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부족함은 돌아보지 않고 자식을 가르치려 들다 낭패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순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에겐 엄격했지만 자식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아버지였다. 그의 자손 중 나라의 동량(棟樑)이 여럿 나왔다.
난중일기를 통해 남편이자 아버지, 즉 가장으로서 이순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성웅 이순신’이라는 아이콘에 가려진 그의 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매듭을 쉽게 풀기 위해 먼저 그에 관한 영웅담부터 꺼내보자.
믿고 의지할 지도자
“공은 몸집이 크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수염이 붉고 담력이 큰 분이셨다.” 17세기의 대학자 윤휴(尹鑴·1617~1780)의 증언이다. 윤휴만큼 이순신을 속속들이 잘 알던 사람도 없다. 윤휴의 서모(庶母)는 이순신의 서녀(庶女)였다. 구국의 명장 이순신을 존경한 윤휴는 관계 문헌을 샅샅이 수집했고, 이순신을 모신 여러 하인과 측근을 만나 궁금증을 풀었다. 그 결과를 정리해 그는 ‘통제사이충무공유사’(‘백호전서’, 제23권)를 집필했다.이순신의 공적은 무엇일까. “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며 진격했다. 그러나 우리 수군에게 거듭 패전을 면치 못했다.”(윤휴, ‘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의 수군 때문에 왜군의 병참선은 무너졌다. 그들이 계획한 수륙양면 작전도 휴지가 돼 한반도 정복의 야심이 꺾였다. 더욱이 이순신 덕분에 호남지방이 온전히 보호돼 조선은 장기전을 펼 수 있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를 분히 여겼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조선 수군의 궤멸을 주문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요시라라는 첩자를 써서 조선 조정을 속였다. 우매한 조정의 처사로 이순신은 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났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7년에 걸친 왜란 동안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상으로 받은 물건들도 휘하 장수들에게 모두 줬다. 사사로이 차지한 것이라곤 없었다. 또한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케 했다. 부하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식량을 저축하고, 어업과 소금 제조에 힘써 진중의 생계를 꾸렸다. 덕분에 군량이 넉넉해 끊어진 적이 없었다. 남도의 백성들도 이것으로 먹고산 이가 수만 집이다.”(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은 변방의 장수였지만, 최고의 통치자이자 경영자였다.
그를 시기한 원균이 “백성들이 이순신을 ‘해왕(海王)’이라고 부릅니다”라고 조정에 고자질한 것을 음해로만 볼 일이 아니다. 백성들 처지에선 이순신만큼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없었다.
이순신에겐 젊어서부터 웅대한 뜻이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벼슬에 나간다면 몸 바쳐 일할 것이요, 등용되지 못한다면 초야에서 농사짓고 살면 된다. 권세가에게 아부하여 부귀를 훔치는 일을 나는 몹시 부끄럽게 여기노라.”(통제사이충무공유사) 이순신은 항상 그런 태도를 보였다. 자존감이 누구보다 강한 그는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나긋나긋하게 굴지 않았다. 자신을 단속하는 풍도가 늠름해 함부로 남을 추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벼슬길은 유독 험난했다.
다행히 조정엔 이순신이 큰 그릇임을 알아본 재상이 몇 명 있었다. “유서애(柳西厓, 유성룡), 이완평(李完平, 이원익), 정상국(鄭相國, 정탁), 경림(慶林, 경림부원군 김명원), 오성(鰲城, 오성부원군 이항복) 등이 그를 전후좌우에서 발탁하고 지지했다. 그리하여 못난 사람들의 천대와 비웃음에 꺾이지 않고, 마침내 대업을 성취했다(통제사이충무공유사). 비록 소수이나마 그를 후원한 재상들이 있었기에 이순신은 좌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제대로 알아본 이들은 백성이었다. 사후에도 그의 인기는 생전에 그가 활동한 서남해안 일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힘을 모아 사당을 세우고 철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장사꾼, 군인, 백성 할 것 없이 사당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잔 술을 바쳤다. 백성들은 큰 돌을 다듬어 ‘이장군타루지비(李將軍墮淚之碑)’(전남 여수시)를 세워 기념하기도 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엔 더 기막힌 이야기가 전한다. 순천의 옥형(玉浻)이란 노스님은 승병으로, 이순신을 모시고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이 작고하자 그는 충민사(忠愍祠, 전남 여수시)에 눌러앉아 평생 동안 제사를 모셨다. 옥형 스님은 바다에 변고가 일어날 때마다 이순신이 미리 꿈에 나타난다고 증언했다. 남도 백성에게 이순신은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우울한 영웅
이순신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18세기 북학파의 이름난 학자 이덕무는 그를 조선의 명문장가라고 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수백 명 장수 가운데서도 난중일기와 같은 기록물을 남긴 이는 이순신뿐이다. 난중일기는 국보 제76호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고뇌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도처에 역력하다. “혼자 다락 위에 기대 앉아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나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 사직이 장차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난중일기, 1595년 7월 1일)이순신은 그저 용맹스럽기만 한 무사가 아니었다. 그는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요,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명망과 학식이 높다는 조정 대신들도 그의 눈엔 범부에 불과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나랏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순신은 우울하고 고독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난중일기, 1595년 1월 1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 앉아 있었다.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보냈다. 경(庚)의 어미에게 줄 노자를 문서에 넣어 보냈다.”(난중일기, 1593년 8월 13일) 전쟁을 치르는 내내 그는 몸이 불편했다. 불면에 시달리는 밤도 많았다. 그가 마음을 기댈 곳은 별로 없었다.
그에게도 몇 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긴 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와 여러 대신은 그를 ‘사특하다’, ‘교활하다’, ‘게으르다’며 미워했다. 그런 사실을 알던 이순신인지라 홀로 깊은 외로움에 젖을 때가 많았다.
그는 가족이 그리웠다. ‘온갖 회포에 빠진’ 그는 장계(보고서)를 가지고 올라가는 이경복에게 ‘경의 어미’에게 들러 노자를 전해주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그리웠다.
흠결도 지닌 남편
경의 어미는 이순신의 첩이었다. 경은 이순신이 정읍 현감을 지낼 때 낳은 서자 훈(薰)의 아명이다. 경이네는 부안에 살았다.1593년 가을, 경의 어미 곧 부안댁은 노자를 전해 받고 이순신에게로 갔다. 한동안 그들은 함께 지냈고, 그러는 새 아이가 또 생겼다. 얼마 후 그녀는 부안으로 되돌아갔다. 이순신이 “꿈에 아들을 얻었다.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난중일기, 1594년 9월 16일)라고 쓴 것은 그 때문이다.
그 후로도 이순신은 그녀와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 “경의 어미가 보낸 편지 가운데 사정을 말하기가 매우 괴롭다 했고, 또 도둑이 일어났다고 했다.”(난중일기, 1597년 6월 11일) 이순신이 적탄에 숨지기 1년 전쯤의 기록이다. 이순신은 부안댁과의 사이에 2남2녀를 뒀다. 2남은 훈과 신(藎)으로 무과에 합격했는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모두 전사했다.
이순신이 하필 부안댁을 진중으로 부른 까닭은 무엇인가. 아산에 두고 온 본댁, 즉 방씨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서였다. 방씨는 사당과 묘소를 비롯한 집안 살림을 돌봐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이순신은 여색을 멀리했다.” 윤휴의 평가는 그러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산도의 통제영이나 여수의 좌수영엔 따로 이순신의 첩이 없었다. 다른 장수들은 진중으로 아내를 불러들이거나 첩살림을 차렸다. 심한 경우 군함에도 몰래 여성을 태우고 다녔다. 이순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물론 이순신에게도 흠잡을 점이 없지는 않았다. 부안댁이 몇 차례 다녀갔고, 공무상 고을을 순행할 때는 기생과 어울리거나 지방관의 딸과 동침하기도 했다. 가령 1596년 9월 영광(전남)에선 기생 내산월과 만났고, 무장(전북 고창)에선 여러 밤을 여진과 동침했다. 또 광주목사 최철견의 딸 최귀지와도 함께 잤다. 이순신에게도 상당한 일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순신은 두고 온 아내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밤 열 시에 집에 편지를 썼다”(난중일기, 1597년 12월 24일)고 했다. 또한 서남해안을 누비고 다니는 ‘탐후선’(정탐선)이 며칠이 멀다하고 아산 본가와 이순신의 진중을 왕래했다. 이와 별도로 방씨는 번갈아가며 남녀 노복을 보내 이순신의 진중생활을 보살폈다.
7년의 전쟁 기간 중 이순신은 한 번도 휴가를 얻지 못했다. 아내를 만나 회포를 풀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내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편지에는 면(葂, 셋째 아들)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난중일기, 1594년 6월 15일) 이런 식으로 부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희로애락을 나눴다.
끊임없는 아내 생각
이순신의 한 가지 걱정은 아내의 건강이었다.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난중일기, 1594년 8월 27일) 사흘 뒤 이순신은 또 이렇게 기록했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한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나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한데 (아내가 죽는다면) 아들 셋, 딸 하나는 장차 어떻게 살까.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못 잤다.”(난중일기, 1594년 8월 30일)그 무렵 그는 조정의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내의 병환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촛불을 밝힌 채 밤새 뒤척였다. 이른 아침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았다.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점을 쳤더니, ‘의심이 풀려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나아질지 점쳤다. ‘유배지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 좋은 소식이 들려올 조짐이었다.”(난중일기, 1594년 9월 초1일)
다음 날 이순신은 탐후선을 통해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난중일기, 1593년 9월 2일) 이처럼 소상히 기록한 것만 봐도 아내를 향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매사에 엄격하며 까다로웠다. 그는 군법을 어긴 부하들의 목을 가차없이 벴다. 전쟁터의 실상을 모르는 조정 대신들의 명령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을 대하는 이순신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1592년 초 동생 이여필(이우신)이 진중으로 찾아와 넉 달이나 함께 지내다 귀향했다. 아우가 떠나자 이순신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다. “아침에 어머님께 보내드릴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 여필이 돌아갔다. 객창에 홀로 앉으니, 만 가지 회포가 어린다.”(난중일기, 1592년 4월 8일)
오래전에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컸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관청에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었다. 이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로 하랴!”(난중일기, 1593년 11월 15일) 이순신에게 아버지는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꿈을 꿨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셨다. ‘13일에 회(이순신의 맏아들)의 초례(혼례)를 치른다는데, 날이 좋지 않다. 4일 뒤로 미루면 좋겠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셨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홀로 앉아 있었더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난중일기, 1595년 정월 12일) 그런 이순신이었다.
진정한 ‘아들바보’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잘 아는 큰아들 회는 줄곧 진중에 머물렀다. 회는 아버지를 따라 한산도대첩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나중에 그는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첨정 벼슬을 지냈다. 둘째 아들 예(䓲)도 아산과 진중을 오갔다. 훗날 정랑 벼슬을 지냈는데, 난중일기에 이름이 60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이 컸다. 셋째 아들 면은 정유재란 때 아산의 본가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 이순신의 사랑과 기대가 특별했으나, 젊은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아들의 부음이 도착하기 전, 이순신은 꿈에서 비극의 전조를 봤다. “밤 두 시쯤 꿈속에서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저녁 때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며 어지러웠다. 대강 겉봉을 뜯고 열(예와 동일인)의 편지를 꺼냈다.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직감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아들을 여읜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컸다. “새벽꿈에 고향의 남자 종 진이가 왔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 저녁 때 코피를 한 되가량 쏟았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다 눈물이 절로 났다. 이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랴! (…) 비통한 가슴 찢어질 듯하여 참지 못하겠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9일) 슬픔은 그의 꿈속까지 자주 따라다녔다. “꿈속에서 면이 죽는 광경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난중일기, 1597년 11월 7일)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순신은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가. (…)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어그러진 일이 어디 있느냐. 천지가 깜깜하고 태양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너를 따라가 지하에서라도 같이 지내며 같이 울고 싶구나. 그리하면 네 형들과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을 테지. 아직 참고 살기야 한다마는 마음으로는 이미 죽고 껍데기만 이렇게 남아 울부짖는다. 이렇게 울부짖는다.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가 1년 같구나.”(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아들을 잃은 슬픔에 애태우던 그는 1년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부모라면 누구든 제 나름으로 자식을 사랑한다지만, 이순신처럼 정 깊은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식을 가르치려고 들다 낭패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순신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절조를 지키며 몸가짐을 꼿꼿하게 견지한 것을 보면, 마치 석벽(石壁)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이식, ‘통제사증좌의정이공시장’, ‘택당선생별집’ 제10권)는 표현처럼, 그는 스스로에겐 한없이 엄격했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엄부(嚴父)가 아니라, 너그러운 자부(慈父)였다. 깊고 은은한 그 사랑 덕분이겠지만, 이순신의 자손 가운데서는 나라의 동량(棟梁)이 여럿 나왔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