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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아’…개척정신으로 헤쳐나가야”

‘총장만 24년’ 신일희 계명대 총장

  • 이권효│동아일보 대구경북취재본부장·철학박사 boriam@donga.com

“우리는 ‘고아’…개척정신으로 헤쳐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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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총장은 뉴욕으로 가는 기차에서 돈을 아끼기 위해 양파를 넣은 샌드위치로 버텼다. 아버지의 말대로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켄트고는 부모의 경제 사정에 따라 학비를 받기 때문에 신 총장은 학비를 내지 않았다. 전쟁이 막 끝난 나라인데다 부모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점을 배려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숙사비와 생활비는 모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 집에서 학비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농장의 잡일부터 화장실 청소, 식당 접시닦이, 골프장 캐디 등 틈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대구를 떠날 때 어머니(전갑규 여사·1994년 79세로 별세)가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건네며 “어려울 때 팔아 쓰라”고 했지만 팔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볼 때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한다. 신 총장은 이 반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영어를 조금 배웠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과서 몇 쪽을 하루 종일 붙들고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켄트고 재학생은 200여 명. 유일한 외국인이던 신 총장은 1958년 5월 졸업 때 최우수 졸업생으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 성적은 우등이었지만 인성 등을 종합 평가해 선정하는 상이었다. 그는 “지금 돌아봐도 고교 때가 가장 소중한 때였다”며 “모든 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많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 합격

신 총장은 코네티컷 주에서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뒤 8년 만에 대구에 계신 부모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편지는 종종 주고받았지만 전화는 할 형편이 아니었다. 전화요금도 비싼 데다 국제전화를 하려면 하루 전에 신청했다가 연결될 때까지 24시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처지로서는 어려웠다.



켄트고를 졸업한 그는 학교에서 가까운 트리니티대를 비롯해 하버드와 프린스턴대에 지원해 3곳 모두 입학허가를 받았다. 3개 대학 모두 장학금을 주기로 했지만 트리니티대 입학 조건이 가장 좋았다. 대학 공부도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여서 그는 트리니티대로 진학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대에 진학하고 싶어 미국의 기독교 단체에 장학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혼자 힘으로 공부해나갈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을 듣고 미련을 두지 않았다.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시에 있는 트리니티대는 1823년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이다. 여기서 그는 수학 및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대학원은 프린스턴대로 진학해 독일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던 교수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여서 독일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1966년 6월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뉴욕시립 퀸스칼리지 교수로 임용돼 5년 동안 재직했다. 대학과 대학원 다닐 때 빌린 학자금을 갚기 위해서였다. 이후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1972~1974)를 거쳐 1974년 계명대에 부임했다.

신 총장에게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말은 매우 특별하다. 그의 삶을 하나로 꿰뚫는 유전자(DNA)이자 계명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소중했던 고교 시절도 타불라 라사를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했다.

타불라 라사는 원래 유럽 근세철학에 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백지(白紙) 상태’라는 이 말은 사람의 인식은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지만 경험 등 외부 작용을 통해 인식이 쌓인다는 주장과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인식 기반이 있다는 논쟁 과정에서 유명해졌다.

개척정신으로 일군 상아탑

“우리는 ‘고아’…개척정신으로 헤쳐나가야”

계명대에는 49개국 1300여 명의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특히 2007년 설립한 KAC(계명아담스칼리지)는 4년 동안 영어로만 강의하는 영어 전용 특성화 단과대학이다.

물론 신 총장의 마음에 각인된 타불라 라사는 서양철학사에 나오는 그런 뜻이 아니다. 백지 상태를 채우는 주체는 ‘바깥의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개척정신’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는 “내 자신을 비롯해 계명대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의 삶을 백지 상태에서 하나씩 채워나가는 정신이 계명대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대 총장에 취임하자 당시 대구 대명동에 있던 좁은 캠퍼스 대신 지금의 메인캠퍼스인 성서캠퍼스를 조성했다. 돌산을 밀어내고 조성된 성서캠퍼스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로 가꿔져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으로 자주 활용된다.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상징물이 2개 있다. 입구 양쪽에는 큰 흙항아리(높이 130㎝, 둘레 400㎝) 2개가 놓여 있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정면 벽에는 ‘백지’ 그림(가로 250㎝, 세로 320㎝)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밑에는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타불라 라사 정신을 통해 만들려는 ‘얼굴’(정신의 모습, FACE)은 △Frontiership(도전적 개척정신-교육특성화 및 창업 활성화) △Altruism(윤리적 봉사정신-봉사활동의 생활화) △Culture(국제적 문화감각-교육과정의 국제역량 강화 및 학생들의 국제성 향상) △Expertise(창의적 전문성-융합형 교육과정 및 자기주도적 학습능력 강화)이다.

이러한 계명대의 노력은 각종 평가사업에서 ‘우수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고 지역사회의 평가도 높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가 잘 가르치는 대학을 선정해 지원하는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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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효│동아일보 대구경북취재본부장·철학박사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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