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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감사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인생에 감사하지 않는 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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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빛에 눈을 뜨는 순간

푸슈킨은 타찌야나를 이렇게 묘사한다. “촌스럽고 우울하고 과묵하고 숲속의 사슴처럼 소심하여 제 집에 살면서도 손님처럼 어색하게 굴었다”고. 부모님께 응석 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또래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본 적도 없으며, 그저 독서와 몽상에만 흠뻑 빠진 문학소녀 타찌야나. 남자들은 모두 올가만을 쳐다볼 뿐, 타찌야나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네긴도 그 똑같은 남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목소리로, 그녀에게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힌다. 자신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고. 당신처럼 정숙하고 순진한 처녀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소.

내 영혼은 행복을 모르오.



당신의 미덕들은 내게 부질없소.

나는 그걸 받을 자격이 없소.



인생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권태와 우울에 빠진 오네긴은, 타찌야나의 편지를 부담스러워한다. 자신은 그토록 순수한 열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한다. 그는 자유를 꿈꾸지만, 사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기피한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해본 적도 없으며, 간절히 원하는 그 무언가를 향해 최선을 다한 적도 없다. 그리하여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타찌야나의 순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골생활의 무료함에 지친 오네긴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유일한 친구 렌스키의 연인 올가를 꾀어내어 춤을 추고, 친구의 배신에 분노한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오네긴은 결투에 자신을 내맡긴다. 결투를 거절하는 것이 결투에 응해 이기는 것보다 더욱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을, 오네긴은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제도나 인습에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결투라는 풍습’을 통해 남성성을 인정받으려는 그 시대의 관습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예정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이, 오네긴은 둘도 없는 벗 렌스키를 총으로 쏘고 만다.



그럼 누굴 사랑해야 하나? 누굴 믿어야 하나?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행동, 모든 말을 친절하게도 우리 눈높이에 맞춰줄 사람은?

우리를 헐뜯지 않을 사람은?

(…)우리의 결점조차도 눈감아줄 사람은?

절대로 우리를 지겹게 하지 않을 사람은?



친구의 주검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오네긴은 행방을 감춘다. 결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얼마나 치욕스러운지를 깨달은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타찌야나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오네긴은 어느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타찌야나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가 너무도 우아하고, 기품 있고, 주목받는 여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녀가 공작부인이 됐기 때문이 아니다. 파티에 나온 모든 여자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그녀는, 미모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지성과 지혜로 홀연히 빛났다.

그는 미친 듯이 타찌야나를 향해 구애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오네긴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한다.



“어째서 지금은 저를 쫓아다니시나요?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에 들게 되었나요? 지금은 상류 사회에 드나드는 몸이 되었고 부와 지위를 갖추었고 제 남편이 전장에서 불구가 되어 저희 부부가 황실의 총애를 받으니 그러시는 것 아닌가요? 저의 불명예가 만인에게 알려진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유부녀를 정복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뒤늦게 자신이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깨달은 오네긴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천하를 방랑하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나서야 뒤늦게 되찾은 사랑은 이미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다. 아니, 그녀는 그대로이지만 그녀의 상황이 그대로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우아한 여인으로 거듭났다. 오네긴은 자신의 뼈아픈 실수를 깨닫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바쳐 사랑을 향해 돌진하지만, 상처 입은 그녀의 영혼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었기에,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감사히 여기지 않은 것이다. 방탕하고 속물적이며 허영으로 가득 찬 그의 모든 결점까지 다 이해해주던 타찌야나의 사랑을 깨닫게 됐을 때, 이미 마지막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는 우울을 핑계로, 권태를 핑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실한 사랑의 순수한 빛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오네긴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죄, 자신에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인생의 축복에 감사하지 못한 죄가 아니었을까.

신동아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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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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