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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권태균의 오지기행

농염한 복숭아꽃, 은은한 배꽃 꽃송이 넘나드는 백년 교감

충남 서산 용장리 일대

  • 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농염한 복숭아꽃, 은은한 배꽃 꽃송이 넘나드는 백년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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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염한 복숭아꽃, 은은한 배꽃 꽃송이 넘나드는 백년 교감

고추 모종 심기에 나선 태봉리 주민들.

마을에는 복숭아꽃과 더불어 적지 않은 배꽃도 눈에 띈다. 상대적으로 소박한 배꽃은 도화에 가려져 존재감조차 미약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꽃이 태양 아래보다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려 이조년(李兆年·1269~1343)은 달밤 아래 배꽃을 소재로 연모의 정을 노래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드러 하노라.

지금의 기성세대들에겐 귀에 익은 노래일 것이다. 국어 선생님에게 손바닥 맞아가며 외우던 바로 그 시조다. 수백 년 뒤 조선에서 부안 기생 매창(李梅窓·1573~1610) 역시 배꽃을 소재로 이별의 정한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비록 왕조는 다르지만 수백 년의 시간을 두고도 느끼는 정한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니 배꽃만의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배꽃은 천년 동안 봄마다 흩날렸고 특히 봄날의 밤마다 달빛을 희디희게 받아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꽃 하나를 두고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다. 이런 엄연한 사실에서 새삼 꽃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용장리, 용현리 구석구석을 걷다보면 노랗게 말라버린 대나무 숲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곳의 대나무는 사군자로 추앙받던 상록수의 대나무가 아니다. 지난겨울, 이상 혹한으로 인해 뿌리만 남고 몽땅 말라죽었다고 최순팔 할아버지(80)가 혀를 찬다. 짙푸른 대숲이 아니라 싯누런 대숲이다.

외지인이 서산 내륙 지방을 지나칠 때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용현리 마애석불이다. 국보 84호인 이 불상의 정확한 이름은 마애여래삼존상이다. 현존하는 마애불 중 최고로 인정받는데 백제인의 미소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위 위에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아도 향하는 방위는 동동남 30도로 동짓날 해가 뜨는 방향이고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이 향하는 방위와 같은 방향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농염한 복숭아꽃, 은은한 배꽃 꽃송이 넘나드는 백년 교감

혹한으로 인해 뿌리만 남고 몽땅 말라죽은 대숲.

국보 마애불의 자태

비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보호각을 철거한 덕에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달라지는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해 뜨는 방향으로 서 있어 볕을 풍부하게 받아들인다. 마애불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는 80도로 기울어져 있다. 비바람을 정면으로 받지 않아 오랜 풍우를 견뎌냈다고 한다. 옛날 백제인의 슬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과 같은 봄 한철, 마애불은 땀을 꽤 흘리실 것 같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엄청난 숫자의 학생으로부터 휴대전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해보라. 답사 여행 중인 대학 사학과 여대생 수십여 명이 몰려와 눈앞에서 조잘거리면 제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않을까?

마애불이 내려다보는 봄 들녘에는 짙은 연두색 색감이 넘실대고 있다. 산기슭, 무리로 선 도화 숲은 멀리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받아 일렁인다. 한때는 설움 많았던 관능의 꽃, 하지만 녹색 들판에 선홍빛이 눈부시다. 올해 봄도 이제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날 채비에 분주하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온갖 꽃의 아우성을 귓전으로 들으며 저만치 유월이 다가오고 있다.

신동아 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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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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