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새’와 ‘봄의 제전’으로 유명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차르였다. 그는 시대의 거목들과 어울리면서 내 것만 고집하지 않고 남의 것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고, 협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자신과 힘을 합쳐 무대를 장악할 동료들을 설득했고, 춤과 음악의 협업을 통해 대중이 원하는 재미와 감동을 찾아 나섰다. 현대는 음악으로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는 시대임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인물 사진작가 아널드 뉴먼의 작품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는 당연히 예술적 이력과 명성만큼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자존심이 무척 강했고,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갔다. 불안정한 생활을 오래한 때문인지, 그는 금전관계 만큼은 ‘스크루지’가 울고 갈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이렇듯 비사교적인 현대음악의 거장 스트라빈스키는 하루 10시간 이상 골방에 틀어박혀 예술 세계에 골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최고 인물들과 돈독한 친분을 이어가며 입지를 다지는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스트라빈스키의 80회 생일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스트라빈스키는 합창곡 ‘케네디의 추억을 위하여’를 작곡해 케네디의 영전에 바치기도 했다.
전쟁으로 러시아에 돌아가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스트라빈스키에게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집을 제공했고, 이는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모티프가 돼 두 사람의 연인관계에 대한 진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피카소, 마티스, 앙드레 지드, T. S. 엘리엇, 장 콕토, W. H. 오든, 니진스키 같은 최정상 예술인, 문학인들과도 가까웠다. 이는 대중에게 스트라빈스키가 위대한 작곡가라기보다는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각인된 이유였다.
법학과에 진학한 스트라빈스키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휴양도시 오라니엔바움에서 태어나 4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그곳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집안은 원래 러시아와는 앙숙으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폴란드에서 100여 년 전 이주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러시아를 떠나 40년 넘게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프랑스, 스위스, 미국 등지로 떠돌아다니면서도, 자서전을 빼고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신고전주의가 확립되기 이전에는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 민족성을 엿볼 수 있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이는 주로 프랑스인 관객에게 이국적인 신비감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의 아버지 표도르 스트라빈스키는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에 다니던 중 성악가 재질을 발견하고는 당대 러시아 예술의 최고봉이던 마린스키 극장의 베이스 가수가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연주자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면 높은 보수에 안정된 미래가 보장됐지만, 작곡가는 무대에 설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아버지 표도르는 아들을 법대에 진학시켜 취미로 음악을 할 것을 원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법대에 진학했지만 스트라빈스키에게 법학은 관심 밖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거물급’ 친구들을 만났다. 러시아 발레의 선구자인 안무가 프티파,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예술인들과 만났다. 이를 통해 발레의 기본동작을 익혔고, 유럽 각 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두루 접했으며, 예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기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키울 자양분을 만들었다. 또한 독서광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그리스 비극과 중세 기사문학, 셰익스피어, 괴테, 단테, 디킨스, 위고 등 각국 문호들의 작품과 비평을 섭렵하며 문학적 소양도 키웠다. 이러한 예술적 배경 덕분에 스트라빈스키는 어린 나이임에도 시대별 작곡가의 작품 양식에 대한 호불호를 명확하게 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 사망 후, 스트라빈스키는 아버지의 ‘절친’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에게 맡겨져 6년간 그를 사사했다. 스승은 음악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왕벌의 비행’을 작곡한 유명 작곡가였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스승의 영민한 제자가 아니었다.
디아길레프와의 만남
스트라빈스키는 스승의 라이벌인 차이코프스키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탐미했다. 러시아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와 원리를 계승하는 ‘민족음악 5인조’의 한 명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차이코프스키는 서구 음악으로 민족정신을 흐리는 매국노’라고 비판했고, 그의 문하에서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배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스승이 탐탁지 않게 여긴 진보적인 새로운 음악 조류에 관심을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열망하는 음악을 숨기고 스승의 음악적 색채를 따라야 했기 때문에 초창기 그의 작품은 둥지 잃은 새처럼 모방작이 많았다. 그러던 중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를 만나면서 그의 독창성과 천재성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 대목에서 디아길레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2010년 3월 한국에서 공연된 독일 출신의 안무가 피나 바우슈의 대표작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의 야성적인 음악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그는 러시아로 발레를 수출했던 프랑스에 ‘러시아산 발레’를 역수출한 인물이었다. 발레는 프랑스 관객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마케팅 승부를 벌일 수 있는데다, 최고 기량의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이 펼치는 화려하고 수려한 작품으로 묘한 동경과 신기함을 줄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해줄 음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발탁한 작곡가가 바로 스트라빈스키였다. 발레에 쓸 관현악 편곡을 맡긴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시각적인 발레가 청각적인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서 어떻게 융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현대는 음악으로만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춤과 음악이 종속 관계가 아니라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안무가를 설득했고, 대중이 원하는 재미와 자극을 찾아 나섰다. 디아길레프가 뽑은 스태프들과 작업하며 스트라빈스키는 비로소 대가다운 면모를 발산했다. 발레 ‘불새’(1910)와 ‘페트루슈카’(1911)를 들고 유럽을 순회하면서 러시아 음악의 진수를 알렸다. 각 악기는 다채로운 기교를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사용했고, 그동안 맛볼 수 없었던 눈부시고 오묘한 음향을 선사했다. 관객은 열광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무명 작곡자였던 그는 일약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최고의 신예 작곡가로 발돋움했다. ‘불새’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화조(花鳥)’로 번역돼 소개됐다.
논란도 많았다. ‘페트루슈카’가 러시아에서 공연되었을 때, 그의 오랜 동지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 사단은 스승의 음악과 멀어지는 그의 음악을 놓고 “프랑스 향수를 뿌린 러시아 보드카”라고 혹평했다.
그의 경력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공연은 1913년 5월 29일 밤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한 ‘봄의 제전’일 것이다. 디아길레프 제작, 스트라빈스키 음악, 그리고 동성연애자로 디아길레프의 연인이자 러시아 발레 계승자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은 이 작품은 매진 사례를 만들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이교도들의 원시적인 의식을 연출하기 위해 미간이 찡그려지는 불협화음과 불규칙적인 변칙리듬을 연속적으로 사용해 관객의 불만을 샀다. 관객은 막이 오르자마자 웅성거렸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른바 예술적 파괴 강도는 폭발했고, 급기야 관객이 공연 중단을 요청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프랑스 향수 뿌린 러시아 보드카”
‘봄의 제전’은 태초의식의 민속적 초상을 통해 약동하는 봄기운과 거대한 자연의 원초적 기운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관객은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감미로운 음악에 토슈즈(toeshoes)를 신고 투투(tutu·발레 치마) 자락을 허공으로 날리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고난도 기술로 표현하는 품격 넘치는 예술에 환호했다. ‘봄의 제전’ 역시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무대 위 무용수들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에 발작 수준의 어그러진 몸짓으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용수들의 동작도 일사불란하지 못해 마치 관객을 조롱하는 듯했다. 이유는 이렇다. 당시 무용수들은 음악보다는 무대 뒤의 니진스키 구호에 맞춰 안무를 연습했다. 구호가 10 이상 되면 음절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빠른 박자에서는 뒷자리 숫자로만 구령해야 했다. 하지만 관객의 야유에 당황한 니진스키는 10이상의 숫자를 모두 호명해 박자가 엉망이 됐다. 흥분한 관객의 난동으로 무용수는 니진스키의 구령이 잘 들리지 않았고, 안무는 더욱 엉망이 됐다. 무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 공연은 불행 중 다행으로 문학이나 미술에서 제창하는 ‘아름다움만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슬로건을 음악과 발레에 적용해 새로운 흐름을 가장 강력하게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봄의 제전’으로 한때 그는 ‘음악 파괴자’로 불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불멸의 금자탑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시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는 법이다.
전쟁은 스트라빈스키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트라빈스키는 병든 아내와 유모,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에 정착했다. 전쟁 발발 전부터 어수선한 국제정세 때문에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은 개점휴업 상태였다. 거기에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둔 돈은 ‘인출불가’였으며, 자신의 저작권은 모두 독일출판사에 소속돼 있어 수입은 ‘제로’에 가까웠다.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반주를 하거나 돈벌이가 되는 소품의 작곡에 전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 생활을 청산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위해 프랑스에 정착했다. 사촌이었던 아내 예카테리나와 평안한 결혼생활을 15년간 이어가던 어느 날, 스트라빈스키는 무대 디자이너 수네이킨의 부인인 화가 베라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39세와 33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두 사람은 배우자들의 묵인 속에 연인 관계를 지속해나갔고, 아내 예카테리나가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하자 1939년에 정식으로 혼인한다.
스트라빈스키가 사망하는 1971년까지 베라는 스트라빈스키를 옆에서 충실하게 보살폈다. 하지만 자녀들은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의 두 집 살림을 목격한 터였다. 새엄마 베라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평생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렸고 소 닭 보듯 외면했다. 그럼에도 두 연인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죽음이 임박할 당시 재산을 둘러싼 베라와 자녀들의 마지막 암투는 심각했다. 장례식도 뉴욕과 베네치아에서 따로 치러야 할 정도였다.
1934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스트라빈스키는 안정적으로 신고전주의 음악을 이끌었고, 이에 걸맞게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며 여러 곡을 배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자유를 찾아 넘어온 음악가가 많았다. 어지간해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인산인해였지만 1945년 시민권을 받고는 차분히 음악생활을 영위해나갔다.
그는 “음악은 음악으로 받아져야 하며, 작곡가의 어떠한 상태와 감정은 의미가 없다”고 항상 강조했다. 예를 들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은 마요르카 섬에서 조르주 상드의 연인 쇼팽이 폐결핵으로 요양하며 작곡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빗방울의 영감을 받아 작곡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감상하는 사람은 빗방울 전주곡을 기억 저편에 간직한 개인적인 빗방울을 연상하며 감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자신과 음악을 진정으로 일치시킬 수 있다고 스트라빈스키는 본 것이다.
“작곡가의 감정은 무의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변했다. 스트라빈스키도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예술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차원의 창작 계기를 내면으로 탐구했다.
많은 이가 스트라빈스키를 두고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라는 평을 내린다. 이는 서양음악 사상 상극되는 음악 조류에 심취하면서 작품의 성향을 이렇게 뚜렷하게 변화시킨 작곡가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제까지 반대하던 음악 양식이라고 해도 어느 순간 뇌리를 스치는 예술적 불꽃을 발견하면 오늘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었다.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었지만, 음악에 대해선 항상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소탈하게 연구했다. 1951년 스트라빈스키는 현대음악의 물과 기름이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마르지도 않은 ‘데드 마스크’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사실 쇤베르크는 스트라빈스키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그의 작품을 싸구려 유행곡으로 매도했던 동료다. 두 사람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 같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했지만 전혀 왕래가 없었다. 스트라빈스키도 쇤베르크의 음악을 접했지만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일관되게 무시하고 외면했다. 그러나 1953년에는 쇤베르크 추모음악회 준비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만큼 쇤베르크의 반음계적 12음 기법과 음렬 기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12음 기법은 조성음악에 존재하는 으뜸음을 인정치 않고 1옥타브 안의 12개 음(흰 건반 7개, 검은 건반 5개)에 모두 동등한 자격을 주어 이를 일정한 산술적 규칙에 따라 배열 진행시키는 음악을 말한다. 원칙적으로 작곡가가 정해놓은 12개의 음렬을 되풀이해서 계속함으로써 구성되는데, 한 음이 연주된 경우 나머지 11개의 음이 연주되지 않고는 그 음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식이다. 그가 12음 기법을 창시한 1925년 무렵에는 그의 음악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그의 제자인 베르크와 베베른에 의해 발전해 20세기 후반 작곡가들에게 그의 기법은 작곡의 상식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위한 3개의 노래’(1953), 종교곡 ‘칸티쿰 사크쿰’(1955), 발레곡 ‘야곤’(1956), 오케스트라를 위한 ‘트레니’(1957/58)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새로 습득한 쇤베르크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다고 쇤베르크와 그의 추종세력의 기법에 완전히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독자적인 자신만의 음악에 새로운 조류와 경향을 이입시켰다. 여기에서 세상의 작곡가와 다른 그만의 저력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작곡 방식으로는 모차르트처럼 소리를 머릿속으로 연상하면서 펜과 오선지로 작곡하는 방법과 피아노 혹은 악기로 들리는 선율을 청각적으로 느끼며 작곡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항상 후자의 방법으로 작곡했다. 노년의 스트라빈스키는 노환으로 작곡 능력을 잃었지만, 죽기 얼마 전까지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피아노 건반을 열어 작곡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항상 안정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혁신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발전시켰다. 그가 주창하는 예술에는 항상 만족스러운 성취와 세속적인 명예도 따랐다.
그러나 그의 열정과 행운도 세월은 피해가지 못했고, 결국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고향도, 오랜 시절 거주했던 스위스나 프랑스, 미국도 아닌 이탈리아에 묻혔다. 변방 출신인 그에게 ‘음악 날개’를 달아준 디아길레프와 베네치아 산 미켈레 섬의 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다. 사실 1920년대 중반부터 두 사람은 금전적인 대우와 작품 노선 문제로 불화를 겪으며 1929년 디아길레프가 사망할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영면을 앞둔 스트라빈스키가 은인을 배신했다는 게 맘에 걸려 연고가 없는 베네치아에서 안식하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시작도 마지막도 디아길레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스트라빈스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