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국제

아웅산 수지 영욕의 30년

‘미얀마의 어머니’ 인권 대신 민족 선택한 까닭은?

  • 입력2018-02-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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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힝야족 ‘인종청소’ 불구, 군부 두둔하는 이유

    • 소수민족 분쟁과 70년 내전 명분 쌓은 군사독재

    • 경제 악화로 되살아난 독재에 대한 향수

    • 군부와 ‘하나의 피’ 외친 아웅산 장군의 후예 공통분모

    • ‘라카인 사태’ 인도주의적 해결이 새로운 미래 위한 선결과제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가 미얀마에 등장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영국에 머물던 그는 1988년 8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잠시 귀국했다 미얀마 독립 영웅인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후광 속에 ‘조국의 어머니’로 떠올랐고 국제사회에서 ‘인권과 민주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15년의 가택연금에서 벗어나 정치 활동을 재개한 뒤 2012년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이 됐다. 2015년 25년 만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민족민주동맹(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이끌고 압승을 거뒀다. 이듬해 3월 미얀마에 새 정부가 출범했다. 아웅산 수지의 공식 직함은 국가자문역이지만 대통령 위에 있는 존재(Beyond the President)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정부 출범 1년 5개월 만에 그는 인생 최대 시련에 직면했다. 지난해 8월 미얀마 변경 라카인주(州)에서 벌어진 소수민족 로힝야(Rohingya) 소탕작전 탓이다. ‘인권과 민주화의 아이콘’이라는 글로벌 브랜드를 상실했고, 동시에 미얀마의 대외 이미지도 추락했다. 관광객이 줄고 해외투자가 주춤해졌다. 지난해 12월 유엔인권이사회는 로힝야 문제를 종족학살로 규정하고 미얀마 정부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인권이사회 47개국 가운데 33개국이 찬성했다. 반대한 나라는 중국, 인도, 러시아뿐이다. 

    하지만 미얀마 정부는 인종청소는 로힝야족 반군의 악성 선전에 불과하다면서 민간인 학살과 탄압 의혹을 전면 부인했을 뿐 아니라, 로힝야족의 인권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이양희 유엔미얀마특별인권보고관의 입국마저 거부했다. 또 로힝야족 문제를 취재하던 로이터 기자 2명을 체포한 뒤 가족 면회도 허락하지 않아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족 갈등은 제국주의 유산

    135개 민족으로 이뤄진 미얀마는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지 70년이 됐지만 여전히 내전의 총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그 분쟁의 중심에 북부의 꺼친(Kachin)족, 중국 국경의 샨(Shan)족, 태국 국경의 꺼인(Kayin, Karen)족, 방글라데시 국경의 로힝야족이 있다.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통치하면서 다수민족인 버마족을 차별하고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분열 정책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아웅산 장군이 이끈 버마독립군은 일본과 손을 잡고 영국군과 싸웠고 이때 꺼인족, 꺼친족,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은 영국 편에 섰다. 아웅산 장군은 일본과 협력해 영국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버마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얀마를 되찾으려 하는 영국에 ‘협력 메시지’를 보내 일본을 물리쳤다. 



    아웅산 장군의 기민한 대응과 전략으로 미얀마는 식민 지배 청산에 성공했지만, 제국주의 전쟁에 이용돼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버마족은 소수민족을 학살하고 종교 시설물을 파괴하는 것으로 앙갚음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버마’를 꿈꾸며 버마연방을 실현하고자 했던 아웅산 장군이 1947년 암살됐다. 

    이후 미얀마 군대는 독립과 연방 수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1949년 이래 꺼인족 등 분리독립을 주창하는 소수민족과 내전을 치르면서 군부의 조직력이 구축됐다. 아웅산 장군의 동료이던 네 윈 장군은 18개월간 ‘군사과도임시정부’를 거쳐 쿠데타를 감행했고, 1962년 미얀마에 군사독재정권이 시작됐다. 미얀마 군부는 ‘버마사회주의’를 지향하며 쇄국을 단행했다. 특히 버마연방 수호를 앞세워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추방했다. 소수민족의 무장봉기 진압은 군사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로힝야족을 둘러싼 구원(舊怨)

    라카인주에 사는 무슬림, 즉 로힝야족 문제는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군부의 소수민족 탄압과 연계돼 있다. 1885년 버마를 지배하게 된 영국은 라카인 일대에서 버마족과 아라칸족이 식민통치에 저항하자 벵골만 지역에 살던 벵갈리족을 이 지역에 이주시켜 의도적으로 민족 간 갈등을 부추겼다. 이때 이주한 이들이 지금 로힝야족의 뿌리다. 영국은 이들을 무장시켜 버마족과 싸우게 했다. 로힝야족은 버마족뿐만 아니라 미얀마에서 식민 지배 저항운동을 하던 대다수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로힝야족을 제외한 미얀마 내 종족 모두가 그들을 원수로 여기게 됐다. 

    독립 후 미얀마는 영국 측에 로힝야족을 데리고 갈 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이 아무런 조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불법이주자로 간주하고 방글라데시와 국경인 라카인주 서부 일대로 밀어냈다. 1982년 제정한 국적법에 따라 로힝야족의 시민권마저 박탈했다. 

    민족 갈등에 종교가 개입하면서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미얀마 불교는 이슬람 팽창의 최후 저지선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슬림 탈레반이 바미얀 석불을 파괴하는 것을 본 불교도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다. 

    2015년에는 로힝야족 가운데 합법적 체류 자격이 있는 사람들조차 서류 발급이 거부됐고 선거권도 빼앗겼다. 이러한 조치는 아웅산 수지가 이끈 민족민주동맹이 2015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로힝야에 관한 법을 바꿀 수 없도록 군부가 미리 대못을 박은 것이다. 

    로힝야족 문제가 국제 이슈가 된 것은 아웅산 수지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 2012년 라카인의 주도(州都) 시트웨(Sittwe)에서 불교도와 로힝야족이 충돌해 200여 명이 숨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혈 충돌 이후 정부는 로힝야족 12만 명을 난민수용소에 격리하고 학교와 의료시설 접근도 금지했다. 이 시기 아웅산 수지는 오랜 가택연금에서 벗어났고 그해 4월 1일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불교도를 옹호하고 군부를 두둔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왜 로힝야족만 집중적인 탄압을 받는 것일까. 이유는 동화(同化) 거부와 고립 그리고 인구 폭증 등이다. 로힝야족은 미얀마어 사용을 거부하고 그들만의 언어를 고집했다. 라카인 지역에서 로힝야족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불교도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불교 정체성 약화와 민족 잠식에 대한 불안은 이슬람 혐오 정서를 키웠다. 

    어쨌든 로힝야족을 압박할수록 군부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다른 소수민족과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독립이나 자치권을 주장하는 소수민족의 무장(武裝)이 강화할수록 미얀마 군대와의 충돌은 격화됐고, 군부에 대해 국민의 신망은 높아졌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군부

    그리고 지난해 8월, 이른바 ‘8·25 사태’가 발생했다. 로힝야족 반군단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이 핍박받는 동족을 보호하겠다며 대(對)미얀마 항전을 선포하고 경찰초소 30여 곳을 급습했다. 미얀마군은 ARSA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군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성폭행, 방화, 지뢰 매설 등이 알려지면서 유엔과 국제사회가 들끓었다. 

    이때 수천 명의 로힝야족이 목숨을 잃었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국경을 넘은 이가 62만6000여 명에 달했다. 전체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로힝야 탄압이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 버금가는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비난했다. 비폭력과 관용의 상징인 불교의 나라이자 인권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세계는 더욱 경악했다. 

    현재 미얀마는 민간 정부와 군부의 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 형태다. 아웅산 수지는 지난 총선에서 군사독재체제를 종식한 게 아니라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대통령, 부통령, 상하 양원 의장, 행정부 등 21개 장관을 확보했을 뿐이다. 의회 권력의 4분의 1과 또 한 명의 부통령, 국가 안보와 치안 관련 3개 장관은 군부 몫이다. 더욱이 미얀마에서는 군부 동의가 없으면 개헌을 할 수 없다. 군부가 유사시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을 수 있고, 아웅산 수지는 대통령이 될 수도 없다. 2008년 헌법은 군부지도자 딴 쉐가 아웅산 수지라는 절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2003년부터 준비한 군부 장기집권 책략이었다. 

    군부는 2008년 국민투표를 거쳐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군부는 2010년 11월 13일 아웅산 수지의 15년 가택연금을 해제하기 직전 총선을 실시해 권력을 선취할 정도로 치밀했다. 2011년 3월 30일 군 서열 4위의 떼인 세인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되면서 군부 파워를 지속하는 시나리오가 합법적으로 완성됐다. 현재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가 ‘대통령 위에 있다면(Beyond the President)’, 군부는 헌법 위에 군림한다. 

    군부의 최대 과제는 내부 안정과 소수민족과의 평화, 인도와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사이의 생존전략이다. 1989년 군부는 버마족 패권에 저항하는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꿨다. 그리고 소수민족과 평화협상을 체결해 내전을 종식하는 성과도 거뒀다. 또 정부 조직에 종교부를 두는 등 불교 종단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고, 2007년 샤프론 혁명(미얀마 승려들이 갑작스러운 유류비 인상에 반대해 일으킨 반정부 시위)을 강경 진압했다. 또 소수민족 무장세력을 소탕하고 그들을 국경선 너머로 쫓아냈다. 이를 수행한 장군들이 딴 쉐의 뒤를 이어 군부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라카인 사태는 미얀마 정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웅산 수지는 아버지의 꿈이었던 ‘하나의 미얀마’를 실현코자 했다. 이를 위해 아웅산 장군이 버마연방 건립 목적으로 추진했던 삥롱회담을 계승한 ‘21세기 삥롱회담’을 취임 후 두 번이나 개최했다. 일반 시민들도 참여한 이 회담의 주제는 연방주의와 헌법 개정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내용들이라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그 과정에서 로힝야 사태가 터졌다. 결과적으로 아웅산 수지는 수렁에 빠졌고 군부는 기회를 잡았다. 

    라카인은 지금 미얀마 정치의 한가운데 있다. 지난 총선에서 외면받은 군부는 라카인 사태로 국민적 신망을 얻었다. 군부가 내세운 ‘불교적 국수주의’에 불교민족주의 세력이 공개적으로 화답하며 대대적인 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점점 일반 불교도에게 퍼져 지난 시절 군부에 맞서 뭉쳤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미얀마 정부의 주인

    상대적으로 아웅산 수지의 30년 아우라는 한순간에 추락했다. 미얀마 내의 지지는 여전히 탄탄하지만 일부 불교 세력이 공개적으로 그를 흔들며 군부를 옹호하고 있다. 미얀마의 정치체제는 아웅산 수지에게 양날의 칼이다. 군부는 아웅산 수지를 이용했고 그 또한 군부의 계책에 장단을 맞췄다. 2010년 총선 승리 후 준(準)민간 정부를 구성한 군부는 아웅산 수지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2011년 2월 4일 딴 쉐가 물러나고, 그해 12월 중국의 급부상에 놀란 미국이 아시아중심정책으로 선회하면서 힐러리 국무장관이 미얀마를 전격 방문한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기 전까지 11개월 동안 6차례 경제제재가 완화됐다. 

    군부가 준민간 정부로 바뀌고 아웅산 수지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모두 군부의 시나리오였다. 아웅산 수지는 군부가 내민 2008년 헌법을 용인했다. 대신 2012년 4월 보선에 당선돼 현실 정치인으로 등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군부정권 54년을 종식한 아웅산 수지에게 경제제재 해제라는 선물을 안겼지만 알고 보면 군부와 군부에 얽힌 기업들의 족쇄를 풀어준 셈이었다. 

    2016년 3월 아웅산 수지 정부는 텅 빈 국고를 떠안고 출범했다. 정책을 실행할 재원이 없어 군부 연관 기업들과 재벌에 국가 건설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들은 관망 태도를 유지했다. 평화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사회적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국민 사이에 군부에 대한 향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다.

    흔들리는 아웅산 수지의 위상

    지난해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NLD는 절반의 성공도 거두지 못했다. 양곤 지역을 중심으로 연방 상하원 의석을 휩쓸었지만,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외면을 받았다. 미얀마 내부에서 아웅산 수지에 대한 비판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현 정부가 군부에 맞서 아웅산 수지를 지지해온 시민사회단체와 해외에서 투쟁을 계속해온 학생 조직을 배척하고 독재 성향을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군부가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한 것처럼 아웅산 수지 정부에서도 정부 비판을 이유로 수십 명이 기소됐다. 아웅산 수지의 위상이 흔들리는 사이에 군부의 힘은 더욱 세졌다. 

    미얀마는 세상의 어떠한 비난과 비판에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제재에도 반발했다.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면 미얀마는 미국의 경제제재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로힝야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지 불투명하다. 

    그 와중에도 군부의 시계는 정상대로 가고 있다. 군부가 쓸 카드는 많고 아웅산 수지의 카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는 군부, 중국, 서방 등 다양한 세력에 둘러싸여 있지만 군부는 단 한 사람, 아웅산 수지만 상대하면 된다. 군부의 ‘이기며 싸우는’ 손자병법 포석 앞에 아웅산 수지는 어떤 ‘신의 한 수’가 있을까. 

    미얀마는 지금 정치체제를 실험 중이다. 54년 군부독재를 선거로 마감하고 세계 최초로 민간과 군부가 동거하는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훈센이 야당을 탄압하며 장기집권 중인 캄보디아나 쿠데타로 들어선 태국의 군사정권 등 주변 국가를 둘러볼수록 미얀마의 정치적 진화는 각별하다. 독립 이후 70년째 가장 긴 내전을 치르고 있지만 미얀마는 미몽(迷夢)이 아닌 미래몽(夢)을 꿀 자격이 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 

    ‘하나의 피,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명’은 아웅산 장군이 만든 미얀마 군대의 표어로 지금도 그대로다. ‘하나의 피’로서 미얀마 독립을 이끌어냈고 ‘하나의 소리’로서 미얀마의 주권과 영토를 수호했다. 이제 남은 건 ‘미얀마의 사명’이다. 그것은 11세기 세계 최대 버간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19세기 최강의 영국제국주의에 맞서 62년간 저항한 곤바웅 왕조의 시간을 재생하고, 20세기 아웅산 장군이 영국과 일본 두 해양제국에서 국가를 해방한 역사를 계승해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미얀마 문명을 창조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아웅산 수지와 민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으로 대표되는 양자가 상생의 협력을 해야 하는 이유다. 

    다행히 양측의 가교가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 수지는 그의 딸이고 군부는 아웅산 장군의 후예다. 그래서 양자가 가장 의미 있게 만날 날은 7월 19일, 아웅산 장군 71주기다. 미얀마의 국부(國父)를 매개로 양자의 계곡에 다리가 놓인다면 미얀마는 그 역사와 자산을 바탕으로 ‘미얀마몽’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라카인 사태는 최악의 위기이자 최후의 기회다. 관건은 어떻게 이 문제를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해결하느냐다.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아웅산 수지가 군부에 적극 협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얀마에 가해지는 각종 결의안과 제재에 반대한다. 특히 군부를 표적으로 한 제재에도 반대한다. 군부가 민간 정부의 파트너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2008년 헌법에 따라 모든 일은 군부와 협의하에 이뤄지는 상황에서 군부를 제재하면 미얀마의 국가재건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얀마의 미래

    아웅산 수지는 로힝야 사태로 자신의 국제적 이미지가 추락한다 해도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그와 군부는 방글라데시와 난민 송환 협상을 주도했다. 또 아웅산 수지가 앞장서 라카인 재건을 추진할 ‘인도적 지원·재정착·개발을 위한 연합기업’(UEHRD·Union Enterprises for Humanitarian Assistance, Resettlement, and Development)을 만들고 위원장을 맡았다. 앞으로 좀 더 범국가적 차원의 캠페인이 필요해 보인다. 아웅산 수지와 군부를 옹호하는 대규모 지지 모임처럼 라카인을 지원하는 국민적 성원이 있어야 한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얀마에서 라카인주 무슬림에 대한 증오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로힝야를 언급하는 것은 공공의 적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과 같다. 누구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 

    1945년생 아웅산 수지는 올해 73세다. 수지는 가택연금 시절 명상 훈련을 하며 메타(慈悲)를 체화했다고 한다. 메타는 핍박을 준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오히려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군부에 대한 아웅산 수지의 태도가 곧 메타다. 미얀마가 세상에 내놓을 위대한 가치 또한 메타다. 후진국임에도 기부 세계 1위가 미얀마인 것도 그 때문이다. 미얀마는 보름달이 뜰 때 축제를 벌이는 ‘보름달 문명’을 가졌다. 보름달은 퍼주고 또 주어도 남는다는 면에서 메타를 닮았다. 우연히 미얀마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 아웅산 수지. 국민에게 레이디(lady)로 불렸고,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하며 ‘미얀마의 어머니’로 부각됐다. 그리고 30년, 아웅산 수지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꿈과 미얀마가 회복해야 할 역사와 정면으로 만났다. 메타로 맺은 그의 업(業)이 미얀마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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