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이 사람

“일흔다섯이지만 일을 하니 소주 2병 너끈”

‘한 직장, 50년’ 이상일 씨의 유쾌한 하루

  • 김지은 객원기자 | likepoolggot@empal.com

    입력2016-03-23 15: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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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여섯 풋내 나던 시절부터 정년을 훌쩍 넘긴 일흔다섯 나이까지 50년 긴 세월 묵묵히 한 직장, 한자리를 지켜온 이가 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매일 마주치는 이들조차 이름을 기억해주지 못해도 그는 늘 한결같았다. 서울대병원 의료가스팀 이상일 팀장.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젊은 사람들이 이런 힘든 일을 하려고 하나요. 나도 말리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 정규직으로 일하는 게 대우도 좋고, 마음도 편하지.”
    이상일(75) 씨가 하는 일은 서울대 병원 곳곳에 의료용 가스를 배달하는 일이다. 병실과 응급실에 필요한 산소통은 물론 수술실의 마취가스나 질소, 연구실에서 종균을 얼려두느라 사용하는 탄산가스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담당자에게 전해진다.
    정해진 곳에 정해진 가스를 배달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 업무 같지만, 의료용 가스는 용도에 따라 혼합 비율이 제각각이라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수십 년 키워온 실험용 종균을 못쓰게 만드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가 서울대병원 정년퇴직 후 6개월 만에 외주업체로부터 팀장직 제의를 받은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회사에서 다시 일을 해줄 수 없겠냐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정년퇴직할 때쯤 병원 소속이던 의료가스팀이 외주 협력업체로 소속이 바뀌면서 파견근무 체제로 전환됐거든요. 의료가스팀에서 정년을 채운 사람은 저 하나뿐인데, 저까지 퇴직하고나니 전체 업무를 파악하고 관장할 사람이 없었던 거죠.”
    그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노후에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차였다. 한창 일할 나이에 퇴직을 하고 6개월을 내리 놀았으니 좀이 쑤시기도 했다.



    휴가 없이 50년 근속

    이상일 씨가 서울대병원 의료가스팀에 입사한 것은 1966년, 스물여섯 살 되던 해다. 막 제대하고 제분회사에 다니던 그에게 매형이 병원 일자리를 주선했다. 정직원이 아닌 임시직이지만 일반 회사보다 안정적일 것이란 말에 덥석 받아들였다. 월급은 3300원. 당시 물가를 감안해도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낳아 길렀다.
    당시만 해도 병원의 의료가스 업무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산소, 마취가스, 질소, 탄산가스 4종의 가스를 관리하면서, 찾는 곳이 있으면 가스통을 가져다주고 빈 가스통을 되찾아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처럼 의료용 가스 사용이 흔하지 않을 때여서 인공호흡을 해야 할 만큼 환자의 상태가 악화된 경우라야 겨우 산소호흡기를 찾을 정도였으니 업무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가스의 종류만도 40여 가지나 되고, 용도에 따라 혼합 비율도 제각각이다. 각 부서에서 필요한 가스의 종류와 비율을 보내오면 그가 주문서를 취합해 회사에 보내고, 회사에서 주문서에 맞게 가스를 병원에 보내오면 그 가스를 용처에 맞게 분류해 배달한다. 50년 세월 동안 병원 규모도 커지고 가스의 용도도 매우 다양해져서 혼합 비율에 0.1%만 차이가 나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여간 꼼꼼한 성격이 아니고서는 일하기 힘들다.
    가스통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50L가 채 안 되는 가정용 LP가스통을 떠올릴 게 아니다. 의료용은 제일 작은 것이 160L들이. 무게는 180㎏ 넘게 나간다. 웬만한 장정들도 들고 내리는 것이 버겁다. 날씨도 문제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는 장갑을 두세 겹으로 겹쳐 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럴 때면 얼음장보다 차가워진 가스통을 안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요즘은 직원이 4명으로 늘어서 그래도 좀 할 만해요. 또 저는 전체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주간 근무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도 없어요. 하지만 나머지 3명은 주간 근무 이틀, 야간 근무 이틀, 그리고 하루 쉬는 식으로 교대로 일합니다. 따로 휴가가 없으니까 그렇게 돌아가면서라도 쉬지 않으면 체력이 못 버티거든요.”
    입사 초기에는 근무자가 달랑 두 명이었다. 한 명이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맞교대 시스템이었는데, 소수 인원으로 일하다 보니 휴일 근무는 언제나 당연한 듯 여겨졌다. 한 사람이 쉬면 그의 업무를 대체해줄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나 연구실 종균이 이들의 휴가를 피해 아프거나 생장을 멈추는 것도 아니니 휴가는 엄두를 못 냈다. 문제는 집안에 큰일이 생기거나 크게 아플 때였다.
    “같이 근무하는 맞교대 근무자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였어요. 3일 내리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나 혼자 근무해야 했죠.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출근하는 날 제 장모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그나마 저는 장례를 서울에서 치렀기에 짬짬이 병원에 들러 일하고 다시 장례식장에 가는 식으로 하긴 했는데, 그 사람은 장지가 경상도라 중간에 올 수도 없으니 3일 내내 혼자 밤낮으로 일하는 수밖에요. 그래도 그땐 젊었으니 힘들어도 견딜 만했던 거 같네요.”



    ‘노동의 삶’이 지켜준 건강

    그의 업무는 오전 6시에 병원을 돌며 빈 가스통을 수거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병원을 한 바퀴 돌고 9시쯤 되면 그가 소속된 외주 가스회사인 신양산소 공장에서 배달 차량이 온다. 차에서 가스통을 내리고 빈 통을 차에 실어 보낸 다음부터 본격적인 가스 배달이 시작된다. 병실로, 연구실로 가스통과 씨름하며 오전을 보내고 나면 오후부터는 가스 주문서를 받아 정리하고 남은 가스 양을 점검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가족은 그에게 “이제 일 그만두고 편히 지내라”고 말한다. 일흔을 넘긴 노인이 무거운 가스통을 나르는 일은 누가 봐도 벅차고 고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퇴임 후 쉬던 6개월 동안만큼 좀이 쑤시고 무료한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놀고 있으니 수도 고치는 일을 하던 친구가 저더러 ‘담뱃값이라도 벌자’며 나와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보조 일이라도 시켜주려나 싶어 작업복을 입고 나갔더니 다단계하는 곳이더라고요. 그 친구도 속아서 간 거지. 다단계라는 게 얼마나 사람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는지, 집에 보내주지도 않고 약탕기를 팔아오라고 볶아댔어요. 겨우 틈을 타서 도망 나온 후에야 새삼 아, 병원 가스 배달 일이 내 천직이구나 깨달았어요.”
    이씨는 슬하에 딸 셋, 아들 하나를 뒀다. 첫째는 건축사, 둘째는 초등학교 선생님, 셋째는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한다. 막내아들은 호텔 주방장. 중학생부터 갓난아기까지 손자도 여섯이나 된다. 그런 그가 비행기를 타본 건 5년 전, 칠순 기념 가족 여행 때가 처음이다. 가족 여행도 그게 최초였다. 그나마 명절 연휴가 끼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간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 갈 시간조차 낼 수 없었던 탓이다.
    “집사람이야 일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 듯했지만, 아이들한테는 늘 미안했죠. 그래도 이렇게 잘 자라줘서 얼마나 고맙고 보람된지 몰라요. 좋은 짝들도 만나고 손자들도 모두 건강하니 더 바랄 게 없지요.”




    그가 정직원으로 채용된 것은 1972년이다. 병원 임시직에서 공무원(서울대병원 직원은 공무원이었다)이 되니 월급이 4만5000원으로 10배 넘게 올랐다. 연탄 몇 장으로 겨울을 겨우 나던 살림살이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정년퇴직 이전 월급을 가장 많이 받았을 때는 성과급까지 합쳐 400만 원이 넘은 적도 있다. 하지만 정년 무렵 의료가스팀이 외주 협력업체로 넘어가면서 월급도 반 토막이 났다. 그래도 그에겐 놓을 수 없는 일자리였다. 지금처럼 손자들 용돈도 쥐여주고,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는 일을 안 했으면 갖기 어려웠을 것이라 여긴다.
    물론 그가 일흔다섯까지 일손을 놓지 않은 게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오전 5시면 집을 나서 오후 5시까지 몸을 움직이고 힘을 쓰는 노동의 삶이 스스로를 지켜줬다고, 그는 믿는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소주 두 병은 너끈한 체력도, 서른 즈음 입이 돌아가는 병을 얻어 고생한 것 말고는 지금껏 크게 아픈 곳 없이 지내온 것도 평생을 일해온 덕분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 퇴임

    힘들고 어려운 일, 큰돈을 못 버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젊은 세대에게 그의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지켜온 그의 자리가 그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건강까지 지켜주는 작은 버팀목이 돼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직장, 한자리에서만 50년. 이제 그는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한다. 은퇴 후 뭘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정년퇴직을 했을 때처럼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것이 나의 천직이라 믿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빛나는 인생 2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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