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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 흥망성쇠 새겨진 유라시아의 관문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터키 이스탄불

  • ‘이스탄불’ 하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떠오른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하나로 잇는 초호화 철도 여행 중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다. 이스탄불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 관문으로서 먼 옛날부터 유럽인에게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아시아의 낯선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영욕은 대체로 동서 두 진영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이스탄불 전경.

이스탄불 전경.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은 도시가 형성된 그리스 시대(기원전 660년)에는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렸고,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을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453년 오토만 제국의 정복으로 지금의 이스탄불로 불리게 되기까지 장장 1123년 동안 유럽 문명의 본거지로 군림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온 세계 진귀한 물건이 넘쳐났다. 이 도시는 아득한 고대부터 15세기까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큰 이득을 봤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터키의 정치와 문화, 종교적인 면에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사통팔달의 교통망은 무역과 상업, 금융업의 융성을 가능케 했다. 

내가 이곳을 방문한 때는 우기가 끝날 무렵인 4월이었다. 사흘에 하루쯤 비가 내렸고 기온은 서울의 4월 중순과 비슷해 섭씨 7도에서 17도를 오르내렸다. 바깥 활동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둘러보고 싶은 곳은 거의 다 볼 수 있었다. 이스탄불 출신의 친구인 이스마일은 이스탄불의 지리적 위치를 강조했다. 이곳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Golden Horn)· 마르마라해(海)에 의해 위스퀴다르, 베욜루, 파티프(이스탄불) 3지구로 나뉜다.


세상의 부를 거머쥐다

이스탄불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대규모 시장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대규모 시장 그랜드 바자르.

먼저 위스퀴다르는 아시아로 가는 동쪽의 전진기지로 고대에 번성했다. 옛 이름은 ‘스쿠타리(Scutari 사각모형의 방패)’.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점령한 뒤에는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로 이름이 바뀌었다.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군의 기지로 활용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베욜루는 중세 시대 교역 무대였다. 그 당시 베욜루 남부 갈라타 지역에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무역상사가 포진해 있었다. 지금도 갈라타 주변 부둣가에는 여러 나라의 선박이 즐비하다. 베욜루 동쪽에는 일급 호텔과 레스토랑, 극장이 즐비하고 각국의 영사관도 눈에 띈다. 파티프는 그리스 식민도시 ‘비잔티움’이 있었던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훗날 비잔틴제국(동로마)의 중심지이자,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이 됐고, 대제국 비잔틴의 11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당시 만들어진 성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야소피아 대성당(현재는 아야소피아 박물관(Hagia Sophia Museum)’을 비롯해 이른바 양대 이슬람 사원으로 불리는 ‘아흐메드 사원(블루 모스크)’과 ‘술레이만 사원’도 이곳에 있다. 토프카피 궁전(현재 박물관)과 고고학 박물관, 고대 오리엔트 미술관, 터키·이슬람 미술관 및 이스탄불 대학교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규모 시장 ‘그랜드 바자르’는 현지인은 물론 이곳을 처음 찾은 여행객도 꼭 방문하는 곳이라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콘스탄티노플의 융성은 ‘실크로드’와 관계가 깊다. 무역로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여겨졌다. 동쪽으로는 상업도시로 명성이 자자하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이라크 바스라· 바그다드 등이 펼쳐져 있다. 

설화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이기도 한 바그다드는 고대 바빌론의 수도로, 바벨탑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하다. 바스라는 굴지의 무역항으로 로마 시대의 유물이 많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 주요 상업 거점도시였다. 이들 모두 고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실크로드로 연결돼 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역로로, 주된 교역품이 중국산 비단이어서 비단길 즉 실크로드라 불리게 됐다. 중국 장안에서 시작해 서쪽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길인 것이다. 값비싼 비단과 도자기가 이 길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로마의 유리그릇도 이 도시들을 지나 동방으로 전해졌다. 유물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리잔(보물 620호) 역시 서방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왔다고 본다. 비단길은 한국과 일본까지도 이어졌다.


실크로드의 서쪽 관문

비록 한 번에 그쳤지만, 로마제국은 중국에 사신을 보낸 적이 있다. 사신 일행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한나라 조정으로 갔다. 동서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당나라 때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 국제도시로 크게 번영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비단길 덕분이었다. 그러다 8세기 중반,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가 이슬람제국에 대패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당나라 제지공이 포로로 잡히면서 중국의 제지 기술이 이슬람 국가와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는 곧 르네상스와 인쇄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몽골(원)제국에 들어서는 중국이 다시 동서 교역의 패권을 쥐었다. 몽골군대는 바그다드를 초토화했고 이슬람 문화권을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원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문명은 또 한 번 대전환을 맞는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동서 교역이 계속되면서 콘스탄티노플과 중국은 해당 교역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바이킹이 이 도시를 ‘황금수레’라 부르며 찬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아랍을 비롯해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러시아 및 북유럽 상인들이 늘 북적였다. 

동로마제국 황제들은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아봤다. 4세기경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수도인 로마가 위협에 처하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으며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시’란 뜻이었다. 이후 330년 5월 11일, 분열됐던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도시를 ‘새로운 로마(Nova Roma)’라 부르며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선포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 도시를 로마에 버금가는 곳으로 인정했다. 이후 이곳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수위권(교황의 권한)을 놓고 경쟁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지은 아야소피아 대성당은 교황청과 패권 다툼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꾼 아야소피아 대성당

아야소피아 대성당. [위키피디아]

아야소피아 대성당. [위키피디아]

아야소피아 대성당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화재로 큰 손실을 입어, 416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다시 지은 데 이어 532년 니카 반란으로 또 파괴됐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년에 걸쳐 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기둥을 실어왔고, 지중해 여러 도시에서 많은 석재를 가져왔다. 동로마제국의 재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로마법을 집대성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염원은 오직 한 가지였으니, 바로 로마제국의 영속성을 증명하고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아야소피아 대성당의 재건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숙제였다. 대성당은 동로마제국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황제들은 대성당의 화려한 모습을 통해 이미 사라진 서로마제국(476년 멸망)의 영광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성스러운 지혜’를 뜻하는 아야소피아 대성당은 15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중앙 돔은 직경이 31m, 높이 54m다. 벽을 메운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가 특히 유명하다. 나 역시 본당 2층 갤러리에서 황금색 모자이크 벽화를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지금 남아 있는 모자이크는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와 성모마리아, 세례자 요한이 성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 출구 쪽에 있는 모자이크 작품도 특별하다. 황제들이 성모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과 대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1054년 가톨릭교회는 양분됐다. 한쪽은 로마교황청을, 또 다른 한쪽은 아야소피아 대성당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 무렵 아야소피아 대성당은 동방교회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다시 500년이 흐른 16세기 중반, 동로마제국은 명을 다했다. 이슬람의 지배 아래 아야소피아 대성당 역시 모스크(이슬람교 예배당)로 바뀌고 말았다. 대성당에는 새로 미흐랍(mihrab·메카를 향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모양의 예배실)과 미나레(minare·첨탑)가 설치됐다. 이때 성당 벽화 위에는 우상을 금지한 이슬람 예법에 따라 회칠이 됐다. 현재 벽화를 볼 수 있는 건 최근 모스크가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면서 당시 칠해진 회칠을 모두 벗겨내고 전문적인 복원이 이뤄진 덕분이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에는 유리벽으로 둘러쳐진 지하 공간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선 소피아 성당의 시대별 특징을 지층별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이 도시의 막대한 부는 사방으로부터 질투와 침략의 대상이 됐다. 내 친구 이스마일은 이러한 얘기를 주고받다가 불쑥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1840)이란 그림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의 주문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1204년 4월 12일, 제4차 십자군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약탈과 살육의 현장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제4차 십자군원정대는 본래 이집트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부유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베네치아공화국의 역할이 컸다. 지중해상 주요 무역국으로 꼽히던 베네치아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늘 견제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원정을 승리로 이끌어 자국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원정군은 병력도 부족했고, 군자금이 형편없이 적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십자군의 지휘부를 설득해 달마티아의 자라(헝가리 보호령)를 약탈하기로 결정했다. 자라는 기독교 도시였다. 이에 놀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특사를 보내 십자군의 탈선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원정군은 상륙선까지 동원해 자라를 함락하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그 결과 베네치아 사람들과 유럽의 영주들은 전리품을 독차지하게 됐다. 

교황은 헝가리 왕실의 진정을 받아들여 원정군과 베네치아공화국을 모두 파문했다. 그런데 원정군은 교황의 교서를 은폐하고, 다음 공격 목표로 콘스탄티노플을 지목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내분이 심각했다. 세력을 잃은 알렉시오스 황자는 폐위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였다. 그는 원정군에게 접근해 제왕의 위엄을 되찾아주면 엄청난 보상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진 빚을 탕감해주고, 원정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제공하며 1만 명의 병력과 500여 명의 기사를 보태주겠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정교회를 로마교황청에 바치겠다고 공언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파우스트 조나로의 그림 ‘마호메트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파우스트 조나로의 그림 ‘마호메트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운이 짙어지자 교황은 다시 특사를 보내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침략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원정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를 점령했다. 2만 여 명의 원정군은 사흘 동안 성안에서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강탈했다. 교회 역시 방화와 파괴의 대상이었다. 원정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행과 살해, 납치, 강간을 서슴지 않았다. 귀족 여성은 물론 수녀들도 피해자가 됐다. 원정군은 황제들의 무덤까지 파헤쳐 부장품을 나눠 가졌다. 아야소피아 대성당도 화를 면치 못했다. 침략자들은 사제들마저 모두 살해한 뒤 교회의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3일간 원정군은 은화 9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다. 대신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기독교 도시는 탐욕스러운 십자군원정대의 발길에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 도시의 재앙은 쉬 끝나지 않았다. 주변의 여러 민족이 잇따라 침략을 감행했다.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15세기에는 철옹성으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부유했다. 이 도시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는 향신료의 양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중 60~70%가 후추였는데 인도 남부지방에서 해마다 1000t의 후추가 유럽으로 건너갔다. 

1453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군사전략에 빼어난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자 7만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다.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초대형 청동 대포는 총 길이 6.5km에 이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도시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이스마일과 나는 풍상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성벽 밑을 거닐며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어림짐작했다. 

마호메트 2세는 동서 무역의 거점을 장악하자 향신료 가격을 대폭 올렸다. 유럽의 상인들은 이윤이 크게 줄어 동양으로 가는 무역로를 갈망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30년 뒤, 포르투갈 탐험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고, 드디어 직항로가 열려 지중해 무역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많은 학자와 예술가는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그들은 천년 동안 고이 간직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을 전해줬다. 이로부터 새로운 문화운동인 르네상스가 일어날 토대가 마련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난 1923년, 그리스는 이 도시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으나 터키의 지도자 케말 파샤는 이를 일축했다. 그러면서도 수도는 앙카라로 옮겼다. 또 로잔조약을 통해 동방정교회의 신앙을 보호하기로 공언했다. 그러나 정교회의 활동은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니, 이 또한 깊게 파인 역사의 주름살 때문일 것이다. 

이스탄불은 여전히 대륙 간의 중요한 교차로로 불린다. 러시아와 미국의 이해관계가 이곳에서 부딪친다. 지정학적 가치는 불변하다.




신동아 2019년 4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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