는 수많은 국가기관이 들어서 있다. 사위를 둘러봐도 국민장으로 치르는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걸린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출·퇴근길에 눈여겨봤지만 서울 시내 어느 건물에서도 조기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사무총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우리라도 조기를 걸면 어떻겠느냐고. 내심 고마웠다. 즉시 대형 포스터를 인권위 건물에 내걸었다. 노란색 바탕에 활짝 웃는 노 대통령의 모습을 담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고 적었다.

    인권위의 의도가 무엇이냐고, 청와대에서 문의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옹졸한 태도를 취하다니. 이유야 어쨌든 정부가 국민장을 치르기로 결정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 아닌가? 사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돌아가셔도 마찬가지 예우를 해드릴 것이라고 했더니 듣는 사람이 매우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국민장 기간 내내 이 포스터를 걸어두었다. 이왕 내건 김에 49재를 마칠 때까지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반발심이 들었다. 그런데 쏟아진 비바람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나라 안 사정은 그렇다 치고 국제사회에는 내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이 또한 실로 난감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대한민국의 ‘반인권적’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그해 1월 20일, ‘용산 철거민 참사 사고’가 일어났다. 그날 새벽, 경찰특공대가 철거민들이 농성을 위해 옥상에 세운 망루에 진입했다.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 같은 작전이었다. 농성 시작 25시간 만에 작전을 완료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불법시위에 대한 공권력의 정당한 행사라는 법원 판결이 뒤따랐고, 살아남은 농성자들은 4~5년 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상식에 어긋난 무리한 진압이었다는 국내외 여론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대한 책임 추궁은 전혀 없었다. 며칠 전, 당시의 현장 상황과 후일의 재판과정을 담은 기록영화 ‘두 개의 문’을 관람했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젊은 경찰관이 많았다. 모두 숙연하게 감상했다. 영화가 끝난 후 잠시 그들과 담소라도 하고 싶었지만, 새삼 무거워진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워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국제사회가 이명박 정부의 인권탄압을 비난하자 국내 문제에 국제기구를 끌어들이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발언한 한나라당 초선의원이 있다. 국제사회를 무대로 자라나야 할 젊은이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인권기구협의회(APF)’ 사무국에서는 조바심이 났다. 나의 거취에 대해 물어왔다. 8월 초, 요르단에서 열릴 연례총회에서 이듬해 3월 제네바에서 열릴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총회에서 정식으로 선출할 의장 후보를 결정하도록 돼 있었다. ICC 의장은 3년 주기마다 5개 대륙이 돌아가며 맡는다. 2010년 3월부터는 아태지역에서 의장을 맡기로 정해져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15년 후에나 차례가 돌아온다. 현직 부의장이던 나는 그전 1년 동안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압해두고 있었다. 회장국 수임에 대비해 캐나다 인권위원회에 과장 한 사람을 파견해두고 있기도 했다. 캐나다 출신인 제니퍼 린치 당시 의장과 협의해 차기 의장의 역할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다. 아태지역에서는 물론 ICC와 제네바 인권 사회에서도 나는 ‘안 교수(Professor Ahn)’로 불리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 인권위의 위상이 높았다. 지금도 제네바에서는 내 근황을 묻는 유엔 직원이 더러 있다고 한다.

    실패한 ICC 상륙 작전

    나는 한국 인권위의 일시적인 불운을 틈타 다른 나라가 의장 자리를 노리지 못하도록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호주 시드니의 APF 사무국과 소통했다. 사무국 보고에 의하면 그해 3월 이래 한국 정부의 인권위 탄압 소식이 국제 인권 사회의 주요 뉴스가 되면서 한국의 위상이 심하게 추락했다. 그렇지만 내가 자리를 지키는 한, 한국이 ICC 의장국이 되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국내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더 한국 인권위와 나의 존재가 부각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ICC 의장은 국가의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선출된다. 다만 그 개인은 자국 국가인권기구의 현직 수장이어야 한다. 나의 임기는 그해 10월 말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ICC 의장은 이듬해 3월에야 정식으로 선출된다. 나는 내 후임자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사무국에서는 그동안 ‘대한민국 인권위’와 ‘안 교수’는 상호 분리할 수 없는 동일체로 인식됐으니, 내 후임자가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생소한 인물이면 난관이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원하고 보증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요르단에서 연례총회가 열리는 8월 초의 일정을 비워두고 있었다.

    내가 인권위원장을 연임할 확률은 없다. 여태껏 업무보고조차 받아주지 않은 대통령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하지 않았나? 그러니 연임이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대통령이 나의 연임을 요청하더라도 내가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축소된 조직을 원상회복시켜준다면 모를까. 더 이상 학교를 비울 수도 없다. 3년이면 충분했다. 장기간의 휴직은 내가 소속한 대학의 전통과 정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나는 교수생활이 그립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밀린 독서와 연구, 자유로운 여행과 집필에 심한 갈증이 있었다. 시종일관 사방에서 공격만 받는 인권위의 수장 자리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당초 그 자리를 맡게 된 것도 내가 나서서 원했기 때문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실세가 아니고, ‘코드’에 맞아떨어지는 사람도 아닌 내게 그 자리가 돌아온 것은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서도 심하게 반대하지 않을 사람을 구한 고육지책 때문이 아니었나. 그러니 안 할 말로 이 정도 시달렸으면 족하지 않나 싶은 마음이었다.

    친분이 있는 한 야당 중진의원은 내가 임기의 마지막 날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의 판단은 단호했다. ‘대통령의 안중에는 국제사회니, 인권이니 하는 것은 전혀 없다. 더구나 이미 눈엣가시가 된 인권위가 국제사회에 부각되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지인은 일단 내가 ICC 의장을 확보한 뒤 정부와 흥정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청와대의 모 인사도 “일단 의장 자리를 확보하라. 그러면 당신이 연임하거나 아니면 후임자 결정에 영향을 미칠 여지라도 갖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로 충고했다. 전혀 현실성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편법으로 국제사회를 기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고, 인권위도 정치 기관이 아니다.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에게는 오래전에 뜻을 전하고 측면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며 덕담을 했다. 그러면서 노력해보겠지만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도 이미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듯했다. 국회의장 취임과 동시에 ‘대승적인 차원’에서 들고 나왔던 개헌 의제가 청와대에서 막히자 낙담하고 있었다.

    예상 밖의 후임자

    6월 중순, 나는 청와대에 월말에 사임하겠으니 후임자를 빨리 선정하라고 통보했다. 이미 민정 라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다른 수석에게 뜻을 전했다. 일단 사퇴를 보류해달라는 답이 왔다. 나는 ICC 의장 문제를 강조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다. 얼마 전 관광공사 사장을 국제기구에 진출시키기 위해 정부가 전력투구한 예도 있지 않나. 나는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고, 경위야 어떻든 현 정부와 사이가 악화해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후임자를 임명해달라.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면, 그가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했다. 그리고 “새 위원장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대통령께서 등을 두드려주시면 좋지 않겠나. 의장국이 되면 감소된 인권위 인원도 충원해주고 예산도 지원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정부의 대외 이미지도 크게 개선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누구라면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왔다. 나는 나름대로 몇 사람을 거론했다.

    이렇듯 몇 차례 교신이 있은 후라 나는 어느 정도 교감이 이뤄진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한 여성 후보자는 ‘여성은 조직 장악력이 약해서 안 된다’는 이유로 제외됐다는 후문이다. 대통령은 인권위를 ‘장악’할 대상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6월 30일, 예고한 대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7월 8일 사표가 정식으로 수리됐다. 동료들이 성대한 이임식을 열어줬다. 나는 이임사에서 일찍 떠나는 사유를 밝히고, 마지막까지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법이 보장한 임기 만료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사유는 지난 6월 30일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간략하게 밝혔습니다.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건대 새 정부의 출범 이래 발생한 일련의 불행한 사태에 대한 강한 책임을 통감함과 동시에, 정부의 지원 아래 새로 취임할 후임자로 하여금 그동안 심각하게 손상된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인권의 위상을 회복하고 인권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할 전기를 마련해드리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충정 때문입니다. … 존경하는 이명박 대통령께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유엔총회가 결의를 통해 채택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의 원칙을 존중하고 국제사회의 우려를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후임자는 정부와 국민의 존중과 사랑을 받아, 지난 8년간 위원회가 범한 약간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한편, 그동안 이룩한 찬란한 업적을 발전적으로 승계하기 바랍니다.”

    과연 대통령에게 나의 마지막 충정이 전달되었을까? 열흘 후, 무심코 TV를 보다 자막에 뜬 이름 석 자를 읽었다. ‘현병철.’ 실로 뜻밖이었다. 새삼 듀렐의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과 도박은 같은 것, 언제나 잃게 마련인 게임이다.”

    나의 나라 사랑, 나의 인권 사랑은 도박이었다. 벽창호를 상대로 한 무모한 나의 도박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나는 마지막 넉 달을 참아내지 못하고 좌절 속에 중도하차한 비겁한 위원장이 되고 말았다.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병주문학관에 침식을 맡겼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요청해오면 8월 초 요르단에 날아가 새 위원장을 지지해야 하지 않을까, 연설문 초안을 구상했다. 모두 부질없고 주제 넘친 사랑의 미련이었다.

    한낱 도박 같았던 나의 인권 사랑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1984년 미국 샌타클래라대 법학 박사

    제4대 국가인권위 위원장(2006.10~2009.06)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서: ‘법과 사회와 인권’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조영래 평전’ 등


    인권, 내 스스로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러나 도대체 정체를 모르기에, 속일 수도 없는 사랑의 여인이다. 다시 로렌스 듀렐의 말이다.

    “그녀에게는 그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사랑의 법칙이란 묘한 것이거든. 소위 가장 ‘적격자’라는 사람은 적기에 나타나는 법이 없지. 너무 일찍이 아니면 너무 늦게 출현하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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