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독점공개

간첩 누명 벗은 北국경경비대 홍강철 상위 수기

“인민의 충복은 당 간부 아닌 국경 밀수꾼”

  • 입력2018-01-2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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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 길 안내 1명당 1400만 원 받아

    • 2세대 이산가족 피눈물 흐르는 압록강

    • 밀수가 경제난·대북제재 극복 1등 공신

    • 인신매매 밀수 보장…‘1만 달러 벌기 운동’

    • 돈맛 들이면 손 못 떼는 마약 밀수

    북한군 국경경비대원이 망원경으로 중국 쪽을 살피고 있다.

    북한군 국경경비대원이 망원경으로 중국 쪽을 살피고 있다.

    * 탈북민 홍강철 씨는 북·중 접경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잘 아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가 국경경비대에 관한 책을 써 출간하려고 골자를 적은 5만8000자(200자 원고지 290장) 분량 수기의 일부를 공개한다.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북한 사람들이 왜 군에 가는지부터 말하는 게 옳을 것 같다. 한국처럼 징병제인지 물어보는 이가 많은데 그때마다 답하기 곤란하다. 북한은 징병제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국 보위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라고 말하기는 하나 다음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면 군사 복무에서 제외한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하면 군 복무 제외 대상이다. 북한군은 다른 나라 군대에서 보이는 안경 쓴 사람도 없다. 시력 0.6 정도로도 군 복무가 어렵다. 가족 중 노동교화소(한국의 교도소)에서 형을 사는 사람이 있으면 제외된다. 부모가 이혼해도 군에 보내지 않는다. 외아들이 군에 가는 것은 본인과 부모 의사에 따른다. 본인이 가겠다고 해도 부모가 못 보내겠다고 하면 제외한다. 

    군 복무기간은 13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군에 가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면 노동당에 들어가기 힘드나 군에 가면 입당할 확률이 60%가 넘는다. 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에 가기 힘들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는 대학 입학이 수월하다. 사회 풍조도 군 복무를 해야 남자로 쳐준다.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조건에서도 군 복무 경력이 우선시된다.

    사상과 신념의 대결장

    “동지들, 불빛 찬란한 강변에서 밀수와 밀수 보장의 대가로 치러지는 몇 푼의 돈이 우리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상과 신념의 대결장, 조국의 국경을 굳건히 지킵시다!” 



    내가 복무한 국경경비대 선동문 중 하나다. 저녁 근무준비검열이 끝나면 계급교양(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계급의식으로 무장하는 활동)을 하고 선동문을 합창한다. ‘밀수 보장’은 밀수 행위를 눈감아 주고 돈을 받는 행위를 뜻한다. 

    북한에서는 국경을 ‘사상과 신념의 대결장’이라고 일컫는다. 지금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사상과 신념의 대결장을 지켜 선 ‘조선국경경비대’에 관한 것이다. 

    압록강에는 국경경비대가 관할하지 못하는 두 개의 특수구역이 있다.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 물홈(물이 모여서 이룬 웅덩이를 가리키는 북한 말로 도강을 막고자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과 평안북도 벽동군 간상 물홈이다. 약수리에는 김일성 시대부터 사용하던 특각(최고지도자 별장)이 있다. 1996년 이전에는 약수리 특각 인근도 국경경비대가 관할했다. 

    어느 날 국경경비대 약수리 초소장과 대원들이 술에 취해 있을 때 특각에서 간부 하나가 초소로 찾아왔다. 

    “중앙당 가족 아이들이 휴양을 왔는데 수상오토바이를 타려고 하니 국경 출입을 허용해주시오.” 

    여기에서 중앙당 가족 아이들은 김정일의 자식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약수리 특각에서도 물홈을 벗어나 압록강으로 나가려면 국경경비대 승인을 받아야 했다. 특각에서 나온 간부는 나긋한 말투로 말했으나 술에 취한 초소장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중앙당 가족이면 국경 출입을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중앙당 가족들이니 국경 질서를 더 잘 지켜야죠. 여단 참모부 승인을 받고 오시오.” 

    이튿날로 국경경비대 약수리 초소는 없어지고 그곳에 호위사령부가 들어앉았다. 국경경비대가 약수리 물홈 일대를 관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압록강의 피눈물

    간상 물홈은 1970년대부터 국경이지만 국경경비대가 관할하지 못했다. 간상 물홈에는 북한 유일의 핵물질 관리부대인 509군부대 산하 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닫긴구역’으로 부대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드나들 수 없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군인증’이 아닌 ‘공민증’을 사용하는 군대로 영내에 거주하는 가족 모두가 군인이다. 공민증을 사용하면서도 군사 칭호를 수여하고 실탄을 소지하고 무장경비를 선다. 여자의 경우만 시집갈 때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시집간 딸이 사위와 함께 본가에 놀러와도 딸만 부대 영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위는 초대소에서 묵어야 한다. 

    북한에서 평안북도 대관군, 삭주군, 창성군, 벽동군을 ‘대관 이북’(대관군 북쪽이라는 뜻) 출입통제구역으로 일컫는데 그 이유가 약수리 특각과 함께 509군부대와 같은 공개되지 않은 특수부대가 전개돼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경지역 사람들은 장날이면 중국에 다녀왔다. 반두나 투망을 갖고 중국 쪽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도 국경경비대가 가만 놔뒀다. 중국 쪽에 가서 낚시하고 음식을 끓여 먹어도 통제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맺자 국경경비대를 증편하면서 중국 쪽으로 못 가게 통제했다. 

    국경 통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수십만의 2세대 ‘이산가족’과 ‘범법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탈북민은 국제사회에서 난민으로 취급받는 데 반해 북한 법은 ‘비법월경자’로 규정한다. 

    배가 고파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이들은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아도 정상이 참작된다. 한국에 가려고 기도하지 않고 중국에서 살기만 했다면 노동단련(한국의 구류와 비슷하나 노역을 한다) 6개월 정도의 처벌을 받는다. 한국행을 기도한 때는 노동교화형(한국의 징역형) 2~3년은 받아야 한다. 범죄를 저지르고 비법월경한 사람은 민족반역죄까지 적용해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질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라고 일컫지만 북한에서는 ‘◯◯호 관리소’라고 칭한다.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이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으나 간도, 시베리아로 넘어간 이들을 범법자로 잡아 가두고 노역을 살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중 국경’을 사상과 신념의 대결장으로 정한 오늘날의 압록강과 두만강에는 수많은 2세대 이산가족의 피와 눈물이 흐른다.

    북한 돈 아니라 달러나 위안 깔고 앉으려 해

    당과 수령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상당히 변했다. 아사(餓死)를 겪으면서 당과 수령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굶어서 움직일 수 없는데 옆에 누워 있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사람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지금 살아 있는 북한 사람들은 그런 시절을 겪은 이들이다. 1996년 봄 수많은 아사자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칡뿌리를 캐 먹으면서 산에 올라가 화전을 일구고 식량을 자급자족한 이들은 이듬해부터 굶지 않았다. 이때 장사에 눈이 튼 사람들은 2010년 화폐교환 때 폭삭 망하기도 했지만 장사로 다시 일어나 지금도 잘산다. 

    북한 사람들은 수뇌부가 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제2의 고난의 행군’ ‘제3의 고난의 행군’을 마음속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북한 돈이 아닌 달러화나 위안화를 깔고 앉으려 한다. 

    국경경비대는 소대에 장교가 3명 있는데 보고 라인이 서로 다르다. 참모부, 정치부, 보위부 3축이 군을 유지한다. 참모부가 기본 부서인데도 대부분의 부대에서 참모부는 정치부와 보위부에 밀린다. 소대장은 중대장에게, 중대장은 대대 참모부에, 소대 정치지도원은 중대 정치지도원에게, 중대 정치지도원은 대대 정치부에, 소대 보위지도원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에게,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은 대대 보위부에 보고하는 3중 구조다. 

    이 같은 구조여서 날마다 ‘3위 일체 협의회’를 열어 소대장, 정치지도원, 보위지도원이 협의해 통과된 문제만 자신들의 직속상관에게 보고한다. 3위 일체 협의회의 원래 목적은 소대 군사정치훈련과 경계근무를 잘 수행하고 소대원들 속에서 정치적 사고와 각종 군사규율 위반 행위를 근절하는 것이나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밀수 및 밀수보장 협의회’가 되는 경우가 잦다.

    고양이와 쥐가 동지 되는 ‘밀수’

    북한의 요충지에는 ‘130호 동식물 연구소’라는 것이 있다. 국가안전보위성 소속 기관으로 동식물 연구를 구실로 해 국경지역과 요충지에서 주민 동향 감시와 정보 수집을 한다. ‘130호 동식물 연구소’는 특공대 투입이 예상되는 깊은 산속에까지 가족 단위로 배치돼 있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길목의 국경경비대 초소 옆에도 130호 동식물 연구소가 붙어 있다. 국경경비대 소대 옆에 붙어서 국경 연선(沿線)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하니 소대 내 비밀이 130호 동식물 연구소를 통해 여단에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불협화음을 없애고자 3위 일체 협의회에 ‘130호 연구사(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까지 참가시켜 때로는 ‘4위 일체 협의회’가 된다. 여기에 밀수를 전문으로 하는 중국인까지 참여하면 ‘조중친선 5위 일체 협의회’가 된다. 

    국경경비대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은 내부 사업, 즉 대원들의 동향 장악이 기본 사업이기에 쥐와 고양이 사이다. 쥐와 고양이 같은 관계가 지속되는 속에서도 둘의 마음이 맞을 때가 있다. 밀수할 때가 그렇다. 3위 일체 협의회에서 밀수를 토론하면 그때는 마음이 잘 맞는다. 나는 소대장을 하면서 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이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면 밀수를 통해 사이를 풀어주곤 했다. 

    국경경비대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병종 중 하나다. 국경경비대가 국가안전보위성 경비총국에 속하던 시절에는 대원들의 부모 대부분이 당, 사법, 검찰, 안전, 보위 부문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1995년 국가안전보위성 경비총국이 총참모부에 소속되면서 81군단을 거쳐 국경경비사령부로 증편됐는데 모자라는 인원을 갑자기 끌어모으다 보니 노동자, 농민의 자식도 국경경비대에 다수 입대했다. 현재의 국경경비대는 군사동원부에 돈만 들이밀면 누구나 갈 수 있기는 하나 여전히 당, 사법, 검찰, 인민보안, 보위 일꾼의 자녀가 많다. 

    집안 배경이 좋은 이들이 많다 보니 국경경비대 군인은 일반 보병보다 생활력이 강하지 못하고 비법월경자를 비롯한 국경 질서 위반자를 잔인하게 다루곤 한다. 국경에서 총을 쏘지 말라는 게 북한군 최고수뇌부의 일관된 지침인데도 탈북하는 사람에게 총을 쏘며 중국 땅까지 쫓아가 잡아가는 국경경비대 군인의 대부분은 부모가 간부로 있는 애들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비법월경자를 비롯한 범법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마구 다루는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려 시기에도 인삼 밀수는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려 시기에도 인삼 밀수는 있었다.” 

    밀수는 국가라는 통제 권력이 생기면 반드시 존재한다. 밀수는 법적으로 볼 때는 범죄지만 때로는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북한에서 일어나는 밀수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가장 큰 공신 중 하나가 밀수다.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밀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식량난을 겪으면서 광범위하게 확대됐다. 

    고난의 행군 시기 약초와 버섯, 동(구리), 늄(알루미늄), 파철 등을 밀수해 쌀, 기름, 생필품을 들여오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속옷은 물론 전구, 손톱깎이 같은 일용잡화도 밀수로 해결했다. 

    북한에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이라는 구호가 있다. 당이나 정권기관 간부가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것인데 당, 정권기관 간부보다 밀수꾼들이 오히려 인민의 충복이다. 

    간부들은 시장에 어떤 물품이 없으면 지위를 이용해 돈주머니를 채울 궁리부터 한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무산시장에 가루비누가 동난 적이 있다. 그걸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은 비누를 생산하는 무산화학공장 지배인이었다. 그는 장사꾼들에게서 돈을 꿔 라진-선봉에 가서 가루비누를 사다가 시장에 풀었다. 공교롭게도 군당 조직비서 아내가 시장에 가루비누가 없는 것을 알고 라진-선봉에 가서 가루비누를 들여왔는데 무산화학공장 지배인이 선수를 친 것이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군당 조직비서 아내가 돈을 벌지 못한 화풀이에 나서면서 화학공장에 재정 검열이 붙었고 그 결과 지배인은 목이 떨어져 ‘혁명화’ 대상이 됐다. 

    당 간부들은 지위를 이용해 돈을 버는 반면 밀수꾼은 시장 요구를 제때 파악해 소비품을 가져와 시장에 푼다. 국경경비대에 ‘연선비’(밀수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오가는 돈)를 떼어주고 나면 실제로 떨어지는 돈도 적다. 그러다가도 법망에 걸려들면 ‘노동교화’를 간다. 그러니 목숨을 내놓고 인민을 위하는 ‘진정한 인민의 충복’은 밀수꾼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사선을 헤치며 일하는 밀수꾼이 있기에 북한 경제가 제재를 받으면서도 건재한 것이다. 물론 국경경비대원들도 밀수꾼들 덕분에 먹고산다.

    한국산 노트북 ‘써비’로 들어와

    북한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주도로 국가 밀수도 이뤄진다. 국가 밀수는 중국 당국이 무역 금지 품목으로 정한 물품을 중국인 밀수꾼과 개별적으로 거래하는 행위를 말한다. 국가 밀수에서 일등 공신은 처형당한 장성택으로 알려져 있다. 당 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실 밑에 장성택 주도로 여러 차례 밀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함경북도 같은 경우는 개별적 외화벌이 일꾼이 중국 밀수꾼과 연계해 국경경비대를 끼고 승용차 밀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중앙당에서 직접 내려왔다. 북한산 담배 밀수는 대체로 신의주에서 컨테이너로 넘기는 형태로 이뤄진다. 

    국가 밀수를 할 때는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총책임자로 국가안전보위성 부처장급 1명, 인민보안성 부국장급 1명, 무역성 지도원 1명, 세관원 등이 참여하고 국경경비대 초소장과 보위지도원도 발을 담근다. 

    ‘밀수 그루빠’가 평양에서 전화나 팩스로 물건을 넘겨받을 중국 밀수꾼들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내려오면 국경경비대 초소장과 보위지도원(국경경비대 대대급이나 중대급에서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의 동행하에 연선에 나가 중국 밀수꾼을 만나 구체적 계획을 토의한다. 물건을 넘기는 현장에는 국경경비대와 무역성 지도원들만 나간다. 국경경비대는 밀수 전 과정에 대한 감시와 무역성 지도원들에 대한 경호를 담당한다. 

    밀수를 나가면 중국인들이 대금과 함께 북한에서 ‘써비’라고 부르는 물건들을 넘겨준다. 써비를 건네는 것은 앞으로 잘 해보자는 일종의 비즈니스 행위다. 써비 품목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이 부탁한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과 식료품이 많다. 한국산 노트북이나 가전제품 등도 써비로 들어온다. 이런 물건을 받았다는 것이 보고되면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도 무사하지 못하다. 그래서 국경경비대 여단장이나 정치위원, 참모장, 정치부장, 보위부장 등에게 부탁한다. 

    밀수를 나가면 여단에서 전화가 내려온다. 이번에 나가면 중국 애들이 써비로 어떤 물건들을 가져오는데 아무개가 부탁한 것이니 모르는 체하고 통과시키라는 것이다. 내가 밀수나 밀수 보장을 하다가 걸려들 수 있는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상급의 지시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집행한다.

    김정일 처남 행세한 ‘오문혁’

    국가 밀수를 하러 내려온 간부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물품을 가지고 와서 국경경비대 지휘관들에게 밀수해달라고 부탁한다. 국경경비대 지휘관들은 자기 몫도 떨어지기에 이 같은 부탁을 은근히 반긴다. 중앙에서 내려온 간부들이 가지고 온 밀수품은 대체로 골동품이나 감람석, 자수정과 같은 보석류가 많았다. 

    김정일의 처남으로 행세하면서 밀수를 해 먹다가 총살당한 이도 있었다. 함경북도 연사군에는 김정일의 처남을 자처한 ‘오문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고수뇌부에 대한 정보가 철저하게 관리되기에 함경북도당과 양강도당 책임비서 이하 당, 정권기관, 인민경제기관, 사법 검찰기관 일꾼 누구도 오문혁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오문혁은 수년 동안 함경북도 연사군과 대홍단군, 삼지연군의 목재를 삼장세관을 통해 무역했는데 연사군 같은 경우는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나무를 베도록 했다. 북한에도 ‘산림법’이 있는데 이를 어기면 노동교화형까지의 처벌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정일의 처남이라는 오문혁의 한마디에 국가가 정한 법을 어기는 행위가 묵과됐다. 

    오문혁 덕에 연사군 사람들은 한 시절 잘살아보기도 했다. 연사군이 북한에서 인구 비례상 오토바이가 제일 많을 정도다. 오문혁은 연사군을 ‘어머님의 고향’(함경북도 연사군이 김정일 부인, 즉 자기 누이의 고향이라고 주장함)으로 꾸미는 사업까지 벌였다. 오문혁의 누이 중 한 명이 김정일의 부인이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오문혁은 2008년 여름 ‘해방 후 최고의 정치 사기꾼’으로 몰려 공개처형됐다. 오문혁은 당시로서는 총살형 집행에서 가장 많은 총탄 세례를 받았다. 무려 90발을 맞았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북한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사회와 간부들이 돈맛을 알면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부패와 위법의 먹이사슬

    이런 꼴을 보면서 복무하는 국경경비대 대원들은 한국에서 탈북 지원(강을 건너게 도와주는 행위)이라고 부르는 일을 비롯해 마약 밀수까지 다양한 위법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위법행위 대부분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경 연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위법행위는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의 묵인 또는 그의 참가하에 이뤄진다. 대대급으로 올라가면 국경 연선에 나갈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연선에 나갈 구실도 없다. 그러니 중대급에 있을 때 실컷 해 먹는다. 규정대로라면 소대 경비구역의 경계근무 책임자는 소대장이다. 경계근무 책임자인 소대장의 승인 없이는 누구도 국경 연선에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중대 책임 보위지도원들은 근무순찰을 한다는 명목으로 국경 연선에 나가서는 마음대로 잠복근무를 지정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이 밀수 상대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잠복근무가 배치돼 있으면 다른 곳에 정황이 생겼다면서 잠복근무조를 다른 곳에 가 있도록 한다. 물론 잠복근무 성원들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이 국경 질서를 어기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들의 위법행위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에게 드러났을 때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훗날 자신의 위법행위를 사건화할 때 그런 문제들을 들이대고 거래를 한다. 

    중대 책임보위지도원도 밀수와 밀수 보장을 위해 벌어들인 돈을 상부의 힘 있는 놈에게 찔러준다. 돈 먹은 놈은 훗날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이 위법행위로 걸려들었을 때 살려준다. 북한군 보위부 내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직업은 ‘대렬 지도원’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감찰’과 비슷한데 보위지도원들의 저승사자다. 대렬 지도원에게 잘못 걸리면 군복을 벗거나 처벌을 받기에 대부분의 중대 책임보위지도원들은 ‘대렬 지도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밀수행위를 눈감아주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번다. 북한 말로 ‘밀수 보장’ 행위가 그것이다. 지역에 따라 밀수하는 품목이 다르다. 평안북도 신도군, 신의주시, 의주군, 삭주군, 수풍노동자구 등에서는 동을 비롯한 금속과 잣 밀수를 기본으로 하고 양강도 혜산시 등에서는 동, 늄, 파철, 약초 등 금속을 주로 밀수한다. 평안북도 의주군 통운정 지역은 골동품 밀수를 전문으로 하고 평안북도 창성군, 벽동군, 자강도 우시군, 초산군 국경경비대는 나무, 송이버섯, 잣, 골동품 밀수로 돈을 번다. 함경북도 국경 연선에서는 대부분 탈북 지원과 마약(필로폰) 밀수로 돈을 번다.

    3배 넘는 차익 생기는 마약 유통

    탈북 지원도 중대 책임보위지도원들이 제일 많이 한다. 한국에서는 ‘탈북 지원’이라고 하지만 북한법이 정한 용어는 ‘인신매매’ ‘도강 길안내’다. 인신매매와 도강 길안내는 종잇장 한 장 차이다. 사람을 넘겨주고 직접 돈을 받으면 ‘인신매매’, 사람을 넘겨주기는 했으나 돈을 직접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받았으면 ‘도강 길안내’다. 국경경비대에서는 ‘문을 열어준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탈북브로커는 국경경비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을 끼고 탈북을 지원한다. 탈북을 지원했다가 붙잡혀 감옥에 가더라도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을 끼고 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감옥에 다녀와서도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법망에 걸려들어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을 불면 다시 그 일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일을 자기가 안고 간다. 

    마약 밀수도 대체로 중대 책임보위지도원들이 많이 한다. 마약을 제조하거나 유통하면 총살까지 한다. 그럼에도 마약 밀수에 한 번 맛 들이면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북한에서 필로폰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40년경 일제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원자탄 연구에 동원된 노동자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을 때 장성택이 ‘당 자금’을 마련한다는 미명하에 평양시 상원군 금당노동자구에 만든 ‘제약공장’에서 필로폰을 생산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민족에 털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장성택 같은 인간이 어떻게 북한 최고위층에 있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마약을 밀수하면서 돈맛을 들인 밀수꾼들은 함흥과 평성 등지에서 개별적 기술자들을 고용해 필로폰을 만들어 국경경비대 보위지도원들을 끼고 중국으로 밀수한다. 마약 유통은 한 번에 3배 넘는 차익이 생긴다. 함흥에서 개인들이 생산한 필로폰을 ㎏당 중국 인민폐로 3만 위안, 미국 달러로 4500달러 정도에 사가지고 국경 연선에 와서 중국인들에게 1만5000달러 정도에 넘긴다. 북한 안에서만 움직여도 3배 넘게 이익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맛 들이면 손떼기가 쉽지 않다. 

    북한에서는 국경 연선으로 들어가는 열차와 자동차를 100% 검열한다. 그러나 마약 업자들은 단속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찔러주고 필로폰을 들여온다.

    뒤를 봐주는 대가, 연선비

    나는 국경경비대에 근무했고 제대 후에도 국경 연선에서 국경경비대 보위지도원들을 끼고 탈북 지원도 하고 송금 브로커도 했다. 골동품 밀수로도 돈을 벌었다. 일반 사람들은 골동품에는 손을 대도 마약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마약에 손대는 자들은 하나같이 국경경비대 중대 책임보위지도원들이었다. 여단 대렬보위지도원이라는 자도 마약을 팔아달라고 중대 책임보위지도원에게 부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약 밀수는 밤에 강을 건너가 마약을 건네고 돈을 받기도 하지만 강을 건너가지 않고 비닐로 포장해 강기슭에서 줄에 매달아 던지는 방법으로도 이뤄진다. 국경 연선에서 밀수하는 방법을 보면 웃길 때가 많다. 자동차로 물품을 받을 때는 자동차를 청소하는 척하면서 강에 끌고 나가 세워두고 강 위쪽에서 농촌에서 파종할 때 사용하는 비닐 같은 것을 풀어가지고 첫 끝을 매고 그 안에 각종 물품을 담아서 강에 떠내려 보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강으로 비닐이 떠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두만강은 강 너비가 좁고 물살이 세고 굴곡이 많기에 비닐 주머니가 쉽게 상대측 기슭에 당도한다. 물건을 넣은 비닐 주머니가 기슭에 도착하면 비닐 주머니 끝을 풀고 물건을 하나 씩 꺼내서 차에 싣고 사라진다. 그때도 국경경비대가 뒤를 봐준다. 

    국경경비대가 뒤를 봐주는 비용을 ‘연선비’라고 하는데 국경 연선에서 머무는 시간과 넘겨오거나 넘겨가야 할 물품의 종류와 수량에 따라서 다르게 정한다. 

    2013년 중반까지는 북한 주민 한 명을 탈북시켜주면 한국 돈으로 30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2013년 후반부터는 1200만 원으로 올랐다. 그러다 현재는 140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군 복무를 성실히 하다가 제대 말년에 북한 주민 한두 명만 탈북시켜주면 제대 준비가 끝난다. 가족을 탈북시켜주면 그 대가는 더 크다. 그러나 가족을 탈북시켜주다가 걸려들면 엄벌을 피하기 힘들기에 웬만한 담이 없이는 가족 탈북 지원에는 손대지 못한다. 탈북 대열에 아이들이 속해 있는 경우 처벌은 더욱 심하다. 가족이 동시에 탈북하는 것은 힘들기에 개별적으로 탈북해 나와 돈을 번 후 한국으로 가족을 데려온다. 가족이 함께 탈북해 온 사람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이다.

    가족 탈북이 어려운 까닭

    가족 탈북을 하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실례를 말하겠다. 함경북도 무산군 소년회관에 바이올린 교원을 하는 ‘피바다 가극단’ 출신 바이올린 연주가가 있었다. 나와도 무척 가까운 사람이어서 내 사촌동생도 그 사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어느 날 한국에 와 있는 그 친구의 누이동생이 오빠네 가족과 자기 엄마를 탈북시켰다. 그런데 한국으로 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잡혀 북송돼 부인만 제외하고 가족 모두 한국에서 정치범 수용소라고 표현하는 곳에 갔다. 부인은 북한군 장령(한국의 장성)의 외손녀였는데 정치범 수용소에 가지 않았다. 

    정치범 수용소에 보낼 때는 당, 인민보안기관과 사법 검찰기관 일꾼들이 모두 나와 비공개 재판을 하고 부인에게 이혼 여부를 묻는다. 부인이 이혼하겠다고 하면 그자리에서 이혼시켜주고 부인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지 않는다. 자식들과 헤어지지 않고자 이혼하지 않고 정치범 수용소에 가는 경우도 많다. 

    어느 겨울날 눈보라 치는 새벽에 그 부인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부인은 이렇게 가슴 아플 바엔 같이 따라갈 걸 그랬다면서 울었다.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간 남편과 자식을 그리면서 우는 부인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면서 보위부에서 집에 있던 사진 모두를 가져가버려 남편 사진이 없는데 있으면 달라고 해서 집에서 찾아주었다. 그분은 지금도 그 사진을 가슴에 품고 그리움에 애가 타서 한밤을 지새우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가족 탈북은 엄중히 다루기 때문에 결심하기 어렵다. 

    일부 사람들은 탈북자들을 보고 혼자 살자고 도망쳐 나온 나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경 연선의 경계근무 상태를 보더라도 가족 모두를 데리고 나오기는 힘들다. 그래서 한국이나 제3국에 가서 자리 잡고 다시 연락할 때까지 살아만 있기를 바라면서 울면서 떠나오는 것이다. 탈북민 모두 그런 아픔을 가슴에 앉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번쩍이는 군화 신은 軍人

    지난해 7월 26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압록강 너머 신의주 외곽에서 한 북한 국경경비대원이 중국인 관광객과 취재기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변영욱 동아일보 기자]

    지난해 7월 26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압록강 너머 신의주 외곽에서 한 북한 국경경비대원이 중국인 관광객과 취재기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변영욱 동아일보 기자]

    북한에서 동, 니켈 등은 전략물자로 통제품이기에 함부로 운반하다가 단속초소들에 걸려들면 모두 회수당하고 법적처벌을 받는다. 그럼에도 밀수꾼들이 제일 선호하는 밀수 품목 중 하나다. 

    동 밀수를 계획했을 때는 평성이나 순천, 함흥, 덕천, 희천 같은 공업지구에 동을 살 대금을 내보낸다. 그리고 동이 계획한 양만큼 마련되면 트럭 적재함에 동을 깔고 그 위를 석탄으로 덮어 단속초소들을 통과한다. 그렇게 동을 운반해 석탄은 국경경비대 초소에 주고 동만 밀수한 후 이익금의 50%를 국경경비대에 준다.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밀수꾼과 밀수꾼이 아닌 사람을 쉽게 가려볼 수 있다. 고지식하게 군 복무를 하는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군복차림이 위에서 내주는 그대로인 반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번쩍이는 군화를 신고 직접 제작한 군복을 입고 다니는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틀림없이 밀수꾼들이다. 

    국경경비대 31여단 직속에는 ‘무역소대’라는 것이 있다. 무역소대는 신의주항에 드나드는 모든 인원과 배의 출입을 검열하는데 국경경비대에서 노른자위 중 하나다. 1초소부터 4초소까지 있는데 여단에서 물자를 공급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유일한 소대다. 무역소대는 대원들까지 모두 ‘고양이(그라벤) 담배’(북한에서 생산한 담배 중 고급으로 분류된다)를 피운다. 

    신의주항에 드나드는 배들은 거의 모두 조개나 참게 등을 잡아 중국에 팔아서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조개나 참게만 가지고는 외화벌이를 계획할 수 없다. 그래서 출항할 때 동과 니켈 등 통제품을 가지고 나가 밀수를 한다. 그런 배들을 단속하는 일을 무역소대가 한다. 

    선주들이 출항할 때 통제품을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무역소대 검열원들은 알고 있으나 선주들이 돈을 찔러주고 ‘숙제’를 해가지고 오기에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한다. 선주들은 출항할 때 국경경비대와 보위부에서 숙제를 받아가지고 나간다. 숙제는 출항에서 돌아올 때 갖고 들어와야 하는 물자들을 말한다. 그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출항 등에 지장을 받기에 꼭 해가지고 들어온다. 

    국경경비대 31여단 직속에는 ‘52경비정대’라는 명칭의 부대가 있다. 김일성이 타던 고속정을 31여단에 선물로 줬는데 그 고속정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대다. 52경비정대의 임무는 압록강 하구에서 일어나는 국경 질서 위반 행위를 단속하는 것이다. 

    압록강의 밀수꾼들은 ‘셔먼호’라고 일컫는다. 1866년 대동강에서 불타버린 미국의 셔먼호가 북한에서는 해적선에 비유된다. 52경비정대의 경비정들이 느린 속도로 순찰하다가 밀수 현장을 발견하면 빠른 속도로 배를 몰아 급습하고 물품을 빼앗는다. 압록강 하구의 북한과 중국 밀수꾼들에게 52경비정대는 천적이다. 

    중국 밀수꾼들은 52경비정대에 체포되면 배에 실은 밀수품을 모두 빼앗기고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강이나 바다에서 52경비정대 경비정을 만나면 그들의 요구를 거의 들어준다. 밀수를 하다가 잡혔을 때 봐달라는 의미에서다. 

    52경비정대 군인들은 단속한 물품을 팔아먹기도 한다. 영치품 목록을 작성하고 중국 밀수꾼의 서명을 받는데 밀수꾼은 영치품의 수량을 경비정대에서 원하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걸 제대로 말한다고 해서 돌려주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밀수로 벌어 먹고살아야 하기에 바다나 강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 52경비정대와는 사이가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질서와 규율 지키려는 사람도 있어

    지금은 국경을 넘으면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극소수이지만 고난의 행군 때만 해도 대부분의 탈북민이 중국에서 먹을 것을 얻어 가지고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당시 당 중앙위원회에서 하달된 방침에는 비법월경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품에 대해 현금은 중국 돈 5000위안까지, 옷가지는 집안 식구 수에 한해 두 벌씩 본인에게 돌려주고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식료품은 통과시켜주게 돼 있었다. 

    그런데 국경 연선에서 국경경비대에 체포된 사람들은 당 중앙위원회의 그와 같은 지시를 몰랐으며 말도 못 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국경경비대에 잡히면 남녀 불문하고 자궁과 항문 검사까지 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가 검사하지 못하니 국경경비대 군관 아내들에게 검사하게 했는데 그 잔인함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국경경비대 군관들에게 시집온 여자들은 돈을 바라고 결혼한 경우가 많다. 

    국경경비대 군인들은 제대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쓸 돈도 군 복무 시절 마련한다. 2010년까지는 1만 달러 벌기 운동을 했다. 아마 지금은 더 올랐을 것이다. 한국에서 1만 달러는 큰돈이 아니겠으나 북한에서는 대단히 큰돈이다. 100달러면 100㎏ 돼지 한 마리를 사고 남는다. 1동 2세대 단층 주택을 2000달러가량에 살 수 있으니 1만 달러면 상당히 많은 돈이다. 

    이렇듯 부패한 군인들만 보고 국경경비대 전체가 썩었다고 여기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어느 집단이나 부패한 자들이 있으면 그 집단의 질서와 규율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북한에서도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나의 이 글이 북·중 국경에서 벌어지는 일과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강철 씨는…

    강건종합군관학교 출신 北 장교 
    탈북 지원·송금 브로커로 활동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홍강철 씨는 1973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등물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92년 9월 북한군에 입대해 7년간 사병으로 복무한 후 강건종합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강건종합군관학교는 초급 보병지휘관을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으로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와 기능이 유사하다. 

    1998년 소위로 임관한 후 북한과 중국 국경에서 국경경비대원으로 근무했다. 국경경비대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 밀수와 밀수 보장(밀수 행위를 눈감아 주고 돈을 받는 것)에도 발을 담갔다. 

    2003년 상위(국군의 중위, 대위 중간 계급)로 전역한 후 2013년까지 북·중 국경에서 무역업, 탈북 지원(탈북을 돕고 돈을 받는 행위), 송금 브로커(탈북민이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것을 중계하는 일)로 활동했으며 골동품 밀수에도 손을 댔다. 한국 정보기관과 연계된 탈북민 단체에 북한 정보를 넘기는 ‘정보 장사’도 했다. 

    그는 2013년 8월 탈북해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체포돼 2014년 3월 간첩 혐의로 기소됐으나 1·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2016년 2월 19일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가톨릭 신부들의 지원으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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