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명사에세이

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 |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사계절출판사 대표 mskang@sakyejul.com

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2/2

아버지의 보물 상자

엄마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속이 상할 때면 난 소리 없이 아버지의 보물 상자인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서글픈 마음에도 아버지의 등산용품들은 신기하기만 해서 하나씩 만져보노라면 어느새 엄마에 대한 섭섭함이나 서러움이 사라졌다. 구석에서 이름도 쓰임새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의 등산용품이라도 발견할라치면 기쁨 섞인 놀라움을 안고 다락방을 내려오곤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 밥 줘”하며 평온을 되찾곤 했던 내 어린 시절 일탈의 공간, 다락방. 

아버지는 산행 준비를 할 때면 다락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다. 4박 5일 정도의 방학 산행에는 바로 위 오빠와 언니도 자주 동행했다. 배낭에 챙겨야 할 짐을 배분하는 일도 아버지의 몫이었는데, 배낭 무게는 막내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만만찮게 무거웠다. 나의 가벼운 항의에 아버지는 “네 짐은 점점 가벼워질 것이니라”고 했다. 4박 5일 동안 먹을 음식 재료와 도구로 꽉 찬 언니 오빠의 배낭과는 달리, 내 배낭엔 쌀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배낭은 점점 가벼워졌지만 산행은 갈수록 힘들었다.
 
방학 산행은 편안하고 다정한 무등산을 떠나 전국의 명산 순례로 이어졌다. 겨울 설악산에서 아이젠을 하고도 위험한 벼랑길을 지나갈 때면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아버지가 앞장섰다. 바로 뒤에 내가, 내 뒤에 언니와 오빠가 뒤따랐다. 아버지는 아무리 위험한 빙판길이 나와도 앞서갈 뿐 “이곳, 조심해라”는 한 마디 외엔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뎌야 할 내 발걸음은 내가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처녀 적까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낯선 산과 친해져 갔다. 

이제는 해마다 혼자서 무등산을 오른다. 무등산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다정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이면 훨씬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산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져서이리라. 여명을 뚫고 아버지와 함께 무등산 천왕봉(지금은 등산 통제 구간이지만)을 오른 어느 해이던가, 떠오르는 새해 첫 태양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똑같은 해이련만 유난히 붉구나. 어느 때보다 모두의 염원이 뜨거워서겠지. 해는 저절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어둠이라는 두꺼운 알을 뚫고 부화하는 듯하구나.” 식민지 시대와 독재 정권, 그리고 그 끔찍한 광주항쟁 중에도 끝까지 교육 민주화를 관철해나간 아버지의 눈에 태양은 그리 보였나 보다. 

증심사에서 출발해 중머리재와 장불재를 거쳐 서석대에 오른다. 물결처럼 겹겹이 이어지는 산 능선을 잠시 바라보다 중봉으로 돌아 동화사터 길로 접어든다. 아버지와 즐겨 찾던 코스다. 동화사터 길로 접어들면 인적도 없고 고즈넉하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주나무 한 그루를 만나면 무심히 안아본다. 차가운 몸과 마음이 따스해진다. 무등산에는 아버지가 있다. 설악산에도 백운산에도 지리산에도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 뒤를 따르는 내가 있다. 산은 내게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강맑실
● 1956년 광주 출생
● 사계절출판사 대표
● 한국출판인회의 산악회 전 회장
●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신동아 2018년 2월호

2/2
|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사계절출판사 대표 mskang@sakyejul.com
목록 닫기

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