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전체론·본질주의·경이(驚異)의 오류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03-20 13: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역사탐구 과정은 질문을 하고, 사실을 검증하고, 사실의 의미를 따지는 작업으로 이뤄진다.
    • 세 단계마다 나타나는 오류가 있다.
    • 지난 호까지는 역사탐구 중 질문이나 문제 제기, 사실 증명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봤고 이번 호에선 사실의 의미를 따지는 작업에서 벌어지는 오류를 규명해보려 한다.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는 것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 유사하다. 시장 물건을 모두 알아야 내가 살 물건을 고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많은 사실이 우리 눈앞에 등장하지만, 그중 일부만 의도적으로 선별된다. 선별은 사실이나 사건의 의미, 즉 중요성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쉬운 듯하지만 막상 이 ‘선별’의 개념, 기준을 설명하라고 하면 막연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엄격히 말하면 선별과 관련해 발생하는 오류는 기준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 기준을 탐구대상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나 방식에 있는 경우가 많다. 모든 역사학도는 자신이 좋은 대로 어떤 연구 주제를 탐구할 수 있다.

    하지만 탐구를 시작할 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설정한 전제로부터 비롯된 논리적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이성규 역, 서울대출판부, 1987)에서 이렇게 말했다.

    “혹자는 말한다. ‘천도(天道)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善人)과 함께한다’고. 백이(伯夷), 숙제(叔弟) 같은 사람은 정말 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인(仁)을 쌓고 깨끗한 행동을 하였는데 굶어 죽고 말다니! 70명의 문도 중에서 공자는 안회(顔回)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치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고 베푸는 것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도척(盜?)은 매일같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고기를 먹었으며, 흉포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횡행했지만, 결국 천수를 다하였다. (…) 나는 당혹감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이른바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은 이렇게 천도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었으리라. 사마천에겐 이처럼 천도로 설명되는 부분보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했을 것이므로 그 지향과 전제를 기초로 사기의 열전을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 탐구에 대해 아카데믹한 규범을 들이대는 것보다, 모든 역사학도는 자신의 탐구 과정에서 뭔가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탐구하게 마련이고, 그 기준은 그들 자신의 목적 또는 방법과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전교 석차

    첫 번째로 살펴볼 오류는, 역사가는 전체 역사의 관점에서 세부 의미를 선별해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이다. 이는 전교 석차를 가지고 학생을 평가하는 것과 닮았다. 이를 전체론적 오류(holist fallacy)라고 하는데, 전교 석차에 대해 갖는 이미지처럼 이런 방법은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전교생의 이름과 신상, 성적을 확보하고 있으니까, 석차를 매기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행복은 성적순’이다.

    그러나 전체론은 역사가가 모든 것을 다 알기 전에는 아무런 선별 기준을 가질 수 없을 것이란 점에서, 바보 같고 불가능한 방법이다. 역사가는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역사를 탐구할 뿐이라는 논의는 이미 ‘신동아’ 2012년 11월호에서 했다. 역사가의 증거는 항상 불완전하고, 관점은 항상 제한되게 마련이다. 이 오류의 대표적 선구자가 헤겔이다. 그의 1822~31년 역사 강의를 묶은 ‘역사철학강의’(김종호 역, 삼성출판사, 1990) 서론을 보자.

    “식물의 배아가 그 속에 나무의 전체 성질, 과실의 맛과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의 최초 발자취 역시 이미 역사 전체를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동방 제국의 사람들은 정신(das Geist) 또는 인간이,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다만 한 사람만의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자유는 단순한 자의 횡포, 둔감 또는 단순한 하나의 자연적 우연, 또는 자의에 불과한 열정이다. 따라서 이 한 사람은 전제군주이지 자유로운 성인은 아니다.

    자유의 의식이 최초로 생긴 것은 그리스인에게서이고, 따라서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또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던 데 불과하다. 인간 자체가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인은 노예를 소유했고 그들의 생활 전체 및 그들의 빛나는 자유의 유지는 노예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게르만 여러 민족이 비로소 그리스도교 영향을 받고서야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유이고, 정신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의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 요컨대 세계사란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진보를 그 필연성에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 석차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세계사를 다 알고 살아야 하나? 다 알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그래도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비판하고 오류를 바로잡는 세계사 교과서가 있어 다행이다.

    헤겔은 전교 석차가 아니라 역사 석차를 매겼다. 동양, 그리스와 로마, 게르만이라는 역사의 주요 단계를 설정하고, “동방세계는 단지 한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리스와 로마세계는 약간의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르만세계는 모든 사람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에서 고찰하는 최초의 정치 형태는 전제정치이고, 두 번째는 민주정치, 세 번째는 군주정치이다”라고 선언한다.

    역사의 진보를 인간 자유의 확대 과정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여기, 바로 이 헤겔의 발상에서 연유했다. 그는 역사의 궁극적 주체를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불렀다. 세계정신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법칙은 개인의 뒤에서, 개인의 머리 위에서 저항하기 어려운 힘으로 활동한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상업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세계사(보편사 Welt-Geschichite)의 관념을 갖게 됐다. 세계정신은 그 세계사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구성물이다. 이전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동아시아가 세계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사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전체 역사’가 인류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를 흔히 ‘대문자(大文字) 역사’라고 한다. 싫으나 좋으나 이 그랜드 스케일의 역사철학은 자본주의의 팽창과 함께 우리 머릿속에 ‘이성이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의 역사 종점이 곧 근대’라는 관념을 확실히 심어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지금까지 철지난 헤겔 역사철학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이름을 얻고 있다.

    ‘우주 일반의 지식’

    헤겔의 공로는 크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세계사’를 배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헤겔 역시 ‘세계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중국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인 정도의 역사 지식을 가지고 ‘역사철학강의’에서 그토록 용감하게 써댈 수 있었던 데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유럽 지성사는 문명, 진보라는 담론을 둘러싸고 매우 과감하고 때론 멋대로의 조작을 감행해왔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토대가 그 배후였다.

    우리는 헤겔의 역사철학 전체를 논의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오늘의 주제는 사실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주제에 관해서만 다시 확인해보기로 하자. 러셀이 ‘서양철학사’(최문홍 역, 집문당, 1982)에서 한 말을 먼저 들어보자(936, 939쪽).

    “헤겔이나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우주의 한 부분의 성격 역시, 다른 부분이나 혹은 전체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체에 대한 그 부분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올바로 진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어떤 부분의 위치란 다른 부분에 의존해 있으므로 전체에 대한 그 부분의 위치에 대한 참된 진술은 동시에 전체에 대한 모든 다른 부분의 위치를 정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참된 진술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의 진리 이외에는 진리가 없게 마련이다.”

    자, 다 좋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초부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위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식이 우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가. 나는 ‘태종은 세종의 아버지이다’와 같은 형식의 명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전 우주는 모른다. 만일 모든 지식이 우주 일반(the universe as a whole)의 지식이라면 결국 어떠한 지식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헤겔의 말 어딘가에 잘못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만일 역사학자가 오직 전체 진리만을 말하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는 영원히 침묵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전체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경멸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헤겔처럼 모르면서 아는 척하든지.

    유네스코 역사 프로젝트

    그런데 의외로 이런 ‘전체론적 오류’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원래 모든 메타-역사학자, 즉 헤겔 같은 역사철학자들은 이런 오류의 제물이다. 슈펭글러, 토인비, 콩트, 칸트, 비코 등등(스탈린식으로 해석된 마르크스도 종종 여기에 포함되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마르크스의 역사학은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단 ‘신동아’ 2012년 10월호에 실린 글로 대신한다).

    하지만 크고 작은 형태의 ‘전체론적 오류’가 이런 메타-역사학자들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론적 오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낭만적으로나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유네스코 역사 프로젝트(UNESCO History Project)는 ‘탈(脫)중심적’ 방식으로 역사 이해를 증진하고, ‘중심’보다는 ‘주변’이나 ‘현장’의 역사를 주된 대상으로 삼고자 방향을 틀었지만, 예전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1945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당초 “과거를 그 전체로써 다시 캡처하고, 모든 인간의 기억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65년, 그 프로젝트의 2권에서는,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고대 사회에 대한 전체 진실을 담아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37명의 기고자와 자문가가 참여했다. 역사학에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의 연구진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한 비평가의 말이다.

    “정말 드물게도, 그렇게 박식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역사에 대해 힘들여 연구한 결과로는 너무 볼 게 없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던 프로젝트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끝났다.

    ‘빅 히스토리’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본질론을 설파했다. “여기에 지하동굴이 있다. 동굴 속에는 죄수가 갇혀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동굴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해 머리를 좌우로도 뒤로도 돌릴 수 없다. 죄수의 뒤로 횃불이 타오른다. 죄수는 횃불에 비친 자기 그림자만 보고 산다.”

    이와 관련해 하나 더 소개할 흐름이 있다. 최근 몇몇 역사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과거 유네스코가 했던 것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그리고 헤겔이 했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이름하여 ‘빅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는 문자의 발명과 기록으로 시작되는 역사시대 그리고 인류의 등장과 진화로 설명되는 선사시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 인문학적 역사 분석을 우주의 탄생인 빅뱅이나 별과 태양, 지구의 형성,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등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는 역사 분석으로까지 확대시킨다. 그리고 137억 년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기원을 과학적 지식과 근거들을 통해 살펴본다.

    또 빅 히스토리는 단순히 분석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만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빅 히스토리의 시각과 틀 속에서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이해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빅 히스토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융합 연구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구축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3D를 포함한 각종 자료를 인터넷상에 구현해 서로 연결해줌으로써 자료 이용을 효율화, 개방화하고, 개별 연구에서 수행할 수 없거나 발견할 수 없었던 규모와 소통의 연구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65년 유네스코의 역사 프로젝트보다 나은지 잘 모르겠다.

    빅 히스토리의 논리를 보면 전자문화지도와 여러 가지 면에서 상통한다. 물론 대상 시기가 빅 히스토리는 이름에 걸맞게 13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유네스코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역사 전체를 IBM 컴퓨터에 프로그래밍하는” 방식이 진지하게 거론됐다는 점이다. 전체론이 기술력을 등에 업고 프로젝트로 재등장하는 셈인가.

    어떤 종류의 역사 기록은 디지털화할 수 있고, 그것이 유용할 수 있다. 또 학제 간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에 대해 내가 느끼는 시큰둥함도 이전 경험이나 오늘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왜 소통과 탐구는 꼭 ‘전체’를 전제로 해야 할까. 전체가 실제 전제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유령과 본질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3월 4일 러시아 모스크바 그랑프리 곤봉에서 동메달을 딴 손연재. 체육사에서 볼 때 ‘역사적인 사건’일 것이다.

    실연당한 친구가 늘 술을 마시며 실의에 빠져 있다. 강의도 빠지고 먹지도 않고, 저러다 폐인이 될 것 같다. 안타깝다. 그래서 친한 친구가 한마디한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자 실연당한 친구가 시니컬하게 맞받는다. “나답지 않다고? 나다운 게 뭔데?”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장면인데, 학생들에게 가끔 철학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다. 말하자면 원래 ‘나(I)’가 있는데, 이게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좀 이상하게 된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는 ‘원래 나’가 있는 게 아니라 상황, 시기에 따라 존재하는 그 자체가 ‘나’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앞의 것은 본질론이 되고, 뒤의 것은 관계론 얘기가 될 것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나’라는 이데아(Idea)가 있어서 그것이 현상(現象)하는 것이 지금의 나라는 말인데, 바로 이때 현상과 대비되는 이데아로서의 ‘나’가 본질(本質)이 된다. 본질이나 이데아, 이런 게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곧 바로 ‘나’다, 이런 사유도 있을 수 있다. 역사학은 오히려 이런 사유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대상을 시대성, 상황성을 중심으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실재의 깊은 곳에 본질이 있다는 견해에 따르면, 인간, 나라, 세대, 문화, 이데올로기, 또는 제도에 관한 사실(facts)은 해당 주제의 본질을 얼마나 잘 드러내주느냐에 따라 중요성(의미)이 결정될 것이고, 그 의미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사료로 선택된다. 구래(舊來)의 세속화한 미신(迷信)인 이런 생각에 대한 합리적 반박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다. 마치 유령의 존재처럼 본질이 있는지 어떤지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령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본질에 대한 믿음도 경험주의자를 곤란에 빠뜨린다. 경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본질을 찾는 데 실패하자, 밖으로 표현된 행위의 패턴에서 본질을 찾고 개념을 진보시켰기 때문이다. 본질주의자에게 중요한 사실이란, 관찰자가 사물의 내적 실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窓)이 아니라 자신의 선험적 전제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본질의 오류는 역사 서술에서 매우 일반적이다. 본질주의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런 관점이나 해결책(?)이 뭔가 완벽하다는 느낌을 주고, 뭔가 사태가 확실해진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경험주의자라면 털어내야 할 환상이다.

    본질주의는 앞서 살펴본 전체론(holism)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전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오항녕만 알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오항녕도 알아야 하고, 이영애도 알아야 하고, 박찬호도 알아야 한다. 다 알아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본질주의자가 사용하는 언어 습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기본성격’ ‘본성’ ‘원래’ ‘근본적으로’ 같은 어휘를 잘 사용한다.

    ‘역사적’의 남용

    눈에 띄는 사건이 곧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오류가 있다. 경이의 오류. 이는 센세이션을 곧 중요한 사건이라고 오해하는 일이다. 이는 역사가의 임무가 대단한 사람이나 놀라운 일, 환상적이거나 기괴한 일을 기록하는 데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다. 나아가서 이런 사건들이 더 놀랍고 경이적일수록 훨씬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중요성에 대한 기준은 역사 자체보다 오래됐다.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투스는 “역사가는 정말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독자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 저술의 출발점을 경이로움에 둔 것이다. 실제 헤로도투스는 성공한 듯하다. 그의 ‘역사’는 읽는 내내 참 재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저술을 읽는 독자는 진실과 놀라움 사이에서 계속되는 긴장을 감내해야 하고, 그 긴장은 헤로도투스의 해석이 갖는 역사성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크로이소스의 신탁(神託)이 그렇다.

    수많은 민족을 거느리는 리디아의 왕, 어리석은 크로이소스여,

    궁전 안에서 고대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길 바라지 말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훨씬 좋으리라.

    그 소리를 듣게 되는 날이 바로 재난의 날이로다.



    사르디스 성이 함락됐을 때 페르시아 병사가 크로이소스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죽이려고 다가갔다. 그때 벙어리 아들이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이봐, 크로이소스왕을 죽이면 안 돼!”라고 소리쳤다. 아들이 이때 처음 입을 열었던 것이다. 신탁대로, 재난의 날에 벙어리 아들은 입을 열었다. 헤로도투스는 ‘신탁’을 많이 인용했다. 이 때문에 헤로도투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로 보는 데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다.

    신탁을 제외하면 헤로도투스가 신기하고 이상한 사실에 주목한 것을 비난할 것은 없다. 역사란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살기 때문에 기록해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에서 여자들은 서서 오줌을 누고 남자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눈다”는 점을 기록해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여행술의 아버지이며, 비(非)-사건적 역사의 아버지다. 이렇게 역사는 가치-연관 학문이면서 순수한 호기심의 산물이자 인간의 자연사다. 이는 사마천도, ‘춘추’를 편찬한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센세이션과 역사적 중요성을 혼동하는 오류가 창궐하는 곳은 매스컴이다. 그들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은 물론 지진, 태풍, 화재, 홍수 등 자연재해에까지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을 붙인다. 특히 스포츠같이 기록 경신이 주목을 끄는 영역에선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다. 기록을 깬다는 것은 역사를 새로 쓴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양해지면서 ‘역사적 중요성’이 갖는 의미도 그 관심만큼 탄력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매스컴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두고 지나치게 ‘학자적 입장에서’ 못마땅해할 것도 없다. 다만 기사에 과도한 호들갑도 많은 듯하니 염두에 두자는 뜻이다.

    조선은 독살(毒殺)의 나라? 역사 상업주의는 가라!

    정조의 어찰첩을 공개하는 학자들. 정조 독살설은 어찰첩의 발견으로 더욱 신빙성을 잃게 됐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이것조차 ‘노론의 음모’라고 강변한다.

    독살의 나라, 조선?

    사실 더 조심해야 할 영역은 ‘사이비 역사’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센세이셔널리즘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시대 국왕의 독살설이다. 누군가 몰래 독을 먹여 암살했다는, 혹은 암살하려고 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증거를 찾고 끼워 맞추는 서술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상업주의의 일환, 즉 돈을 벌려고 이목을 끌기 위해 만든 장치다.

    얼마 전 인기를 끈 ‘광해’나 예전에 나온 ‘영원한 제국’의 정조도 독살설에 기초해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와 역사의 거리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 같은 픽션이 아니라 역사서를 자처하는 책에서 버젓이 그런 오류를 넘어 왜곡을 자행한다는 점이다.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널리 알려진 정조 독살설의 경우, 영남 남인 집안 일부에서 전해오는 사랑방 얘기였다고 한다. 일면 이해가 간다. 말하자면 탕평(蕩平)을 명분으로 국정에 참여할 기회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면서 그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요즘 말로 하면 ‘힐링’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미 기존 연구에서도 정조의 독살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봤지만, 최근 자료는 독살 가능성을 더욱 부정하고 있다. 정조가 주고받은 수백 장의 편지가 발견됨으로써 정조의 정적으로 독살설의 유력한 혐의자였던 심환지는 정조의 국정 파트너였음이 드러났다. 어떤 의학자는 당시 어의(御醫)와 주고받은 정조의 처방 논의를 인용해 의료사고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독살설을 굳게 ‘믿는’ 분들은 학계의 논증과는 관계없이 계속 믿고 있다고 한다. 학계의 논증조차 ‘노론의 시각’이라고 매도하면서. 결국 학문적 논의마저 진영 논리, 당색 논리로 덧칠하겠다는 것인데, 그래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 불임(不姙)의 논리도 모자라, 증오의 논리를 재생산하려는 것일까. 그래서 옛말에 소인(小人)은 무소부지(無所不至),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못하는 짓이 없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공부를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