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익 추구가 없었다는 점은 김승연 회장도 마찬가지다. 김 회장에 대한 재판부 판결문에는 ‘김 회장이 개인적 이익을 편취한 바 없고, 부실 회사를 살리기 위한 구조조정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2심 재판부는 1심과 큰 차이가 없는 3년형을 선고했다.
상법 개정으로 형법 ‘견제’

한화그룹은 오너 회장의 공백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재계와 학계에서는 상법상 배임죄에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을 도입하려고 한다. ‘경영판단의 경우 예외로 한다’는 조항을 명문화해 배임죄 때문에 경영활동이 위축되는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회사 임원이 경영적인 판단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경우, 비록 그 판단이 잘못되어 결과적으로 손해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법원이 사후적으로 개입해 임원의 성실의무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리다. 1982년 미국 루이지애나 대법원의 판결 후 관습법의 판례법으로 발달했다.
배임죄에 대한 제한을 명문화한 사례는 다른 국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배임죄를 규정한 독일은 주식법에서 ‘이사가 기업가적 결정을 함에 있어 적정한 정보에 의거해 회사의 이익을 위해 행위한 것이라고 인정될 때는 의무 위반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종속회사가 지배회사에 자금을 지원해 종속회사가 손실을 입었더라도 고의성이 없으면 배임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다. 프랑스도 1985년 로젠블룸 판결에서 “자회사 또는 계열사 간 상호 지원이 있더라도 기업집단 간 발생하는 전체적 이익을 고려해 계열사 내부거래도 정당한 법률적 권리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배임죄 정의에서 ‘손해를 가할 목적으로’라는 표현을 명문화했다.
9월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배임죄 관련 상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최준선 교수는 “민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배임의 문제를 형법에서 다루는 형법상 배임죄 자체가 문제지만, 모든 배임죄를 다루는 형법에 경영자의 경영행위를 면책하자는 단서를 두기는 어렵다. 따라서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 방향으로 상법을 개정한다면 이 논리가 형법 및 특경가법에 적용될 수 있다”며 “이 경우 형법 개정 전에도 경영자 경영행위에 대한 형사적 면책이 가능해지므로 이명수 의원의 개정 방향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본격 논의
반론도 제기됐다. 박미숙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영판단의 개념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경영판단 행위의 유형화는 배임 행위의 유형화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라며 “불명확한 개념을 끌어들여 법 적용상의 판단 여지를 확장해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병수 법무부 상사법무과 검사는 “이미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판례들이 나오고 있어 굳이 입법할 실익이 의문시된다”며 “현행 상법에 회사에 대한 이사의 책임 감면 규정이 있어 ‘경영판단은 예외’ 조항과 중첩 적용되면 과도한 보호를 제공할 우려도 있다”고 주장했다.
재계는 ‘김승연 효과’를 우려하는 분위기다. 앞으로는 처벌이 두려워서라도 부실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부실 계열사를 정리하고 새로 회사를 세우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진이 배임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실형을 사는 기간에 발생하는 ‘경영 공백’도 기업 처지에서는 치명적인 폐해다. 실제로 한화그룹은 김 회장의 공백으로 이라크 재건 사업에서 우위를 상실했고 태양광 사업과 ING생명 인수전, 신사업 투자 등 경영 전반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재판 과정에서의 기업 이미지 실추도 큰 아픔”이라고 토로했다.
배임죄 관련 개정안은 9월 5일 공청회 결과를 바탕으로 보완된 뒤 올가을 정기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이번 기회에 배임죄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불명예를 벗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