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 강은교│시인

    입력2013-03-19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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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오늘 너를 보고 왔다. 네가 있는 집 현관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초점 없는 눈들이 공중을 보고들 있었다. 어떤 이는 휠체어에 앉아서, 어떤 이는 턱받침을 하고, 어떤 이는 가늘고 누런 팔에 링거를 꽂은 채, 또 어떤 이는 기저귀를 찬 채….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햇빛과 무력감이 공기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간호사들만이 초점 없는 눈들 사이로 씩씩하게 걸어 다니고들 있었다. 간호사들은 유난히 씩씩하고 힘 있게 보였다. 그곳 공기와는 너무 다르다는 듯. “어제는 피아노도 쳤어요. 남편 분이 와서 나란히 피아노를 쳤답니다.”

    그래 너는 피아노를 잘 쳤었지. 드디어 그 간호사들이 너를 데리고 왔을 때 너는 우리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초점 없는 미소였지만, 어디를 보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지만. 너는 그동안 더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가 있었다. 그전엔 우리를 알아보는 것 같더니, 이제 너는 그저 웃고만 있는 것이 전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 더 평화로워져 있었다. 얼굴의 선이며 부축받은 팔의 선은 더욱 부드러워져 있었으며 “그동안 잘 있었어?” 하는 우리의 말에 너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열심히 하였다. 무엇이라고 너는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의 말이 전혀 아니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까지는 그래도 묻는 말에 “그냥”이라고 대답하며 웃었는데 이번엔 그 단어도 어디로 가버렸구나.

    우리는 너에게 신발을 신겼다. 이제 너는 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너는 신발을 쉽게 신었었는데…. 나는 또 중얼거린다. 너는 운동선수였는데…탁구 선수였지…스케이트도 잘 타고, 스키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겨울마다 가곤 했었지. 그리고 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메기의 추억’을 부르자 웃으며 마구 따라 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가사를 잊었는데, 너는 똑똑하게 들리는 발음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하긴 너는 성가대였지. 성가대의 소프라노였지. 점심 먹을 집을 찾는 동안 너는 쉼 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차창에 기대어 햇빛 쏟아지는 창밖을 향하여. 나는 노래의 힘에 대해 새삼 감탄한다. 언어를 다 잊어버린 뒤에도 기억하는 것. 언어라는 것이 기껏 그 멜로디에 매달려 살고 있다니….

    “그림은 또 얼마나 잘 그렸게…. 집안 구석구석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걸어놓더니….”

    너는 마치 “그럼, 그럼. 아니야, 지금도 잘 그려”라고 하기나 하는 것처럼 무슨 말인가를 힘들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일치단결해 “으응, 으응” 했다.



    점심을 먹는 동안, 너에게 b가 열심히 밥을 먹이는 동안에도 너는 노래를 부르려 했다. “맛있니?” 하고 물으면 또 뭐라고 대답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너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메기의 추억’을 열심히 불렀다.

    “왜 이렇게 노래를 부를까. 그런데 노래는 참 잘 부르네. 나보다 나은데…” 하는 나의 말에 b는 “이젠 밖으론 안 나오는 거야. 자기 세계 속에서 노는 것이지”라고 반응했다.

    b는 또 말한다.

    “이젠 우리를 전혀 몰라봐. 지난번만 해도 알아보는 것 같더니…‘메기의 추억’을 부르는 건 아마도 유년시절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이상하게도 자기 아들은 기억하지 못해. 그러나 유년시절에 놀던 우리들은 기억을 한다고….”

    그러니까 너는 ‘잊기’를 못하는 것이구나. 잊기를 못해서 과거의 담요를 뒤집어쓰고 너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구나.

    아, ‘잘 잊기’. 하긴 우리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이지. 망각이 없다면 우리는 잘 살 수 없을 거야, 하면서도 우리는 망각할까봐 또는 망각했을까봐 흠칫거리곤 하지. 남미의 작가 보르헤스의 소설에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한 사람이 나오지. 그는 포도주 잔 뒤에 어른거리는 포도 알맹이들, 포도 덩굴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의 수까지 헤아려 기억하며 시간을 정복해가지.

    그러면 너는 시간을 정복한 것일까. 시간을 정복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일까.

    그러나 고향은 떠나야만 고향이다. 거기 묻혀 있으면서 거기를 그리워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움은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리움은 그렇게 하여 키가 큰다. 살이 찐다. 동경이 된다.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잘 잊기’를 못하는 너, 기억의 담요에 포근히 싸인 채 이 지상의 공간을 그림자이듯 유영하는 너! 제발 이제 거기 포근한 기억의 담요에서 나와라. 망각이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너는 점점 더 고독해지기만 하리라. 고독은 너의 뼈를 점점 더 약하게만 하리라.

    너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무엇인가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혼자 노래하며 빙긋이 웃음 짓고 있었다.

    하긴 너의 남편이 요즘은 열심히 너를 찾아온다고 한다. 그는 이제야 ‘너’를 찾은 모양이구나. 네가 아프지 않을 때는 그렇게 너와 싸우더니…그래서 우리는 모두 네가 그렇게 아프게 된 것은 너의 남편이 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언성을 높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는 너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너의 뒤에 어른거리는 너’를 인식하고 새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현실의 너는 너의 형식일 뿐이었음을 이제야 이해한 것이리라. 그는 지금 너의 형식이 아닌 ‘너의 핵’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거기 실연당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너를 자주 찾아온다는 것은 너에게 손을 내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네 속에 들어 있는 ‘너’를 향해. 그래, 다시 말하자. 그는 지금 자기가 실연당했었음을 안 것이다. 그리고 실연당하고 나서야 얼마나 자기가 사랑했었는지를 안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실연일 거야. 일생 동안 우리는 실연하고 있는 것일 게야.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가슴에 어떤 혹이 자라고 있는지 몰랐다니…, 그렇게 우리는 멀다니….



    나는 일생동안 실연했지요

    고단한 나는 알지요

    모든 도착은 모든 출발이 되어

    그대 손목에 팔찌로 꿰어질 것을

    떠나는 눈송이들이 간이역엔 가득 앉아 있어요

    일생동안 실연하는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고단한 내가 눈물 던지는 것을 흘깃흘깃 바라보며

    -강은교, ‘실연’

    너의 신발을 다시 벗기고 침대만이 기다리고 있는 방에 너를 다시 보내면서 우리는 모두 깊은 생각에 잠긴다.

    깊은 생각 속에서 너를 다시 생각한다. 네가 떠돌고 있을 한 공간을.

    너는 아마 지금 유년 시절의 그 마루를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너는 아마 지금 거기 있는 우물 앞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우물 속에 들어있는 수박을 찾아 또는 복숭아 캔과 초콜릿 통이 있는 벽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몰라.

    네가 정말 기억하고 싶은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모두 그 누구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할까. 나는 누구에겐가 그런 사람이 되고 있을까.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그런 얼굴.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런 얼굴….

    정말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잊어야 한다. 잊어버린 뒤에도 찾아오는 것, 그것을 기다릴 일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실연할 일이다. 그 뒤에도 찾아오는 얼굴, 그것을 기다릴 일이다. 이루어지지 않을수록 참사랑이 될 것이라는 역설을 믿을 일이다.

    너를 두고 나오면서 나는 몽골의 시 하나를 중얼거린다.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강은교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연세대 영문학과, 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저서 :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 ‘봄무사’ 등, 시산문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 에세이 ‘추억제’ ‘잠들면서 잠들지 않으면서’ 등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 등 수상

    現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나 잊은들 어떠하고 남은들 어떠하리

    노래하는 새들이 내 목소리 이어받을 테고

    저 하늘은 언제나처럼 당당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 여기 머물진대.

    -몽골의 시 중에서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바꿔 부르면서 수많은 사랑 여기 머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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