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사람은 비용이 아닙니다”

2000명 정규직 전환 ‘의리 경영’

  • 김유림 기자 │ rim@donga.com

    입력2014-09-18 16: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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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근로자 10명 중 3명은 비정규직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미명(美名) 아래 노동유연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노동시장이 개편되면서 많은 근로자가 열악한 고용환경에 신음하게 됐다.

    상당수 청소년이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정규직”이라고 답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IMF는 최근 “한국 노동시장의 양극화 및 비정규직 문제가 경제성장을 해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노동시장 양극화가 실업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지만 불평등을 심화해 경제 안정성을 저해했고 지속적 성장동력을 갖추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

    또한 근로자의 신분 불안정성은 노동생산성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맹자는 2300년 전에 이미 “생계가 불안하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無恒産 無恒心)”고 했다.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을 비정규직 문제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 선박직 직원 15명 중 9명이 비정규직이고, 선장도 1년 계약으로 고용됐다. 이들의 비도덕적 책임 윤리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상태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동아’는 비정규직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가며 노사화합을 시도하는 기업을 ‘이윤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기업’, 즉 ‘인본(人本)기업’으로 정의하고 그 실태를 살펴본다. 그 첫 회는 한화그룹이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초, 10대 그룹 중 최초로 비정규직 직원 2000여 명을 일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평소 ‘신용과 의리’를 강조하는 기업답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에서 ‘통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람은 비용이 아닙니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큰 키와 늘씬한 몸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려오는 그의 가슴팍에서 사원증이 경쾌하게 흔들거렸다.

    이름 조푸르내. 한화손해보험 총무과 정규직으로 근무 중이다. 올해 26세인 그는 사실 “젊음이 벼슬”이라는 취업 시장에서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다. 3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던 조씨는 출산휴가를 간 정규직 여직원의 업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화손보에 ‘파트타임(PT)’으로 입사했다. 2년 계약기간을 채우고 나니 어느덧 스물다섯. 계약 만료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처럼 안정적이고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계약 만료 며칠을 앞두고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파트타임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는 것. 그는 “집안의 경사였다. 부모님이 ‘이제 발 뻗고 자겠다’고 하셨다. 같은 부서 팀원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뀐, 충청도에 위치한 한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한 그에게 사실 대기업 정규직 입사는 꿈만 같았다.

    “대부분의 대학 동기가 지금도 소규모 중소기업이나 사무실에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일해요. 월급도 적고 전문직도 아니고…. 저는 정말 행운아죠. 지금도 서울 여의도의 이 좋은 건물에 제 책상이 있다는 게 때로는 믿기지 않아요.”

    “사람은 비용이 아닙니다”

    2012년 한화그룹 고졸공채 신입사원이 노인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신분 상승’ 후 달라진 점이 많다. 먼저 연봉이 800만 원 올랐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당당함’이다. 매년 20일 정도의 정기휴가, 회사 콘도 이용 등 사내 복지 혜택을 당당하게 누릴 수 있게 됐다. 조씨는 “파트타이머일 때는 매번 6500원짜리 식권을 사서 구내식당을 이용했는데 이제 사원증만 찍고 직원 할인가(4500원)로 점심을 먹는다. 소박하지만 즐거운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파트타이머로 일할 때 겪은 창립기념일의 설움에 대해 들려줬다.

    “매년 창립기념일에 회사에서 ‘선물 목록’이 내려와요. 청소기, 운동기기, 녹즙기 뭐 이런 선물 중 한 가지를 선택하면 사원들한테 주는 거예요. 사실 금액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되지만 ‘나는 비정규직이라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선물을 못 받는구나’ 싶어서 내심 섭섭했어요. 선물을 받는 다른 직원들도 제 눈치를 보는 것 같고…. 근데 이젠 당당하게 받을 수 있어요. 이번에 청소기 받아갔더니 엄마가 엄청 좋아하시던데요.(웃음)

    대기업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몇 명 있는데, 2년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회사 쪽에서 ‘다른 계열사에 잠깐 있다 와라’ ‘잠깐 쉬다 와라’는 식으로 유도한대요. 일단 정규직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걸 전제로 협상을 하는 거죠.”

    지난해 정규직으로 전환된 플라자호텔 직원 이슬기 씨도 “전환 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주변 직원들에게서 ‘애사심이 커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전했다. 만약 정규직 전환이 안 됐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 대전에 내려가려 했는데, 정규직 전환 후 일에만 집중하게 됐다는 것. 그는 “일본 손님에게 더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비용이 아닙니다”


    여성인력 고용안정 효과

    비정규직 문제에는 남녀 편차가 있다. 남성보다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고, 같은 비정규직 내에서도 여성의 임금이 더 적다. 한화그룹이 정규직으로 전환한 근로자 중 약 60%(1200여 명)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는 출산 이후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사내 보육시설 등의 복지를 지원받지 못하는 경우 육아 때문에 직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 비정규직 근로자들에게 이런 복지 혜택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한화의 정규직 전환은 여성 고용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화 계열사 중 가장 많은 인원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회사는 한화호텔앤리조트다(총 704명). 이 회사 이상열 인사팀장은 “결과적으로, 정규직 전환 당시 처음 우려했던 것에 비해 부담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의 만족도가 높은 것 같다.

    “우리 그룹의 ‘비정규직 이후 정규직 전환 비율’이 본래 꽤 높은 편이었다. 자녀 대학 학자금 지원을 제외하면 연차에 따른 복리후생 차이도 크지 않은 편이었고. 하지만 직원 처지에서는 ‘단 5%의 계약 해지 가능성’도 불안했던 것 같다. 지난해 정규직 전환 후 불안감이 해소되니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그것이 서비스 질 향상으로 이어진 것 같다. 이직률이 크게 떨어졌고 그렇다보니 재고용을 위한 교육비용도 줄어들었다.”

    ▼ 이후에는 정규직 채용이 늘어났나.

    “실질적으로는 비정규직 채용이 없어졌다.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꺼리던 인재가 많이 몰린다. 우수 인력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정규직 전환이 기업에 이익을 안겨준 것이다.”

    ▼ 인건비는 증가하지 않았나.

    “물론 인건비도 비용이다. 하지만 사람을 비용으로만 봐서는 기업이 성장할 수 없다. 다른 기업들도 과감히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유한다.”

    ▼ 올해 한화그룹 전체 채용 규모가 줄어 ‘조삼모사(朝三暮四)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채용은 경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경기가 안 좋으니 채용 규모가 줄 수밖에 없다. 또한 정규직 전환으로 이직률이 낮아지면서 채용 규모가 줄어든 경향도 있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

    한화그룹은 2012년부터 업계 최초로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채용전제형 인턴제도’를 실시했다. 자기소개서, 면접, 합숙 과정을 거쳐 선발한 후 고교 졸업과 동시에 한화그룹에 입사하도록 하는 제도다. 고3부터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나서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남보다 먼저 질 좋은 일자리를 예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013년에는 516명, 2014년에는 371명이 이 제도를 통해 한화그룹에 입사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고2 때 채용이 결정되다보니 입사를 포기한 채 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학생도 많다”고 덧붙였다.

    한화 갤러리아 백화점에 근무하는 박혜민 씨는 올해 열아홉 살이다.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자서…”라며 수줍게 웃는 표정에서 앳된 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한 박씨는 2011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디자인고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했다. 2년 전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한화 고교 인턴제도에 지원했다. 그는 “같은 반 친구 10명이 지원했는데, 3명이 최종 합격했다”며 웃었다.

    “사실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대학에 진학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없었어요. 만약 한화에 채용되지 않았다면 지금 고등학교 친구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전문대를 다니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쨌든 이런 조건에서 이런 월급을 받고 일하는 건 쉽지 않았겠죠.”

    오전 9시 20분부터 백화점 폐장시간인 오후 8시 반까지, 한두 시간을 빼고 하루에 꼬박 10시간을 서 있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박씨는 연신 밝은 표정이었다. “중학생, 초등학생 동생이 있어서 부모님 부담이 큰데, 손 안 벌리고 돈 버는 것이 좋다”는 그는 “지금 열심히 사니까 미래에 대한 계획도 치밀하게 세울 수 있다”는 속 깊은 이야기도 했다. 박씨는 “월급의 절반 이상을 저축한다”며 “지난달 엄마에게 용돈으로 50만 원을 드렸다”고 수줍게 자랑했다.

    한화그룹은 고교생 채용 규모 확대에 따른 인력 육성책으로 지난해 3월부터 ‘한화기업대학’을 운영한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나선 고졸 사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경희대사이버대와 함께 운영하는 이 ‘사내대학’은 정원 600명, 3년제 비학위 과정으로 운영된다. 전공은 금융, 호텔경영, 건축, 기업실무, 경영 등이다.

    박씨도 올 초부터 사내대학 수업을 듣는다. 그는 “평상시에는 인터넷 강의로 수업을 듣고 정기적으로 경기도 가평 연수원에 가서 강연도 듣는다. 오늘 아침에도 숙제하라고 문자가 왔다”며 “사내대학을 이수한 경력을 바탕으로 나중에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찾아 내 능력으로 대학에 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퇴직한 직원에게도 성과금

    “사람은 비용이 아닙니다”

    고2를 대상으로 한 ‘채용전제형 인턴제도’를 통해 한화 갤러리아 백화점에 입사한 박혜민 씨.

    직원들은 한화그룹의 인력관리 제도나 ‘사풍(社風)’에 기업의 윤리강령인 ‘의리와 신용’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입을 모았다. 한화호텔앤리조트 이상열 팀장의 말이다.

    “저는 1992년 한화그룹에 입사해 22년간 근무했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제가 다니던 계열사가 구조조정되면서 1년간 다른 대기업으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한화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재직할 때의 업무에 대한 성과금이 나왔으니 지급하겠다는 거예요. 물론 원칙적으로는 퇴직한 직원에게도 성과금을 지급하는 게 맞지만, 당시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경쟁 대기업으로 이직한 사원에게 성과금을 준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밖에 여러 사례가 있는데…. 아무튼 저도 한화의 ‘의리’를 잊지 못해 1년 만에 되돌아왔습니다.”

    이 팀장은 “고졸사원을 뽑을 때도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보훈가정 출신이거나 생활보호대상자인 경우 가산점을 준다”고 귀띔했다.

    기업에서 누군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일자리를 가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쁨과 보람이 모여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기회의 사다리를 내주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한화그룹의 신조가 돋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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