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신동아·주간동아 공동기획 | 이제는 ‘도시재생’ 시대! |

〈해외 현장〉 폐허 위 꽃핀 예술, 지역을 살리다

  • 입력2018-02-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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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문화, 예술, 자연…. 도시재생을 꿈꾸는 한국의 마을들은 무엇을 자신들의 고유한 자산으로 재발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미국 LA의 아트 디스트릭트와 대만 가오슝의 보얼예술특구는 ‘예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도시재생 성공 사례다. 이 두 지역은 한때 흥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옛 공업 지역에서 예술가와 주민의 자발적 노력에 힘입어 성과를 거뒀다는 공통점도 갖는다.<편집자>

    《미국 LA 아트 디스트릭트》
    다운타운 뛰어넘는 주력 상권으로 부상

    낡은 건물 벽면에 그려진 뮤럴. 뮤럴은 아트 디스트릭트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요소다. [강지남 기자]

    낡은 건물 벽면에 그려진 뮤럴. 뮤럴은 아트 디스트릭트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요소다. [강지남 기자]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2019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미래 도시’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번쩍이는 마천루 아래 황폐한 건물이 줄지어 있고 골목마다 부랑자가 넘쳐난다. 실제 이 영화가 촬영된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은 한밤에 돌아다녀선 안 되는 우범지대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이 달라지고 있다. 이른바 ‘도시 재생’의 물결을 타면서부터다. 낡은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사무실과 상업 시설로 변모해 사람들을 새롭게 불러 모은다. ‘블레이드 러너’의 주요 촬영지 중 하나인 예스러운 브래드버리 빌딩(Bradbury Building)에는 ‘커피계의 애플’로 불리는 블루보틀(Blue Bottle)이 입점해 있다. 그 바로 길 건너에는 옛 재래시장인 그랜드 센트럴 마켓(Grand Central Market)이 있는데, 힙한 맛집들이 입점하면서 LA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심야 데이트를 하는 장소로도 나왔다.

    ‘무한도전’이 뮤비 찍은 곳

    옛 제분 공장을 재생한 상업 화랑 ‘하우저 앤드 워스’의 아트 디스트릭트 갤러리. [강지남 기자]

    옛 제분 공장을 재생한 상업 화랑 ‘하우저 앤드 워스’의 아트 디스트릭트 갤러리. [강지남 기자]

    그런데 ‘부활한’ 다운타운보다 더 주목받는 지역이 있다. 아트 디스트릭트(Art District)다. 다운타운에서 동쪽으로 1.5km가량 떨어진, 리틀 도쿄(Little Tyoko)와 로스앤젤레스강 사이에 위치한 동네다. “LA의 주력 상권이 다운타운에서 아트 디스트릭트로 옮겨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요즘 이 지역은 LA의 대세로 통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트 디스트릭트는 예술적 색채가 넘치는 동네다. 아트 갤러리와 예술가의 작업실, 건축·디자인 회사, 영화 및 TV 제작사 등이 집결해 있고, 잘나가는 레스토랑과 상점 또한 즐비하다. 곳곳의 건물 벽면에는 대형 뮤럴(mural·벽화)이 그려져 있어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또한 아트 디스트릭트는 영화 및 TV 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어 연간 800회 이상 촬영이 이뤄진다고 한다. ‘무한도전’이 LA에서 지코(ZICO)와 함께 ‘히트다 히트’ 뮤직비디오를 찍은 곳도 바로 아트 디스트릭트다. 흥겹고 자유롭고 크리에이티브한 분위기. 아트 디스트릭트는 이러한 매력으로 LA 젊은이뿐만 아니라 여행자들도 끌어모은다. 

    아트 디스트릭트의 역사는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1년 프랑스인 이민자 장 루이 비뉴(Jean-Louis Vignes)가 LA의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이 동네에서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의 와인 생산지가 북부 나파밸리이지만, 184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와인 생산지는 바로 오늘날의 아트 디스트릭트였다. 



    19세기 후반, 이 지역에 미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공장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다. 업종은 의류, 제분, 고무, 인쇄, 기계 부품 등 다양했다. 화물기차에 실어 보내거나 받을 물건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가 속속 세워졌다. 이러한 공업 발전에 힘입어 1920년대 LA는 미국에서 5번째로 크고 7번째로 부자인 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속도로가 기하급수적으로 건설되면서 물류의 중심은 철도에서 육상도로로 옮겨갔다. 한편 공장은 그 규모가 날로 커지면서 LA 외곽으로 이전해 나갔다. 철도에 기반을 둔 아트 디스트릭트 일대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빈 공장과 창고가 속출했다.

    예술가들의 불법 거주가 출발점

    LA 다운타운 못지않은 ‘우범 지구’를 살린 건 예술가들이었다. 1970년대, 할리우드와 베니스비치 등의 높은 임차료를 견디다 못한 예술가들이 아트 디스트릭트의 버려진 건물로 ‘잠입’했다. 공장, 창고 등 산업용 건물(Industrial building)이라 널찍한 실내와 높은 층고는 작품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불법적인 거주였다. 냉·난방과 수도 등 거주에 필요한 기본 시설을 갖출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40도가 넘는 더위와, 겨울에는 집요한 냉기와 싸워야 했다”고, 이 시절 예술가들은 회상한다. 

    LA 시 당국이 불법 거주를 가만둘 리 없다. 만약 시가 퇴거 명령을 내렸다면 지금의 아트 디스트릭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1년 LA 시는 그 대신 ‘아트 인 레지던스(Art-In-Residence·AIR)’라는 조례를 제정함으로써 양성화 정책을 폈다. 예술가들이 버려진 공장이나 창고를 주거 및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을 합법화한 것이다. AIR 덕분에 이 지역 예술가들은 좀 더 개선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AIR은 이후 더욱 확대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AIR의 기본 취지는 버려진 건물을 재사용(reuse)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LA는 일찌감치 도시재생 정책을 편 셈이다. 지금도 아트 디스트릭트에선 20세기 초반 지어진 산업용 건물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하우저 앤드 워스(Houser & Wirth) 갤러리다. 1992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해 뉴욕, 런던 등 세계 주요 도시에 갤러리를 둔 세계적인 상업화랑 하우저 앤드 워스는 제분 공장이던 폐건물을 매입해 2016년 아트 디스트릭트 갤러리를 오픈했다. 9300㎡(약 2800평) 규모의 갤러리 내부엔 1950,60년대 공장 시절 벽체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시절 사진 자료도 게시돼 있다. 

    건물 내부엔 아주 널찍한 마당이 있고, 아무나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벤치도 마련돼 있다. 각종 허브를 심어놓고 닭도 10여 마리 키우는 정원도 있다. 여기서 난 허브와 닭고기는 갤러리 내 레스토랑인 ‘마누엘라’의 식재료로 쓰인다. 마누엘라는 쟁쟁한 레스토랑이 몰려 있는 아트 디스트릭트에서 주목받는 인기 식당인데, 오픈 주방 안으로 서너 개의 항아리가 보여 반가웠다. 오이 피클 등을 숙성시키는 데 항아리를 사용한단다. 옛 밀가루 공장이 예술 공간으로, 그리고 주민들의 쉼터로 사랑 받고 있다.

    개발 자본과의 ‘동거’ 실험 중

    옛 섬유공장을 리모델링해 예술가 레지던시로 활용 중인 ‘아트셰어’와 폐쇄된 기차 화물역을 개조해 캠퍼스로 사용하는 건축학교 '사이아크'(작은 사진). [강지남 기자]

    옛 섬유공장을 리모델링해 예술가 레지던시로 활용 중인 ‘아트셰어’와 폐쇄된 기차 화물역을 개조해 캠퍼스로 사용하는 건축학교 '사이아크'(작은 사진). [강지남 기자]

    아트 디스트릭트는 ‘행정’보다는 ‘주민’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특색 있는 커뮤니티다. 동네 한쪽에는 아주 작은 ‘조엘 블룸(Joel Bloom) 스퀘어’가 있다. 조엘 블룸은 1990년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마을 만들기’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 시로부터 ‘아트 디스트릭트’라는 명칭을 받아낸 시민이다. 그는 작가이자 배우였고, 1990년대 당시 이 동네에서 유일한 슈퍼마켓 주인이었다. 여기 주민들은 그를 ‘비공식적 시장(unofficial mayor)’이라 추억한다.

    버려진 섬유 공장을 리모델링해 예술가 레지던시이자 전시·공연장으로 활용하는 ‘아트 셰어(Art Share)’. 입구 벽면의 뮤럴에는 각종 개발 시도에 맞서 동네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한 이 지역 예술가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후배 예술가들의 오마주다. 

    2000년 폐쇄된 기차 화물역(Santa Fe Freight Depot)을 개조해 이사 온 독립 건축학교 ‘사이아크’(Southern California Institute of Architecture·SCI-Arc)도 아트 디스트릭트가 예술과 건축, 디자인에 특화된 동네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이아크가 들어온 이후 예술가, 그리고 건축 및 디자인 분야 인력 유입이 더욱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최근 아트 디스트릭트의 최대 이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워낙 상권이 활성화되다 보니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개발 자본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아트 디스트릭트 일대에는 20여 건의 크고 작은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오피스, 상가, 주거 등 시설이 새롭게 건설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아트 디스트릭트 주민들의 대응은 ‘보이콧’이 아니다. 대신 개발 방향을 커뮤니티의 정체성과 부합시키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비영리기관 LADADSpace(The Los Angeles Downtown Arts District Space)를 주축으로 주민, 자영업자, 건물주, 개발업체, 시청 공무원 등 이해관계자가 한데 모여 개발 계획을 논의한다. 이를 통해 신축 건물의 일정 비율을 예술가의 주거 및 작업 공간(Live/Work Zone)으로 할당하고, 새 빌딩에 지역 정체성에 맞는 업종을 선정해 입주시키고,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의 간판은 금지하는 등의 합의를 이뤄내고 있다. 

    아트 디스트릭트는 자발적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다. 그러나 도시재생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몰려드는 자본의 파고를 어떻게 뛰어넘으며 지역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우리가 아트 디스트릭트의 내일을 지켜봐야 할 이유다.

    《대만 가오슝 보얼예술특구》
    옛 항만 창고의 재탄생

    버려진 옛 항만 창고를 재활용한 보얼예술특구에 설치된 로봇 조형물. [최창근 객원기자]

    버려진 옛 항만 창고를 재활용한 보얼예술특구에 설치된 로봇 조형물. [최창근 객원기자]

    대만 남단 가오슝(高雄)은 개항기, 벽안(碧眼)의 이방인들이 대만에 발을 디디던 교두보였다. 1858년 ‘톈진(天津)조약’에 따라 1864년 가오슝항은 개항(開港)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淸)은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다. 일본은 일본-동남아시아-중국의 교차로에 자리한 대만의 지정학적 위치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것이 항만 시설 확충이다. 일본은 1908년 북부 지룽항과 더불어 가오슝항 현대화 공사에 착수했다. 신항만이 들어선 하마싱(哈瑪星)과 옌청(鹽埕) 일대는 활기가 넘쳤다. 1921년 2차 항만 증설 공사가 시작됐고 항구와 오늘날 시청 소재지인 링야(苓雅)를 잇는 운하도 개통됐다. 인구는 12만 명을 넘어섰다. 인구 증가에 힘입어 1924년 가오슝은 군(郡)에서 시(市)로 승격됐다. 

    1936년 대만총독부는 가오슝시 광역화 계획을 수립했다. 3차 항만 증설도 빠지지 않았다. 일본은 가오슝을 동남아 진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연장선상에서 타이베이(臺北)의 대만총독부 청사를 가오슝으로 이전하는 계획도 세웠다. 계획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미완으로 끝났다. 다만 그 시절 확충한 기간 시설은 도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가오슝의 번영은 지속됐다. 지룽과 더불어 ‘수출대만’ 시대 ‘메이드 인 타이완’ 제품 수출항으로 성가를 높였다. 공업도시로서 면모도 더했다. 1966년 대만 첫 수출자유지역이 가오슝 첸전(前鎮)구에 세워졌다. 대만 최대 석유화학공단도 건설됐다. 중국강철(中國鋼鐵) 일관제철소가 가오슝에서 철강 생산을 시작했다. 중국조선공사(中國造船公司·현 대만국제조선공사) 독(dock)과 생산 설비도 완공됐다. 1970년대 가오슝은 ‘철의 도시’라 불렸다.

    ‘메이드 인 타이완’ 수출 항구

    보얼예술특구 내에는 예술 공간뿐만 아니라 서점, 카페, 공예품 판매점 등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최창근 객원기자]

    보얼예술특구 내에는 예술 공간뿐만 아니라 서점, 카페, 공예품 판매점 등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최창근 객원기자]

    2000년대 들어 가오슝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국제무역항 가오슝의 입지는 중국 내 경쟁 항구의 부상으로 위축됐다. 2007년 컨테이너 처리량 기준으로 홍콩,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3위에 오른 후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지난해 실적 기준 세계 13위에 그친다. 산업 첨단화로 인해 공업도시로서의 위상도 하락세다. 인구도 감소세다. 2017년 7월을 기점으로 가오슝은 중부 타이중(臺中)에 ‘대만 제2도시’ 타이틀을 내줬다. 

    ‘옛 영광을 잃어가는 도시’ 가오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곳이 있다. 옌청구에 자리한 보얼예술특구(駁二藝術特區·The Pier-2 Art Center)다. 원래는 1973년 건립된 가오슝항 제2부두 3독이다. ‘보얼(駁二)’이란 명칭도 ‘배를 접안해 매던(駁) 두 번째(二) 항구’에서 유래한다. 

    가오슝의 조선·제철·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성장세가 꺾이면서 항구의 물류창고도 본디 쓰임새를 잃었다. 이내 방치돼 흉물로 변했다. 이 속에서 가오슝시는 옛 항만 창고를 재활용해 문화·예술창작지구로 재탄생시켰다.
     
    보얼예술특구 역사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해 중화민국 국경절(國慶節·쌍십절) 축하 불꽃놀이 행사가 열렸다. 장소는 폐창고가 가득 들어선 제2부두. 사람들은 버려진 물류창고의 존재감을 재인식했다. 대중은 이곳에서 옛 정취를 느꼈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영감(靈感)을 얻었다. 우연히 개방된 공간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떠오른 것이다. 

    이듬해 보얼예술발전협회가 성립됐다.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전시·공연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 활동 공간으로 떠올랐다. 2002년 3월 공장 창고를 리모델링해 만든 첫 창작 공간이 문을 열었다. 

    예술가들이 폐창고에서 지핀 창작 혼은 파장을 일으켰다. 파장은 대만 섬을 벗어나 해외로까지 전해졌다. 이를 지켜본 행정원 문화건설위원회(현 문화부)는 버려진 창고들을 창작 공간으로 재활용하는 청사진을 그렸다. 보얼예술특구를 가오슝시 당국과 지역사회가 힘을 합쳐 가꾸는 대표 문화지구로 만드는 방안도 수립했다. 약 4년 만에 보얼예술특구는 대만 남부 최대 예술창작 실험 공간으로 거듭났다. 

    2006년 가오슝시는 보얼예술특구 운영·관리권을 시정부(市政府) 문화국으로 이관, 직영 체제로 전환했다. 가오슝디자인축제, 강철조각예술제, 컨테이너예술제 등을 개최했다. 매회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이후 가오슝시 문화국은 민간 기업 소유 물류창고를 임차해,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꾸미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다융(大勇)지구, 펑라이(蓬萊)지구, 다이(大義)지구가 순차적으로 만들어져 창고를 활용한 창작 시설은 총 25동으로 늘었다.

    대만 남부 최대 예술 창작 실험 공간

    민간 기업 참여도 이어졌다. 2010년 소니 엔터테인먼트가 디지털미디어센터를 열었다. 이듬해 가오슝에 본사를 둔 외식업체 패서디나(PASADENA)는 ‘창고식당’을 선보였다. 2012년 신생 영화사 TWR은 3D그래픽·특수효과 연구소를 열었다. 2016년 영화관 체인 인89디지털시네맥스(in89 Digital Cinemax) 보얼관이 개관했다. 

    보얼예술특구의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점이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간 물류창고 건물 외관을 그대로 보존했다. 내부 공간만 ‘필요한 만큼’ 리모델링해 사용 중이다. 

    보얼예술특구 곳곳에는 실험정신 가득한 예술 작품들이 자리한다. 오토바이를 탄 관우(關羽), 대형 트렁크, 트랜스포머 로봇 등이다. 그중 보얼예술특구의 랜드마크 조형물은 ‘두 남자’ 상(像)이다. 한 남자는 전통 복장을 한 어부, 다른 남자는 허리춤에 연장을 찬 공인(工人)이다.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인 가오슝의 역사와 정체성을 형상화했다. 

    보얼예술특구에 예술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융지구에는 대만 최대 서점 체인 청핀(誠品)서점, 각종 공예품 제작·판매점, 천연 재료를 사용한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 펑라이지구의 테마는 철도다. 본디 이곳은 철도 역사(驛舍)였다. 하마싱대만철도관(哈瑪星臺灣鐵道館)으로 꾸며진 옛 가오슝항역과 더불어 ‘대만철도 100년사(史)’를 체험할 수 있다. 

    가장 근래에 조성된 다이지구는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과 직영 공방 위주로 채워졌다. 레지던시 공간에는 외국 작가도 다수 거주한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생활과 예술 창작 활동을 병행하며 방문객들과 교류한다. 공방은 기본적으로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체험하고 공감하는 곳’으로 꾸며진다. 

    전위(前衛)·실험(實驗)·창신(創新)은 보얼예술특구의 모토다. 동시에 역사와 전통도 중시한다. 보얼예술특구는 2006년부터 2년 주기로 국제철강조각예술제와 국제컨테이너예술제를 열고 있다. 철과 컨테이너는 가오슝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전통의 재해석과 재생(再生)은 보얼예술특구의 전반에 흐르는 정신이다. 연중 20회 이상 기획전시회도 개최된다. 가오슝디자인페스티벌, 아트가오슝, 캐릭터페스티벌 등은 매년 인기를 끄는 행사다. 각 전시실과 공방에서는 짧게는 수주, 길게는 수개월 단위의 전시·체험 행사가 열린다. 주목할 점은 관람객의 니즈(needs)에 기반을 둔 인터랙티브형 전시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대만 국민 다수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제 전시와 축제가 대표적이다. 호응에 힘입어 상설 애니메이션 전시관도 탄생했다.

    民官 기민한 협업 주목할 만

    가오슝 풍경. 가오슝은 2007년 세계 3위 항구도시에 오른 후 중국 내 경쟁 항구의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최창근 객원기자]

    가오슝 풍경. 가오슝은 2007년 세계 3위 항구도시에 오른 후 중국 내 경쟁 항구의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다. [최창근 객원기자]

    연간 보얼예술특구를 찾는 이는 400만 명, 277만 가오슝 인구의 1.5배 수준이다. 보얼예술특구 성공 요인으로는 운영·관리 부문을 간과할 수 없다. 이곳은 가오슝 시정부가 운영하는 유일한 특구다. 실질 운영은 시 문화국 산하 보얼예술특구운영센터가 전담한다. 전체 직원 수는 40여 명 선으로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가 협업하는 구조다. 전시·공연 분야별로 8명의 메인 디렉터도 있다. 

    공간 구획과 운영 분야 노하우도 눈여겨볼 만하다. 보얼예술특구는 크게 순수예술 공간과 상업 공간으로 구성된다. 이질적인 두 곳은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에게 색다른 체험을 제공한다. 공간 운영 면에서도 차별성을 꾀한다. 순수예술 공간은 운영센터 직영 체제다. 카페, 서점, 영화관 등 상업시설은 민간에 위탁 경영한다. 운영자 선정만은 엄격하다. 인테리어 등 세세한 부분까지 사전 협의해 보얼예술특구의 정체성을 지키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관리한다. 운영 계획도 중요 평가 요소다. 기본적으로 신청을 받지만 콘셉트에 맞는 곳을 섭외하기도 한다. 청핀서점이 대표적 예다. 

    보얼예술특구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 진행형’이다. 가오슝시는 비어 있는 창고를 매입하거나 임차해 특구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최종 목표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가꾸며, 미래를 설계하는’ 보얼예술특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래에 ‘독립 운영’이 가능한 복합 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특구의 성공으로 가오슝시의 정책 기조도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난날 항구도시·산업도시로서 성장에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문화도시로 변모했다. 사람과 환경, 문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 시정(市政)의 핵심이 되었다. 보얼예술특구의 성공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時) 공간’ 관점에서 ‘도시재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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