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마신 신비한 약
아버지의 산행은 주로 퇴근 후인 토요일 오후와 예배가 끝난 일요일 오후에 이루어졌다. 7형제 중 몇몇 언니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바로 위 오빠와 언니는 광주에서 중·고교를 다닐 때, 난 초등학생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아버지가 산에 가잘까 봐 집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7형제를 공부시키느라 분주했던 엄마의 삶에는 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주말에 주로 집에 남은 건 나뿐이었던가. 혼자서 산행할 아버지가 왠지 쓸쓸해 보여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주말마다 무등산을 올랐다.아버지의 산행 준비는 “약 챙기거라”는 한 마디로 시작했다. 이 말은 곧 나에게 산에 갈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교회 장로이던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를 해마다 담가 항아리에 넣고 지하실에서 숙성시켰다. 포도와 설탕만 섞었기에 절대 술이 아니다, 그래서 음주가 금지된 교회에서 포도주로 성찬식을 하는 거 아니냐며, 엄마는 성스러운 음료 다루듯 그렇게 포도주를 만들곤 했다.
숙성된 포도를 삼베 천에 담아 손으로 일일이 짤 때는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린 나에게도 삼베 천을 쥐여줬다. 마루에 앉아 짜고 남은 포도 찌꺼기가 아까워 짜는 내내 오물거리며 씨를 퉤퉤 뱉다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고추잠자리처럼 뱅뱅 돌며 붉어지다 급기야 캄캄해지곤 했다. 우리 집에서 포도주는 절대 술이 아니었던 거다. 신령한 약이었다. 아버지와 등산할 때마다 나는 그런 약을 수통에 담아 배낭에 챙겼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땐 때론 그 약은 인삼주가 되고 때론 엄마가 만들어놓은 또 다른 알 수 없는 신비한 음료가 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아버지와 등산할 때면 늘 약을 준비했다는 거다. 산에 올라 아버지와 어린 딸은 그 약을 즐거이 마셨다. 추울 때일수록 효과는 컸다. 그래서일까, 시옷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말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단어가 술이 되어버린 건. 나에게 술은 여전히 신성한 음료일 뿐이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방학만 하면 무슨 거사를 준비하듯 긴 산행을 계획했다. 아버지의 보물 상자는 다름 아닌 다락방. 다락방은 흡사 등산용품점을 방불케 할 만큼 등산 도구로 꽉 찼다. 나침반만 해도 기기묘묘한 모양의 것이 수도 없이 많았고, 크기와 기능이 다른 코펠과 버너도 여럿 있었다. 그 당시 서울 을지로에 있던 K2 수제 등산화점에서 주문 제작한 가죽 등산화도 철 따라 몇 켤레씩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와 바로 위 오빠, 언니 등산화까지 합하면 내 눈엔 등산화 가게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는 다른 곳에는 돈을 쓰지 않았지만 등산용품에 대해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언니 오빠와 나는 겨울 등반 때면 겨울용 두툼한 반(半) 스타킹을 두 벌 정도 껴 신고 달타냥이 칼싸움할 때나 입었을 법한 단추 달린 두꺼운 칠부 바지를 입고 등산하곤 했다. 지금도 구하기 어려운 그런 등산복들을 그 옛날 아버지가 어디서 구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의 보물 상자
엄마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속이 상할 때면 난 소리 없이 아버지의 보물 상자인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서글픈 마음에도 아버지의 등산용품들은 신기하기만 해서 하나씩 만져보노라면 어느새 엄마에 대한 섭섭함이나 서러움이 사라졌다. 구석에서 이름도 쓰임새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의 등산용품이라도 발견할라치면 기쁨 섞인 놀라움을 안고 다락방을 내려오곤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 밥 줘”하며 평온을 되찾곤 했던 내 어린 시절 일탈의 공간, 다락방.아버지는 산행 준비를 할 때면 다락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다. 4박 5일 정도의 방학 산행에는 바로 위 오빠와 언니도 자주 동행했다. 배낭에 챙겨야 할 짐을 배분하는 일도 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배낭 무게는 막내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만만찮게 무거웠다. 나의 가벼운 항의에 아버지는 “네 짐은 점점 가벼워질 것이니라”고 했다. 4박 5일 동안 먹을 음식 재료와 도구로 꽉 찬 언니 오빠의 배낭과는 달리, 내 배낭엔 쌀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배낭은 점점 가벼워졌지만 산행은 갈수록 힘들었다.
방학 산행은 편안하고 다정한 무등산을 떠나 전국의 명산 순례로 이어졌다. 겨울 설악산에서 아이젠을 하고도 위험한 벼랑길을 지나갈 때면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아버지가 앞장섰다. 바로 뒤에 내가, 내 뒤에 언니와 오빠가 뒤따랐다. 아버지는 아무리 위험한 빙판길이 나와도 앞서갈 뿐 “이곳, 조심해라”는 한 마디 외엔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뎌야 할 내 발걸음은 내가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처녀 적까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낯선 산과 친해져 갔다.
이제는 해마다 혼자서 무등산을 오른다. 무등산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다정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훨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져서이리라. 여명을 뚫고 아버지와 함께 무등산 천왕봉(지금은 등산 통제 구간이지만)을 오른 어느 해이던가, 떠오르는 새해 첫 태양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똑같은 해이련만 유난히 붉구나. 어느 때보다 모두의 염원이 뜨거워서겠지. 해는 저절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어둠이라는 두꺼운 알을 뚫고 부화하는 듯하구나.” 식민지 시대와 독재 정권, 그리고 그 끔찍한 광주항쟁 중에도 끝까지 교육 민주화를 관철해나간 아버지의 눈에 태양은 그리 보였나 보다.
증심사에서 출발해 중머리재와 장불재를 거쳐 서석대에 오른다. 물결처럼 겹겹이 이어지는 산 능선을 잠시 바라보다 중봉으로 돌아 동화사터 길로 접어든다. 아버지와 즐겨 찾던 코스다. 동화사터 길로 접어들면 인적도 없고 고즈넉하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주나무 한 그루를 만나면 무심히 안아본다. 차가운 몸과 마음이 따스해진다. 무등산에는 아버지가 있다. 설악산에도 백운산에도 지리산에도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 뒤를 따르는 내가 있다. 산은 내게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강맑실
● 1956년 광주 출생
● 사계절출판사 대표
● 한국출판인회의 산악회 전 회장
● 한국출판인회의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