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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17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독사 훈련으로 ‘神弓 코리아’ 길러낸 승부사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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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심리학에 심취하다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한국 남자양궁의 미래는 물론 자신의 지도자 인생도 끝날 수 있는 위기상황은 역설적으로 서 전무의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그는 선수들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일일이 기록하며 엄청난 훈련을 시켰다. 선수들은 물론 그 자신도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힘든 훈련을 거듭하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에서 남자양궁 대표팀은 단체전 금메달을 땄고, 개인전에서도 아쉽게 금메달은 놓쳤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휩쓴 여자대표팀에 뒤지지 않는 성적이었다. 이때부터 한국 양궁이라면 항상 여자 양궁만 거론되던 분위기도 달라져 남녀 대표팀 모두 세계 정상임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당시 서 전무는 올림픽에서 우승한 초보 감독이라는 유명세 외에 또 다른 유명세를 탔다. 바로 그가 스포츠심리학을 양궁에 접목한 최초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정신건강 관리나 스포츠심리학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았던 1980년대 당시 서 전무는 사람들 눈에 꽤나 기이한 지도자로 비쳤다. 선수들과 같이 양궁 연습장에서만 살아도 모자랄 판에 태릉선수촌 스포츠과학연구소 건물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286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서 전무는 사비로 컴퓨터를 장만했다. 동료 지도자들 대부분은 운동 감독이 왜 비싼 돈을 들여 컴퓨터를 장만하느냐며 그를 만류했다. 그는 컴퓨터를 배울 곳이 없어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연구원이 많은 태릉선수촌 스포츠과학연구소를 처음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스포츠심리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연구원들을 괴롭히면서 컴퓨터 다루는 법을 익힌 서 전무가 286컴퓨터로 한 일은 선수에 대한 체계적 기록이었다. 개별 선수의 성적, 특성, 훈련 일지 및 결과, 그에 따른 통계 등 선수관리를 위한 모든 것을 컴퓨터에 입력해 데이터베이스(DB)로 만들었다. 대다수의 지도자가 관련 기록을 일일이 종이에 손으로 쓰고 그리던 시절, 서 전무의 이런 시도는 혁명에 가까웠다.

서 전무가 스포츠과학연구소를 드나들기 시작할 때 연구소와 태릉선수촌 사람들 모두 그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연구소 쪽 사람들은 “운동선수가 심리학의 ‘심’자를 알겠느냐”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태릉선수촌 쪽 사람들은 “양궁이나 잘할 것이지 먹물 냄새나는 샌님들하고 어울려서 뭘 하겠느냐”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연구소를 줄기차게 찾았다. 스포츠심리학의 기본을 배우고, 단계별 심리 훈련을 도입했다. 그 덕에 선수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됐음은 물론 지도자로서 그 자신의 시야도 훨씬 넓어졌다.

기약 없는 실업자 생활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
서울올림픽에서 선전한 이후 서 전무는 승승장구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남자대표팀 감독을 맡아 보란 듯이 금메달을 따냈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한국 양궁팀은 전 종목 금메달 석권 및 세계 최고기록 수립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아 경기대회가 끝나자마자 당시 그가 실업팀 감독으로 있던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 작업에 들어가 1994년 12월 말 정식으로 해체됐기 때문이다. 1978년 선수로 입사해 16년간 선수 겸 감독으로 있던 팀이 해체된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당시 삼익악기 소속 선수는 총 6명으로 이 중 2명이 국가대표팀 선수일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이 때문에 서 전무는 새로운 실업팀 창단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무모하게도 국가대표 감독직을 반납하기로 했다. 자신은 삼익악기 팀이 해체돼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월급이 끊기고 졸지에 오갈 곳이 없어진 선수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던 선수들을 저버리느니 당분간 힘들더라도 실업팀을 다시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비인기 종목인 양궁 실업팀을 창단하려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기업을 찾아다녔지만 선뜻 팀을 만들겠다는 기업은 없었고, 그간 모아뒀던 돈은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세 명의 자녀를 둔 서 전무 가족의 기본 생활비, 팀 창단 섭외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은 예상외로 엄청났다.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되면서 받은 퇴직금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약간의 저축과 유산,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받은 포상금으로 샀던 땅까지 다 팔아야만 했다. 이것도 모자라 당시 거주하던 넓은 아파트를 팔고 다섯 식구가 6500만 원짜리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가 이어졌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와 선수들은 동지애와 의리 하나로 버텼다. 팀이 없어졌다고 활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선수들은 계속 대회에 출전해야만 했다. 숙소가 없어 다른 팀 숙소를 임시로 빌려 쓰고, 때로는 샤워장도 없는 중고교생의 숙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삼익악기 양궁팀이 해체된 지 1년 반 만인 1996년 5월 인천 계양구청이 양궁팀 창단을 발표했다. 만 1년 반 동안 서 전무와 함께 고생하던 선수 6명이 그대로 계양구청 선수가 됐다. 국가대표 선수가 2명이나 포함되어 있는 팀이 1년 반 동안 월급 한 푼 받지 못하고 고생했지만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새 팀을 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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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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