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후금과 모두 잘 지내려다 파국으로 내몰린 조선
끼인 자는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어
한국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종속변수인가, 독립변수인가
위민·보국 차원에서 최명길의 길이 마지노선
인조처럼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 우선시해선 안 돼
한명기 교수. [조영철 기자]
어떻게 해야 할까. 병자호란 무렵처럼 국제 질서의 판이 바뀌던 시기, 우리 선조들이 보인 대응의 실상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강대국들의 파워 게임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려면 나아가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성찰하기 위해서 말이다.
병자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서서히 진행되는 ‘현재’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 시대의 비망록이다.”
한명기(56)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으며 역사를 서술하면서 국제정치학도 원용한다.
‘항왜원조’ ‘항미원조’… 中의 한반도 인식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인조반정부터 삼전도의 굴욕까지 숨 가쁘게 묘파한다. [조영철 기자]
그는 ‘역사평설 병자호란’ 말미에 붙인 글에 이렇게 썼다.
“병자호란의 전철을 돌아볼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끼인 자’인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 모두와 관계를 잘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강대국들끼리의 관계가 계속 적대적이면 ‘끼인 자’는 결국 선택의 기로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황제의 나라’ 명, ‘형의 나라’ 후금과의 관계를 ‘모두’ 우호적으로 유지하려다가 끝내는 파국으로 내몰린 전철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2017년 12월 26일 서울 광화문 미래전략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사전적 의미의 중국통(中國通)은 아니지만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21세기 한중관계와 세력 전이 시기 한국 외교 정책이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하는지 들여다보는 게 대담의 취지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전쟁 역사에 천착하면서 ‘역사평설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정묘·병자호란과 한중관계’ ‘광해군’ 등의 역작을 내놓았습니다. 한국사를 동아시아의 틀에서 탐구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조선시대 역사 중 정치사를 전공했습니다. 석사 논문에서 광해군을 다뤘고요. 광해군이 왜 쫓겨났는지 들여다봤는데 핵심 이유 중 하나가 외교였습니다. 광해군 집권 시기 외교는 조선이 명나라와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광해군 때부터 정묘·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외교 사안은 임진왜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광해군 시기의 정치를 연구하다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전쟁사로 넘어갔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상승 대국과 기존 대국이 벌인 패권 경쟁의 산물입니다.
“임진왜란에 중국이 개입한 후 조선-명 관계가 이전과 다르게 바뀝니다.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도와준 은혜)을 틀로 삼아 명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일본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로 자리매김하고요. 이 같은 인식이 조선 사회에서 뇌관 비슷하게 작동해요. 거시적으로 보면 21세기 한국인이 중국과 일본을 보는 시각에도 당시의 인식이 영향을 미칩니다.”
조선은 명이 망해가는데도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만주에서 굴기한 청에 국토를 유린당하고 항복하는 치욕을 맞았다.
임진왜란의 연장선상에서 병자호란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임진왜란’이란 명칭을 두고도 논박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왜구들이 와서 피운 난동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을 향한 적개심과 원한이 담긴 표현이죠. ‘임진전쟁’ ‘동아시아 3국 전쟁’ ‘7년 전쟁’ 등으로 명칭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반발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침략 전쟁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되는 거죠.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문록, 경장의 역)라고 일컫습니다. ‘분로쿠’는 1592~1595년, ‘게이초’는 1596~1614년 일왕이 사용한 연호예요. ‘문록, 경장 시기의 전쟁’이라는 중립적인 뜻을 갖지만 1910년 이후 등장한 표현입니다.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로 규정했습니다.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후 자국의 땅을 정벌했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아 ‘문록, 경장의 역’으로 바꾼 거죠.
중국은 임진왜란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합니다. 6·25전쟁은 ‘항미원조(抗美援朝)’라 하고요. 중국 시각에서는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 6·25, 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 임진왜란인 거죠. 시차가 358년 벌어지는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건 한반도를 부속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항왜원조라는 명칭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그대로인데 한국만 ‘7년 전쟁’ ‘임진전쟁’ 등으로 명칭을 바꾸면 모양이 우스워집니다. 임진왜란의 명칭과 관련된 문제는 역사 교육 보편성 차원에서 한·중·일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사안입니다.”
병자호란은 G2 시대의 비망록”
한명기 명지대 교수(왼쪽)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규장각 특별연구원,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오른쪽은 이문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조영철 기자]
“왜군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한국에 일본은 원한과 적개심의 원천입니다. ‘문록, 경장의 역’이라는 표현을 쓰기 전까지 일본은 조선이 잘못해 손봐줬다고 여긴 거고요. 중국은 오랑캐 싸움에 개입해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시혜자의 인식을 가졌습니다.”
영화 ‘남한산성’ 덕분에 병자호란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습니다. ‘역사평설 병자호란’ 서문에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썼더군요.
“국제정치학자들은 ‘G2’라는 표현이 타당한지 논쟁을 벌이더군요. G2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므로 일반화해 사용한 것입니다. 한반도는 숙명적으로 강대국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기존의 패권국이 천년만년 패권을 유지하면서 군림하면 안보 위기가 생기지 않겠죠. 한반도에서 사달이 일어난 것은 패권국이 후퇴 조짐을 보이거나 신흥 강국이 떠올라 양자가 갈등하거나 대립할 때였습니다. 극명한 사례가 병자호란이고요. 사드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선택의 기로로 우리가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미국, 중국 간 갈등 혹은 대립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병자호란과 현대 중국의 굴기는 350년 넘는 시간차가 있으나 한반도가 처한 조건은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역사를 세세하게 들여다봄으로써 현실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 답은 아닐지라도 방향성을 생각해보고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어요.”
병자호란이 ‘서서히 다가오는 현재’가 돼서는 안 되겠지요.
“병자호란이 ‘오래된 미래’가 돼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년인 2049년을 콕 집어 초강대국을 실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드 문제로도 난리인데 2040년경 한반도 주변이 어떤 상황일지 생각해보면 머리가 아플 수밖에요.”
정묘호란은 1627년, 병자호란은 1636년 발발했습니다. 정묘와 병자 사이 10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가 집권한 후 진보 정권을 향해 ‘잃어버린 10년’, 진보가 집권하자 보수를 향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더군요. 정묘와 병자 사이 10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잃어버린 10년’이었습니다. 강대국의 패권 교체가 거의 확실해지는 와중에도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선택의 기로에 몰려 전쟁을 맞았습니다.”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 중요시한 인조 정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군사력을 키워 자강(自强)하던가 예방외교에 나섰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조선이 가진 원초적 문명의식으로는 오랑캐인 만주와 명을 결코 같은 레벨에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는 은혜를 입었다는 인식까지 덧붙여집니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 명을 배신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집권했기에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았고요. 정묘호란 때 후금과 화약을 맺으면서 너희를 형으로 삼겠으나 명과의 군신 관계는 유지하는 것으로 절충합니다. 이 대목까지는 인조 정권의 외교를 수용할 수 있으나 후금이 커가는 속도나 추세를 볼 때 선택의 기로가 올 게 분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방비와 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인조반정(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이 공약이나 표방과는 다르게 등 따듯하고 배부르니 ‘헝그리 정신’을 잃어버린 겁니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민생을 망치고 외교를 잘못했기에 반대로 가겠다고 했는데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어떻게 하면 정권을 유지할지에만 매달립니다.”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중요시했다?
“그렇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1621년부터 요동 수복을 표방하면서 명군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평안도 가도(假島)와 철산 일대에 주둔하던 모문룡은 돈키호테 같은 인물입니다. 모문룡이 이괄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공주로 파천했는데 흥안군이 모문룡의 도움을 받아 왕으로 인정받으면 반정 세력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란군이 자멸한 후 인조는 또 다른 쿠데타를 우려해 무장들을 기찰하는 데 혈안이 됩니다. 정권 안보에만 ‘올인’하다 보니 국가 안보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모문룡 휘하 명군을 ‘모병’이라고 칭했는데 오늘날의 감각으로 표현하면 ‘주한명군’이다. 평안북도의 일개 섬을 거점으로 해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막강한 후금과 싸워 요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나 명은 가도를 중시했다. 후금을 견제하고 조선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인조 정권은 과거 정권을 뒤엎는 ‘파괴’에는 성공했으되 집권 이후 새로운 차원으로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다.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급급하다가 국가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이다. 새 정권에 기대를 건 이들의 실망은 컸다. ‘당신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라는 냉소가 번졌다.병자호란은 외침이지만 내정의 난맥과도 연결됩니다. 정파 간 정쟁과 이념 갈등 탓에 전쟁을 예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외부에서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내적으로 분열하곤 했을까요. 외부에서 오는 위기를 파당적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도 잦았고요. 대한민국의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 것을 광해군을 몰아내는 명분으로 사용했습니다. 광해군 집권 시기인 1619년 조선은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강홍립이 지휘하는 부대를 파병합니다. 후금과의 전투에서 명-조선 연합군이 패전한 이유가 명군에 있는데도 서인과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 강홍립과 짜고 기밀을 후금에 넘겨줘 패배했다는 담론을 만들어내요. 팩트에 입각한 담론이 아니라 광해군 정권이 미우니 광해군 탓에 후금이 만주를 차지했다는 서사를 지어낸 거죠. 이렇듯 파당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프레임을 만들고 그것을 틀로 삼아 국제 정세를 들여다보니 명과 후금의 전력 격차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밖에요.”
기존 대국과 상승 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조선은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명과의 군신 관계를 유지한 채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습니다. 현재 미국과 동맹 관계, 중국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인 것처럼 이단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명, 후금과 동시에 잘 지내는 게 조선이 추구할 외교정책이겠으나 약소국이 복수의 강대국과 공히 잘 지내려고 해도 ‘꽝’이 되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강대국끼리 대결하거나 전쟁을 벌이면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어요. 병자호란 발발 3년 전 후금이 조선에 함정을 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후금이 만주를 석권했으나 베이징(北京)으로 가려면 산해관을 넘어야 하는데 공격해도 무너지지 않는 겁니다. 조선은 배를 빌려달라는 요구를 거절합니다. 수군이 없는 후금이 함정을 가지면 3국 간 군사 균형이 깨진다는 것을 조선이 잘 알았습니다.”
自强 시도도 못 해보고 당해
정묘호란 5년 뒤인 1632년까지 인조 정권의 대외정책은 일견 절묘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배려했으나 불행하게도 조선은 3국 관계에서 ‘독립변수’가 아닌 ‘종속변수’였다. 미국과 중국의 서태평양 패권 다툼에서 한국은 종속변수인가, 독립변수인가. 미국이 주한미군 기지에 사드를 배치한 것을 두고 중국은 자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한미동맹, 미일동맹으로 이뤄진 한·미·일 공조와 부상하는 중국 사이에서 어떤 외교를 해야 하나. 수군을 빌려달라는 후금의 요청을 거절한 조선에 또 한번 선택의 순간이 온다.“공유덕과 경중명이 산둥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군과 함정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명나라가 깜짝 놀라 조선에 SOS를 칩니다. 명군과 조선군이 반란군을 함께 공격하자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고는 실제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어야 하는데 병력을 동원해 공유덕, 경중명을 쫓으면서 후금군과 전투까지 벌입니다. 정묘호란 때 맺은 후금과의 화약은 이로써 끝장납니다. 후금이 공유덕, 경중명을 통해 수군과 함정을 보유함으로써 3국의 군사 균형이 무너집니다. 후금은 산해관을 거치지 않고 바다를 이용해 중원을 공격할 수 있게 됐습니다. 후금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도 더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고요. 후금이 해군과 함정을 가졌는데도 조선은 대비하지 않습니다.”
인조 정권이 그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고도 하겠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 다시 말해 불가항력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조 정권은 균형 외교를 수행하지도, 자주국방에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자주국방 역량이 있었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자강(自强)의 시도라도 해보고 당했다면 후회가 덜할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시기는 내정과 외교·안보의 상관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때인 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특히 논쟁적 인물입니다.
“2000년 ‘광해군’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부제를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고 달았는데요. 최근 들어 ‘광해군이 잘난 게 뭐가 있느냐’는 비판을 많이 듣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광해군이 훌륭한 임금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평가하겠습니다.
광해군이 외교 능력을 키운 것은 임진왜란 때입니다.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을 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를 돌아다닙니다. 조선시대 왕 대부분이 궁궐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광해군만큼 궁궐 밖 경험을 해본 왕이 없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익힌 외교 감각, 명나라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체득한 국제 의식을 바탕으로 1608~1623년 집권하면서 내놓은 발언을 보면 중국과 만주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명의 원병 요청도 회피하려고 애썼으나 강홍립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강홍립 부대의 병력이 1만3000명인데 그중 5000명이 조총수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수를 열심히 양성한 것이지요. 명나라 장수들이 조총수가 탐나 경쟁적으로 조선군을 휘하에 두려고 합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패하지 않는 전투를 하라’는 지침을 줘요. 상황을 봐서 적당하게 결정하라는 얘기일 수 있죠. 이 대목까지는 광해군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충국가의 숙명
그 대목 이후는요.“서인 그룹이 강홍립 부대가 기밀을 누설해 명군이 패배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자신이 반대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에 자부심 비슷한 것을 갖습니다. ‘거 봐라, 내 말대로 되지 않느냐’면서 신하들과의 소통을 거부합니다. 경희궁, 인경궁을 지은 사람이 광해군이에요. 첩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를 궁궐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광해군의 몰락은 어떻게 보면 토목공사에 올인한 것에서 비롯했습니다. 명과 후금에 끼인 조선의 생존을 위해 그 나름대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으나 반대 의견을 배척하고 독주하면서 토목공사에 열중하다가 재정을 망칩니다. 재정을 메우는 손쉬운 방법이 농민 대상 증세죠. 이런 와중에 반정이 일어나 인조에게 정권이 넘어갑니다. 광해군과 인조는 둘 다 실패한 군주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광해군은 외교 정책에서 뭔가 해보려는 단계까지는 간 반면 인조는 그것도 못 해본 채 화살 한번 못 쏴보고 남한산성으로 도망쳤고요.”
내정의 실패와 분열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로 귀결됐습니다.
“현재의 한국도 똑같아요.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는 내정에 실패하면 외교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진영 논리로 나뉘어 다투는 한국과 광해군, 인조 시기의 조선이 겹쳐 보입니다.
“팩트와 논리를 갖고 다투는 건 괜찮은데 외교 문제를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해 싸우는 게 문제죠.”
임진왜란은 중국이라는 대륙 세력에 일본이라는 해양 세력이 도전하면서 발발했고 병자호란은 북방 유목민 세력이 남방의 정통 중화 세력에 도전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청일전쟁, 6·25전쟁도 지정학적 갈등이 폭발한 것이고요.
“한반도는 완충국가(Buffer State) 구실을 해왔습니다. 몽골이 팽창할 때 고려가 일본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명의 임진왜란 개입과 마오쩌둥(毛澤東)의 6·25전쟁 참전도 완충지역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고요”
최명길, 김상헌의 길
남한산성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 있었다. 이병헌(위), 김윤석이 각각 최명길, 김상헌 역을 맡은 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을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학교교육의 핵심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는 겁니다. 병자호란 때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백성입니다.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청나라로 끌려갑니다. 치욕적 전쟁이라고 가르치면서 백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잘 안 합니다. 병자호란을 이해하는 틀을 바꿔야 해요. 김상헌, 최명길을 평가할 때도 누가 더 백성을 위했느냐가 기준이 돼야 합니다. 최명길은 청군이 무악재에 도달했을 때 적진에 가 담판을 벌이면서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갈 시간을 벌어줍니다. 청으로 끌려간 피로인(被擄人)을 구휼하는 일에도 앞장섰고요.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신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를 어떻게 섬기느냐면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어나가도 장렬하게 옥쇄하자고 주장합니다. 최명길은 나라가 살고 백성이 살아야 그다음이 있다고 여깁니다. 최명길은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자는 게 진심이라면 압록강으로 나아가 싸우자고 주장합니다.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면 엄청난 피해가 생긴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위민(爲民)과 보국(保國) 차원에서 최명길의 노선이 우리가 택할 마지노선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오늘날 한중관계는 경제, 안보 등 물질적 국가이익 요인에 의해 작동되는 것 같지만 심연에는 역사 인식이라는 관념적 요인도 영향을 미칩니다. 역사에서 비롯한 관념적 전통이 중국인의 대(對)한국 인식에도 영향을 준다고 봅니까.
“명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고구려가 남긴 여파가 있었습니다. 최부가 1488년 뜻밖의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절강성 영파부 해안에 표착해 고난을 겪은 뒤 베이징, 요동을 거쳐 돌아와 ‘표해록(漂海錄)’을 남깁니다. 15세기 후반 중국 강남 지식인들과 최부가 필담한 내용이 담겼는데 중국 지방관료가 최부에게 당신네 나라는 무슨 장기가 있어 수, 당의 대군을 물리쳤느냐고 묻습니다. 그때만 해도 강남 지식인들이 고구려에 트라우마를 가졌던 것입니다. 최부의 답변이 걸작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통일 국가가 됐기에 지금은 더욱 강하다고 답합니다.
16세기 조선에서 성리학 명분론이 경직화되고 임진왜란 때 은혜를 베풀었다는 한족의 우월감이 겹치면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은 잘 구슬리면 쉽게 길들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가졌을 개연성이 큽니다. 시진핑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는 중국 역사의 일부였다’고 말했다고 해 논란이 인 적이 있습니다. 중화주의자들에게는 잘만 길들이면 한국은 아래에 둘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굉장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인들은 한국을 중국보다 낮은 국가로 보려는 인식이 강한 반면 한국인들은 또 다른 착각 내지 고정관념을 가졌습니다. 일본은 상당히 못된 국가라고 보면서 중국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줬고 독립군 기지도 제공했기에 상대적으로 선의를 가진 나라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중국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상국으로 군림하면서 오늘날을 사는 한국인까지 이 같은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면 중국인이 주변을 다루는 능력이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퇴로를 차단하는 척화파 외교”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을 두고 야권은 ‘의전 홀대’ ‘알현’ ‘구걸 외교’ ‘혼밥’ ‘조공외교’ 등 듣기 민망한 말로 공세를 퍼부었습니다.“중국이 의도적으로 홀대했다면 분노해야 합니다만 전말이나 팩트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원론적 차원에서 보면 북핵 문제 해결의 열쇠를 베이징이 쥔 상황에서 한중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여러 가지 뒷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완충국가는 외교가 곧 내정이며 내정이 곧 외교입니다. 야당 대표가 일본을 방문해 대통령을 공격하면서 ‘조공 외교’라고 주장한 것은 내부의 분열상을 외부에 드러낸 언행으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광해군, 인조 시기의 잘못이 반복돼서는 안 돼요. 견해가 다르면 서슴없이 ‘종북좌빨’ ‘보수꼴통’ 운운하면서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것도 학교교육을 통해 바꿔나가야 합니다. 중국이 2049년을 중국몽(中國夢) 실현 시기로 정해놓은 이 오묘한 상황을 버텨낼 내적 기반을 마련하려면 토론 문화가 올바르게 정착돼야 해요.”
주자학적 인식이 한국인에게 지금껏 일부 남은 것도 같습니다.
“척화파 DNA가 견고하게 남아 있다고 봐요. 노인 요양 시설이나 화장장 건설을 반대하는 슬로건을 보면 그냥 반대가 아니라 결사반대예요. 죽이고 지으라는 건데, 죽은 사람 봤습니까. 척화파 외교는 퇴로를 아예 차단해버립니다. 그건 외교가 아닌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