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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사라센 해적(下)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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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 제국의 해적 퇴치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 남부해안에서 사라센 해적이 활개를 친 이유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해상치안을 확보할 방어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랑고바르드 족과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외침에 시달리는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해적이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몇 개의 게르만족이 나누어 지배하던 갈리아 지방은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742∼814, 영어로는 찰스 대제, Charles the Great)에 의해 하나의 유럽으로 통일됐다. 유럽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400여 년간 여러 왕국이 지배하는 분열의 시기를 거쳐 샤를 대제에 의해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하고 엘베 강 이남에서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전 유럽 지역이 샤를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의해 통일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오늘날 유럽연합(EU) 탄생의 기원을 샤를 대제의 서유럽 통일로 본다.

샤를 대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을 통일하고 800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까지 원정을 했다. 로마에 입성한 샤를 대제를 교황 레오 3세는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神聖)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탄생은 로마 교황과 비잔틴 제국의 관계, 샤를 대제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사라센 해적이 기독교의 본산이며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있는 로마 바로 앞에서까지 노략질을 해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 황제는 속수무책이었다. 군사력을 갖지 못한 교황은 자위 차원에서 군대를 조직해 해적에 맞서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726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우상숭배라고 하여‘성상(聖像·Icon) 철거령’을 내리고 로마의 교황에게도 성상을 모두 없애라고 하자 교황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비잔틴 황제를 파문시키는 것으로 맞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잔틴 황제와 교황은 격하게 대립한다. 교황의 파문에 맞서 비잔틴 황제는 랑고바르드 족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도록 했다.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는 교황으로서는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를마뉴 대제에게 기꺼이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수여한 것은 이러한 전략의 결정판이었다. 한편 야만족 출신으로 거대 왕국을 건설한 샤를 대제는 ‘로마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로마’라는 국호를 차용하게 된다. 아울러 기독교와의 일체성을 공표하기 위해 ‘신성’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받은 샤를 대제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할 책임자의 지위를 갖게 됐다. 라인 강 이북에서 야만 생활을 하던 프랑크 족은 원래 해양활동과 거리가 먼 민족이었다. 그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두 개의 함대를 창설했다. 남프랑스 해안을 책임지는 ‘아키텐 함대’와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지키기 위한 ‘이탈리아 함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함대의 활약은 사라센 해적을 퇴치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교황 레오는 샤를 대제에게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814년 샤를 대제가 죽은 뒤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사후 30년 만에 제국은 분열됐고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는 그의 자식과 손자들에 의해 오늘날 이탈리아·프랑스·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분할됐다.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지중해 연안 지역을 지켜주던 두 함대도 해산 시기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채 분해되고 말았다.

서유럽은 다시 전란 시대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혼란의 시기에는 눈앞의 싸움이 급한 법이며 당장의 문제에 몰두하기마련이었다. 해상치안까지 신경 쓸 여지는 도무지 없었다. 지중해는 다시 숨죽이던 사라센 해적들이 활개 치는 무법과 공포의 바다로 되돌아갔다.

해적 토벌의 선봉에 선 교황

기독교적 시각에서 암흑의 시대이던 중세시대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일한 지상의 수호자였다.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본거지인 로마까지 위협하는 상황에서 교황은 이교도의 침입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때로는 레오 4세와 같이 군사적 행동을 주도했다.

비잔틴 제국의 서부 수도 라벤나의 대주교로 있다가 914년 즉위한 교황 요한 10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사라센 해적을 몰아내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기로 했다. 그는 먼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와 이탈리아 왕 베렝가르와 동맹을 맺었다. 이어 이슬람에 맞서 싸운다는 성전의 기치를 내걸고 자원병들을 모집했다. 교황이 직접 군사를 모집해 해적과 싸운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교황은 사라센 해적선이 드나드는 가릴리아노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해군 세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교황의 권위와 현실적 난제 해결을 명분으로 나폴리·아말피·가에타와 같은 해군력을 가진 공국들에 성전에 참여하라고 요청했다.

사라센 해적을 물리치기 위한 ‘해상십자군 전쟁’이었다. 우리가 아는 십자군 전쟁은 이보다 훨씬 뒤인 1096년 ‘신이 그것을 바라고 계신다’는 구호 아래 기독교 세력이 결집해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이교도의 통치 아래 있는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었다. 어쨌든 가릴리아노 탈환 작전은 성전의 깃발 아래 이슬람 세력의 점령지를 탈환하기 위해 기독교 세력이 모여 군사작전을 했다는 의미에서 십자군 전쟁의 출발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군대를 이끌고 교황 요한 10세는 즉위 2년 후인 916년 사라센 해적이 점령한 가릴리아노를 탈환하러 진격한다. 그로부터 석 달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교황 요한 10세는 줄곧 진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칼을 든 교황’이었다. 전투 결과는 기독교 세력의 승리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사라센 해적 퇴치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자신의 정치적 행보는 불행했다. 928년 갈등관계에 있던 로마 귀족들에 의해 교황의 자리에서 쫓겨나 투옥됐고 얼마 뒤에 감옥에서 교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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