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 제국 로마가 멸망한 후 지중해는 사라센 해적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사라센 해적은 해적질을 이교도 기독교인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로마 멸망 이후 이슬람 세력권을 보여주는 지도.
역사에서 인위적인 단절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어느 시대의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긴 흐름 속에서 여러 요인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상호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사라센 해적의 발호도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에서 생긴 힘의 공백을 틈타 일어난 역사적 현상이었다.
무엇보다 로마의 역사가 곧 고대 유럽의 역사라 할 수 있을 만큼 고대 유럽사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영향은 막강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해적도 로마가 지배하는 지중해에서 로마와 속주를 오가며 무역하는 배들을 약탈하는 것이 주업이었고, 이들 해적을 소탕하는 것도 로마 해군의 몫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도 해적 소탕작전을 벌인 적이 있지만 해적 문제 해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로마 시대였다.
천년 제국의 위기
로마 멸망 후 등장한 사라센 해적은 이전까지의 지중해 해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집단이었다. 로마 멸망 전 그들을 괴롭히던 지중해 해적은 로마 제국 내부의 문제였고, 그것은 같은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망한 후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를 건너와 이탈리아 반도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인들을 약탈했다.
찬란한 천년 역사의 대제국 로마는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존속했지만 서로마와는 사실상 별개의 제국으로 존재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로마의 역사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는 게 정설이다.
전성기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로 에스파냐, 북으로 브리타니아, 동으로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와 근동, 남으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랜 기간 서쪽으로는 라인 강, 동쪽으로 도나우 강이 제국의 최전방 방위선이었다. 이 방위선을 따라 방벽을 설치하고 인근에 군단기지를 주둔시켰다. 이 선은 단순히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선이 아니라 문명세계와 야만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변경선 안쪽의 로마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학문과 예술이 융성했으며, 법과 제도에 의해 통치되고 사람의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였다. 반면 로마인이 보기에 변경 너머는 부족집단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쟁과 약탈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개한 야만 사회였다.
로마는 여러 대륙에 걸쳐 인종·종교·문화가 다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만민에게 공평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아울러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면 로마와 각지의 속주를 연결하는 도로교통망을 구축해야 했다. 이런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 가도는 황제의 통치가 변방의 속주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하고 속주의 일이 신속히 황제에까지 도달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제국의 수도에서 변방까지 잘 닦인 로마 가도는 거대 제국 로마를 작동시키는 신경체제였다. 야만족의 침략이 있거나 속주에서 반란이 발생한 경우 로마 가도는 신속하게 대규모 군사 이동을 가능하게 해 로마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로마는 AD 1세기 말부터 2세기 말까지의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기간에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성했으며 영토는 최대 판도를 이뤘다. 무엇보다 야만인들이 로마 방벽을 넘어올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변경의 방위가 튼튼했다. 로마의 가치가 곧 보편적 가치가 되고, 로마에 의한 질서의 구축이나 평화를 의미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가 열렸다.
오현제 시대까지는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 중에서 황제가 선임됐다. 그러나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황제 자리가 세습되면서 함량 미달의 군인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했다. 한꺼번에 여러 황제가 난립하기도 하고, 연이은 황제 암살과 팔미르·갈리아 지역의 반란 등으로 로마는 건국 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위기의 3세기’를 거치면서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로마의 개방성은 서서히 무뎌졌고 경제는 활기를 잃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은 심화됐다. 재정이 부실해져 잦아지는 야만족의 침입에 맞서 변경을 방위할 충분한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로마의 분열, 이슬람의 팽창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문명은 제국의 변경에서 시작됐다. 변경을 넘어와 로마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던 ‘야만족’들도 전쟁을 통해 최고의 문명과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된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점차 야만의 틀을 벗고 문명화해 갔다. 이들은 체계화한 통치체제와 군사조직을 갖춘 부족국가로 성장하면서 로마에 대한 침략의 빈도와 강도를 높여갔다.
로마가 언제부터 쇠퇴했는지는 정확하게 짚어내기 어렵지만, 3세기부터 시작된 위기를 겪다가 4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락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대한 변경을 방위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과 이를 위한 재정을 충당할 수 없었고, 그 임무의 대부분은 변경을 넘어와 살면서 로마인이 된 야만족 용병에게 넘어갔다. 여러 대륙에 걸친 광대한 속주는 대제국 로마의 상징이었으나 쇠잔해진 로마에 광대한 변경은 너무나 버거운 방위선이었다.
황제 한 사람의 힘으로 대제국을 통치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395년 로마는 동서로 분리됐고, 영토 깊숙이 쳐들어오는 야만족에게 무방비로 약탈당했다. 410년에는 제국의 중심부 로마 시내가 야만족에 침탈되기도 했다. 결국 476년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야만족에 의해 찬란했던 로마의 천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는 북방의 게르만계 야만인이 차지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반도를 2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탈환했다. 그러나 탈환에 성공한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죽은 후 남쪽으로 내려온 랑고바르 족이 이탈리아 반도의 일부를 점령하자 반도는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 족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나뉘게 됐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이는 세계사의 주요 분기점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어느 날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포교에 나선 것이 613년이다. 무함마드가 포교를 시작한 후 이슬람교는 봄날 마른 들판에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 불길처럼 급격히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슬람 세력이 커져가면서 무함마드는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발휘해 630년 신도군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했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할 당시 이슬람 세력은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해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채 20년이 안 되는 사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공동체는 종교적 최고 지도자이자 정치·군사 분야의 지도자인 칼리프(Caliph)가 정복지역을 확대하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해갔다.
무함마드 사망 2년 후인 634년에는 칼리프가 아라비아 반도를 완전히 손에 넣었고 635년에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동로마 제국은 속주 다마스쿠스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퇴하고 시리아는 온전히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슬람 세력은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 서쪽으로 서아시아,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진격했고, 642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해 이집트를 이슬람 세력화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진격해 698년에는 거의 모든 지역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슬람 세력이 짧은 기간에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진출한 데는 산맥이 없고 평지만 있어 아라비아 말을 타고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던 지형적 요인도 한몫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인들이 먹는 식량의 3분의 1을 공급하던 최대 곡창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다.
최고 수준의 과학지식
북아프리카를 제패한 이슬람 세력은 711년 폭 14.5km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거침없이 프랑스로 진격하던 이슬람 세력은 732년 피레네 산맥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에 패했다. 이로써 서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이 펼친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에 의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지인 그라나다에서 북아프리카로 물러날 때까지 피레네 산맥 이남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800여 년 동안 머물게 된다.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쿠란’으로 상징되는 이슬람 세력의 거대한 물결은 7~ 8세기에 걸쳐 전성기 로마 제국의 동쪽 영토인 소아시아 지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사마르칸트·카불 지역까지 뒤덮었다. 로마 제국 영토 중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본토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동유럽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곳곳에 남아 있는 해적 감시용 망루.
‘사라센’이라는 말은 그리스·로마인들이 아랍인을 부르던 ‘사라케니(Saraceni)’에서 유래했다. 애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을 사라센인이라고 불렀으나 점차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있던 베르베르인, 무어인을 포함해 지중해 건너편 북아프리카에 사는 이슬람교도 전체를 사라센인으로 불렀다.
아랍인·베르베르인·무어인은 비옥한 곡창지대를 차지했지만, 사막에서 이동하며 살아가는 유랑민족이라 농경에는 소질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이들이 생존을 위해 관심을 둔 것이 지중해 건너편의 기독교인들을 약탈하는 해적질이었다.
그런데 바다 일에 서툴렀을 사막 민족이 어떻게 거친 바다로 나아가 해적질에 나서게 됐을까. 그에 대한 답은 당시 아랍인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 천문학 등 과학지식과 나침반을 활용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졌고 선박 및 항해술에 뛰어난 그리스인들을 선원으로 부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게다가 해적질은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가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에 대해 성전을 벌이는 명분으로도 작용했다.
이슬람 해적이 기독교 세계를 처음 습격한 것은 652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이슬람 선박이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습격해 약탈하고 800여 명의 남녀를 납치해 갔다. 이슬람인들은 납치한 사람들을 알렉산드리아의 노예시장에 팔아버렸다. 1000년 넘게 지중해 연안에서 활약한 사라센 해적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사라센 해적은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0㎞ 떨어진 내륙에 건설한 카이루안과 카르타고, 튀니스 등을 근거지로 삼고 시칠리아의 수도인 시라쿠사를 계속 습격해 약탈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하던 시기에는 해적질이 뜸했으나 725년부터 해적질이 다시 시작돼 시칠리아 섬 해안을 노략질했다.
‘이슬람의 바다’
7∼8세기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였다. 사라센 해적들이 휩쓰는 이탈리아 반도 연안의 지중해는 무법의 바다였다. 사라센 해적들의 거듭된 침입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에는 약탈로부터 항행의 안전을 지켜줄 해군력도, 해적을 소탕할 여력도 없었다. 비잔틴 제국은 근동·북아프리카·소아시아를 이슬람 세력에 빼앗기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받았다. 북방에선 슬라브 족이 침입했다. 랑고바르드 족이 지배한 이탈리아 남부 일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탈리아 반도 연안은 사라센 해적의 노략질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항행의 안전이 위협받자 해상교역은 위축됐다. 값진 교역품을 싣고 지중해 연안을 활발히 오가던 상선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어선들도 먼 바다로 나오지 않고 연안에서 조업했다. 이렇게 되자 해적은 전략을 바꿨다. 바다를 지나는 선박을 공격해 약탈품을 챙기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인 해적질이 힘들게 되자 연안으로 상륙해 내륙지역을 약탈하는 수법을 택한 것이다. 대항해 시대 전 세계 해양을 누비면서 주요 항로를 오가는 무역선들을 공격해 물품을 약탈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사라센 해적들이 타고 다닌 배는 ‘푸스타(Fusta)’라고 하는, 노로 움직이는 소형 갤리선이었다. 크기가 작은 만큼 가볍고 빠른 장점이 있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해적질에 그만이었다. 푸스타에 몸집이 작은 북아프리카산 말을 싣고 해안에 상륙해 그 일대를 노략질한 후 납치한 사람들과 약탈품을 싣고 해안 기지로 돌아갔다.
푸스타는 소형 갤리선이지만 기본적으로 16∼20명의 노잡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납치해 온 기독교인을 노잡이로 써먹었다. 해적선의 노잡이에서 제외된 기독교인을 노예시장을 통해 이슬람 선박의 노잡이로 팔거나 강제로 개종시킨 뒤 군사로 내보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목욕장’이라고 불린 강제수용소에 보내 노역에 종사하게 했다.
10여 척의 소형 선단을 만들어 시칠리아 섬과 인근 해안을 약탈하고 돌아오던 해적들은 약탈 범위를 남프랑스 해안과 이탈리아 남부 해안으로 점차 확대해갔다. 이들은 샤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기지로 삼고 주로 계절풍이 부는 여름철을 이용해 이탈리아 해안을 습격했다. 심지어는 이탈리아 중부까지 진출해 교황이 있는 로마 근처에까지 약탈의 손길을 뻗쳤다.
해적의 습격에 시달리고 끊임없는 약탈의 대상이 된 해안지역 사람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과 가족, 마을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책을 찾아나서게 됐다.
토레 사라체노
해안지역 주민들은 자구책으로 해적선이 침입하는 것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도록 감시탑인 망루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도시와 사르데냐, 시칠리아 섬에는 지금도 곳곳에 이탈리아어로 ‘토레 사라체노(사라센의 탑)’라고 부르는 해적 감시탑이 남아 있다.
오늘날 이들 망루는 맑고 푸른 지중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당시에는 사라센 해적의 침입으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아픔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다.
먼바다에서 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해적선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무선통신이나 레이더를 통해 선박을 식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망원경도 없었던 시절이니 육안으로 발견하기 전까지는 해적선의 출현을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사라센 해적선들은 해적 문양을 새긴 깃발, 즉 ‘졸리 로저(Jolly Roger)’도 달지 않았다(사실 졸리 로저는 그로부터 몇 백 년 뒤 대항해 시대에 활동하던 해적이 달고 다니던 깃발이라 그 무렵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선박을 상징하는 푸른 바탕에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도 내걸지 않았다.
오늘날 터키,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의 국기들은 초승달에 별이 그려진 모양을 하고 있다. 무함마드가 마흔 살이 되던 해 히라의 동굴에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던 날, 밤하늘엔 초승달과 별이 나란히 떠 있었다고 한다. 622년 메카의 귀족들에게 박해를 받아 메디나로 떠나던 날 밤하늘도 똑같은 모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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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에서는 초승달을 어둠을 지나 밝음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슬람 국가들 중 처음으로 국기에 초승달과 별을 사용한 것이 오스만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래서 오스만의 침입을 받은 유럽인들에게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