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우면서, 베란다를 바라본다. 겨울을 간신히 버틴 화초 몇 분이 봄 햇살을 기다리며 베란다로 나와 있지만 아직 날은 쌀쌀하다. 새 학기를 맞아 상급학교로 진학한 아이들 책상이며 책장을 새것으로 바꿔주면서 그 방에 있던 낡은 가구를 다 내다버렸지만, 그래도 못질 서너 번이면 고쳐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어두컴컴한 구석에 세워둔 책장이, 배수를 위해 조금 기울어지게 설계된 베란다 바닥 때문에 우중충한 장승처럼 비스듬히 서 있다. 낮에 널어놓은 빨랫감은 마르지 않은 채 거꾸로 매달려 축 늘어져 있다.
대여섯 걸음이면 충분한 베란다 한 폭! 이 정도만 해도 값으로 치면 3000만 원쯤 될지도 모르겠다. 뒷베란다까지 포함하면 5000만 원쯤? 성장기의 아이들이 언제나 신발을 마구 벗어놓는 현관 입구의 손바닥만한 공간도 2000만 원은 넘을 듯하고, 여기에 방 세 칸에 거실이며 부엌 쪽을 큼직큼직하게 계산해 7000만 원이요 8000만 원씩 잡으면 이 아파트의 4억 시세가 가늠된다. 요즘 시세는 어떻게 되지? 값이 올라도 걱정이고 내려도 걱정이라 동네 부동산 중개업소 전면 유리창에 나붙은 A4 용지 시세표에도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한 게 요즘의 심사라서 길쭉한 베란다 한 폭이 단순 계산으로 5000만 원이 넘을 수도 있는 이 기이한 ‘아파트족’의 삶을 담배 한 개비 태우면서 거듭 생각한다.
담배 연기를 막기 위해 재빨리 문을 닫으며 거실로 들어서는데, 베란다에서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 들어온다. 거실이라, 그렇게 불리는 공간이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무심히 TV 리모컨을 누르고는 다시 집 안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북쪽으로 난 작은 방에서 컸다. 그랬는데 벌써 중고교생이 되었으니 이 아이들에게 남을 어린 시절의 ‘방’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아내와 함께 쓰는 안방도 그 구조 자체가 어떤 틀을 강요한다. 그 안쪽 ‘부부 욕실’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간은 목욕용품을 쟁여두는 창고가 된 지 오래다. 거실은, 아파트라는 사각의 공간에서 억지로 도출해낸 집합 장소다. 마치 일시적인 대합실 같다.
휘청거리는 오후, 유폐된 처소
누구에게도 아늑한 밀실이 주어지지 않는 이런 공간에서의 한 생애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럴 때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거짓 낭만에 빠질 위험이 상당하거니와, 그럼에도 그 옛날에는 다락방이 있었고 지하실이 있었고 동네에는 골목이 있고 공터가 있고 거기서 5분쯤 벗어나면 야산이 있고 들판도 있었는데, 이젠 그 안팎 모두가 아파트의 신전이 되었으니, 어디 숨을 만한 방 하나 없는 처지 아닌가.
한국 사회가 가파른 팽창과 발전의 신화를 쓰던 저 1970년대에 박완서는 ‘휘청거리는 오후’와 ‘도시의 흉년’을 통해 이미 대도시의 중산층 가옥문화가 상당히 폐쇄적으로 급변할 것임을 증언한 바 있다. 그때는 서울 도심에 ‘신흥 양옥집’이 들어섰고 강남에는 아파트가 기립하던 때였다. 박완서는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당시의 양옥집을 이렇게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