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3-03-20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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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한 스타일과 현란한 리듬으로 40년간 팝 음악계를 이끌었던 마이클 잭슨. 그의 독보적 명성 뒤에는 성추문, 약물중독, 성형중독 같은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 세상을 떠난 지 4년. 그를 짓누르던 오명의 진상이 하나하나 벗겨지면서 마이클 잭슨은 진정한 팝의 황제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무중력 상태에서 뒷걸음질치는 것 같은 문워크(moonwalk) 댄스, 화려한 제복에 긴 곱슬머리와 선글라스, 흰 양말, 변치 않는 미성(美聲)과 현란한 고음…. 40년 동안 대중문화의 핵심 아이콘이었던 마이클 잭슨(1958~2009)은 총 7억5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했고 400여 개의 상을 받았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나는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장 담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에게 열광했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학도인 내게도 그만큼 큰 울림이 있었다. 그는 4년 전 우리 곁을 떠났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전설이다.

    서울 여의도 면적 3배에 달하는 대저택 네버랜드를 야생동물의 천국으로 만든 그는 아무도 늙지 않는 동화 속 나라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시에 약물중독 성추문 등으로 신문 사회면에 단골로 오르내리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고서야 비로소 영원한 피터팬으로 네버랜드에 안식하게 됐다.

    장례식도 ‘지상 최대의 쇼’

    2009년 7월 7일 오전 10시. 2만 명의 군중이 모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머라이어 캐리, 브룩 실즈, 스티비 원더, 라이오넬 리치, 어셔 같은 톱스타와 농구선수 매직 존슨, 코비 브라이언트 등이 붉은 꽃으로 장식된 관(棺)의 주인공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미국 팝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의 영원한 이별을 보도하기 위해 주요 방송사들도 정규 방송을 미루고 인기 앵커들을 투입했다. 이날 장례식 중계방송은 12억 명의 세계인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에 마이클은 자신의 장례식 또한 ‘지상 최대의 쇼’가 되길 원했다. 그의 바람대로 장례식은 멋들어진 무대가 됐다. 중앙 스크린에는 다양한 영상이 수놓아져 그가 연출한 감동적인 장면들을 재현했다. 흑인인권운동가 앨 새프턴 목사는 “그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온 게 아니라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다”며 자신을 향한 부당한 공격에 굴복하지 않았던 마이클의 강인한 면모를 되새겼다. 추모사와 추모공연을 한 인사들과 유가족은 ‘We Are The World’ 등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베일에 가려졌던 마이클의 열한 살 난 딸 패리스는 “아빠는 내게 최고의 아빠였다.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며 울먹이더니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황제의 탄생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 사후 1년6개월 만에 나온 앨범 ‘마이클’.

    그의 이력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5세 때 데뷔’라는 문구다. 이 때문에 어릴 적 그의 모습은 기타리스트 아버지의 영향으로 탄생한 가족 밴드의 귀염둥이 막내 보컬리스트쯤에 한정된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학창 시절 권투선수였던 그의 아버지 조지프는 불같은 성격에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반면 어머니 캐서린은 소아마비로 16세 때까지 목발을 사용했고 평생 걸음이 불편했던 장애인으로 한없이 자애롭고 여리고 부드러웠다. 정열적인 실용주의자 조지프와 이성적인 낭만주의자 캐서린은 물과 불처럼 서로 조화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두 결손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꾸려 여러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어 했다. 부부는 인디애나 주 개리 시(市)에서 결혼한 이듬해인 1950년 첫딸 리비를 낳았고, 1958년 8월 29일에는 손가락이 유난히 긴 사내아이 마이클을 여덟째로 얻었다. 바로 전해에 쌍둥이 형 브랜든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지만 마이클이 태어난 뒤에도 두 명의 동생이 더 태어나 잭슨가에선 아홉 명의 아이가 무럭무럭 자랐다.

    밴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아버지 조지프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철강회사의 트레인 운전사로 교대근무를 했다. 그런데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되어 아이들에게 강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변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들어오기 무섭게 숨어버리곤 했다.

    현관에서 뒷문까지 고작 다섯 걸음 정도인 작은 집에서 자랐지만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머니가 연주하는 아버지의 기타에 맞춰 노래를 배웠다. 아버지의 기타는 감히 손댈 수 없는 금기였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어머니의 묵인 아래 가끔씩 연주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살 티토가 기타를 튕기며 놀다가 줄 하나를 끊고 말았다. 이를 안 조지프는 채찍을 들고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티토는 “놀다가 기타 줄을 끊은 것이 아니고 연주하다가 끊은 것”이라고 항변했다. 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 “그 잘난 연주를 해볼 테면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티토가 기타를 치고 둘째 재키와 넷째 저메인이 노래를 부르자 분노로 이글거리던 아버지의 눈빛은 이내 놀라움과 흥분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연주 솜씨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처음으로 인자하게 안아 줬다. 아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조지프는 없는 살림이지만 적극 후원하기로 마음먹고 다음 날부터 아이들과 함께 맹훈련에 돌입했다.

    형과 누나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자란 마이클이 네 살 때 부엌에서 흥얼거리던 소리는 너무나 청아하고 아름다워 마치 천사의 음성 같았다. 조지프는 큰 기대를 갖고 마이클을 그룹에 참여시켰고, ‘잭슨브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작은 동네 공연팀을 만들어 무대 훈련을 시켰다. 이후 잭슨가 아이들은 각종 지역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우승 트로피를 끌어모았다.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 그리고 마이클의 그룹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애초에 잭슨브러더스의 리더는 열두살 장남 재키였다. 하지만 다섯 살 마이클은 에너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춤으로 탁월한 무대 장악력을 보여줬다. 그가 부르는 애잔하고도 서정적인 노래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 열광에 팀의 리더는 만장일치로 막내 마이클이 맡게 됐다. 개리의 클럽에서 고작 7달러를 받으며 시작했지만 이들은 이내 다른 도시까지 진출하며 팀의 이름을 ‘잭슨파이브’로 개명했다.

    대박 터뜨린 ‘잭슨파이브’

    잭슨파이브는 1968년 시카고 리갈 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콘테스트에서 3주 연속 우승했고, 그 여세를 몰아 꿈의 무대인 뉴욕 아폴로극장에 오르게 된다. 아홉 살 마이클의 신들린 노래 솜씨에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고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가 소속된 레코드사 모타운의 러브콜까지 받게 된다.

    모타운 최고경영자(CEO) 베리 고티는 음반사 직원에서 시작, 작곡가를 거쳐 제작자로 변모한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꾼이었다. 조지프는 계약서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서명을 했고, 이 불공정계약 탓에 그들은 모타운에 안겨준 수익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을 받게 됐다. 음반사의 이런 횡포가 당시엔 관행이었다. 마이클은 앨범 1장당 2센트, 싱글 곡은 고작 1.5페니 정도를 손에 쥐었다.

    1969년 잭슨파이브의 ‘아이 원트 유 백(I want you back)’이 발매되자 전 세계가 열광했다. 그해 미국에서만 206만711장, 해외에서는 400만 장이 팔렸다. 가족들은 로스앤젤레스의 큰 집으로 옮겨 갔다. 뒤이어 나온 4곡 모두 빌보드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앨범 취입 이후 첫 콘서트인 1970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컨벤션센터 공연에서 그들은 공항에 운집한 3500여 명의 팬이 지르는 환호성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 10대도 많았다. 1972년 10월 30일 시작된 유럽 투어 때도 잭슨 형제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이 런던에서 타고 다니던 리무진은 극성 팬이 몰려드는 바람에 파손돼 1만2000달러의 수리비 견적이 나왔다.

    조지프는 모타운을 떠나 미국 최대 음반사로 꼽히던 에픽에서 새 둥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전의 불공정계약 탓에 잭슨파이브라는 명칭은 모타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룹명을 ‘더 잭즌스’로 바꿔야 했다. 차남 저메인은 모타운 CEO 베리 고티의 외동딸 헤이즐과 결혼한 터라 모타운에 그대로 남았다.

    아버지의 그늘

    에픽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으로 마이클은 더욱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프로듀서계의 미다스 손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화려한 무대 감각까지 익히게 된다. 하지만 그 무렵만 해도 마이클 잭슨은 더 잭슨스의 싱어이자 막내일 뿐이었다.

    에픽의 제안으로 마이클은 1979년 더 잭슨스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디스코풍 독집 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을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다. 잭슨 형제들은 1984년까지 그룹 활동을 계속했지만, 이 앨범은 마이클의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족들은 서운함을 넘어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마이클은 잭슨이라는 이름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아티스트의 영역을 구축할 때임을 알았다.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앤디 워홀의 작품 ‘마이클 잭슨’.

    감성이 풍부했던 마이클은 화성이 감미롭게 전개되는 곡을 녹음할 때면 스스로 도취해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앨범 표지에는 말쑥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이 앨범 수록곡 중 4곡이 빌보드 순위 10위 안에 올랐다. 미국 내 앨범 순위 3위, 전 세계 600만 장 판매라는 기록을 낳기도 했다.

    2003년의 인터뷰에서 마이클은 애증이 섞인 아버지의 푸른 눈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아버지 조지프의 눈동자는 녹색 계열이다. 마이클은 두려운 존재였던 아버지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탓에 눈동자 색깔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형제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연약한 마이클은 조지프의 엄격한 훈육방식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이는 점점 증오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이클은 형제들 가운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아 코는 유난히 크고 넓었다. 그에게 이것은 끔찍한 콤플렉스였다. 1979년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그는 첫 번째 성형수술을 했다. 마이클은 확연하게 작아진 자신의 코를 보면서 만족해했다.

    하지만 수술 부작용으로 호흡이 불편해지자 그는 다시 2차 수술을 하게 된다. 그래도 외모에 만족하지 못한 마이클은 다시 코를 성형했고, 연속되는 성형으로 그의 콧날은 무너질 듯 얇고 낮게 변했다. 성형중독이라는 손가락질이 쏟아졌다. 더욱이 채식 위주의 식이요법으로 얼굴의 여드름과 젖살이 빠진 데다 눈썹을 손질하고 짙은 화장을 하면서 예전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날렵한 이미지로 변했다. 당시에는 영국의 여장 가수 보이 조지가 거의 유일하게 짙은 화장을 한 남자 가수였다. 대중은 마이클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다.

    화려함 뒤의 외로운 영웅

    1982년 12월 발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성공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앨범은 37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고 지금까지 1억 장 넘게 팔렸다. 에픽사는 이 한 장의 앨범으로 최소 6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냈고 슈퍼스타 마이클은 앨범 1장당 2달러 10센트씩 1년치 4700만 달러의 수익금을 받았다. 이 음반은 음반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장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빌리진(Billie Jean)’ ‘빗잇(Beat It)’ ‘스릴러’ 등의 뮤직비디오는 환상적인 역동성으로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뮤직비디오만 24시간 틀어주는 MTV 방송은 때아닌 호황에 비명을 질렀다. 마이클은 1984년 그래미상 12개 부문 중 8개를 휩쓰는 진기록을 세웠다.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관심거리가 된 25세의 마이클에게 아버지 조지프는 더 이상 거대한 산이 아니었다. 조지프의 바람기에 질린 어머니 캐서린은 이혼 신청을 했고, 마이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와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중단했다. 가족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어머니 캐서린이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혼 조정신청을 철회하면서 가족 사이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장인의 음반회사를 위해 남았던 저메인까지 합류해 잭슨스의 재결합 투어공연이 기획되기도 했다. 이처럼 가족은 다시 뭉치게 됐지만 홀로 유명세를 치르던 마이클은 의도했건 아니건 가족 사이에서 물에 뜬 기름 같은 존재였다.

    마이클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가난했던 시절 캐서린은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 종교적 삶에 빠져들었다. 마이클은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뒤에도 1985년 무렵까지 1주일에 1시간씩 방문선교를 했다. 공연이 없을 때는 1주일에 4번 보는 예배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마이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져가면서 그의 종교 생활도 가십 거리가 됐다. 또한 그가 사생활을 숨기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자 대중은 그를 동성연애자 혹은 소아성애자로 의심했다.

    대중과의 소통 부재

    마이클은 어려서부터 가수 활동을 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어 사회성이 뒤떨어졌다. 따로 홈스쿨링이나 과외를 받은 것도 아니어서 학습능력은 그저 읽고 쓰는 정도였고 논리적인 사고와 상식도 많이 부족했다. 어린 시절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해야만 하니까’ 했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은 없었다. 인터뷰나 무대 인사 때도 그는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처럼 인위적으로 행동했다. 그런 그에게 휴머니즘과 유머는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비쳐졌다.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언론을 활용해 대중에게 진솔하게 접근할 줄 몰랐다. 대중은 그에 관한 괴상한 소문을 즐겼다. 평화를 사랑하고 기아(飢餓)와 난민 구호에 앞장섰던 선행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기이한 행동과 성숙하지 못한 화술, 독특한 성격은 과대 포장돼 대서특필됐다. 마이클은 세포파괴로 피부의 흰색 반점이 확대되는 난치성 질환인 백반증을 앓았다. 그의 피부는 치료 과정에서 밝게 변했지만, 세상엔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전신 박피를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마이클은 네버랜드에서 고고하고 평화로운 삶을 갈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더욱 고립돼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의 인생 최악의 사건이었던 1993년 아동 성추행 스캔들도 소통 부재로 인해 피해가 더 커졌다.

    당시 애번 챈들러라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 조던을 마이클이 성추행했다며 고소했다. 마이클은 경찰의 알몸 수사로 실신 직전까지 가는 충격을 받았고 챈들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마이클은 월드투어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 대형 이벤트를 원활하게 치를 생각에 2330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그런 일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좋아했던 마이클은 어린이 재단을 만들고, 네버랜드에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초대했다. 그러다 2003년 11월 네버랜드에서 아동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데, 이번엔 끝까지 법정투쟁을 벌여 2005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마이클의 연인들

    1994년 마이클은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일한 혈육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깜짝 결혼식을 올려 다시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혼 발표 때부터 ‘계약 결혼’ 루머에 휩싸였고, 1995년 19개월간의 짧은 결혼생활을 마이클은 ‘끔찍했다’는 표현으로 마감했다. 이듬해인 1996년, 그는 오랜 기간 자신 곁에서 백반증을 치료하던 간호사 데비 로와 두 번째 결혼을 해 또 계약결혼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결혼과 거의 동시에 태어난 첫아들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는 정자은행에서 제공받은 정자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대리모 논란에 시달렸다. 마이클은 곧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을 얻었지만 1999년 ‘성격차이’를 이유로 데비 로와 이혼한다. 이후 잭슨은 차남 프린스 마이클 2세를 얻었지만 엄마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2001년 마이클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 부문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고 이듬해엔 작곡자 부문에도 이름을 올렸다. 오래도록 칩거하던 마이클은 2009년 7월 13일부터 7개월간 런던 O2아레나에서 컴백 공연 대장정을 갖기로 기획했고, 불과 5시간 만에 50회에 이르는 공연 티켓이 매진됐다. 그러나 6월 25일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마이클은 공연을 앞두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일명 ‘우유주사’로 알려진 프로포폴 주사를 과도하게 맞으면서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마이클에게 프로포폴을 상습적으로 주사한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문에 마이클이 타살당했다는 설과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에게 덧씌워진 여러 추문은 그의 사후 헛소문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소아성애자도 아니었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등의 기이한 행동은 그의 질병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던 챈들러 성추문 사건도 조던의 아버지가 돈을 뜯어내기 위해 조작했다는 것이 조던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그는 무대 위의 진정한 황제였다. 유난히 긴 팔과 손가락을 이용한 동작 하나 하나를 음악의 효과와 일치하도록 철저히 계산하고 이를 완벽할 정도에 이를 때까지 연습했다. 지금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의 하얀 양말은 현란한 발동작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소품이었다. 빼어난 가창력, 폭발적인 댄스 실력, 개성 있는 스타일에서 그를 대체할 만한 대형 아티스트는 한동안 나오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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