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남부군’과 보경사 12폭포

‘마음의 눈’을 열고 역사 속으로

  • 글 · 오동진|영화평론가|사진 · 김성룡|포토그래퍼

    입력2016-04-04 16: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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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과 ‘남부군’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경사 앞 ‘영화 남부군 촬영지’ 입석(立石)은 다소 뜻밖으로 느껴진다. 문득, 지금 우리 역사는 미완의 진행형이며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연재를 시작하면서 우리(나와 포토그래퍼)의 ‘로망’은 지리산이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을 생각하며 지리산을 종주하는 것, 노고단을 오르고 천왕봉까지 다녀오는 것. 둘 다 그렇게, 마음 단단히 먹고 다녀오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늘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엄두를 못 냈다는 말이 더 옳다. 지리산 종주?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차로 움직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을 그런 방식으로 다녀오면 안 될 것 같았다. 영화 속 안성기처럼, 곧  ‘빨치산(partisan)’처럼, 마치 보급투쟁을 하듯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걷고, 오르고, 누벼야 할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그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욕망일 뿐이었다. 도시의 찌든 삶에 거의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나 같은 오랜 당뇨 환자라면 절대 피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리산행은 늘 막바지에 와서 다음으로 미뤄지곤 했다.



    찬란한 것은 한순간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 ‘남부군’이 꼭 지리산에서 찍힌 것이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됐다. 반드시 지리산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남부군’을 더 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급히 포항으로 발걸음을 향한 것은 그 때문이다.

    포항을 포항이구나 여기게 하는 건 일출이다. 늦은 저녁 포항에 도착해 그래도 밤을 그냥 넘기기는 맹숭맹숭하다며 과메기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고 잠들었다가 약간의 갈증이 느껴진 게 다행이었다. 침대 밑에 뒹굴던 페트병의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커튼을 걷었을 때 마침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태양은 매일같이 떠오르고 그 과정도 그리 짧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절정의 순간은 딱 한순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바닷속을 힘들게 헤집고 나오는 듯, 작은 불덩이가 바다를 조금씩 붉게 물들인다. 마치 엄마 배 속을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바다는 엄마의 자궁이고 양수이며 태양은 갓난아기가 된다. 그러다 태양은 곧 작은 아이가 되고, 또 조금 있다가는 청소년으로 성장하더니 어느 순간 확 태양으로 커져 사위에 빛을 산개하며 사라져버린다. 일출은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생도 저렇게 짧은 시간에 한 번 폈다가 지는 것이다. 찬란한 순간은 단 몇 초간이다.

    그러니 아웅다웅하며 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늘 그걸 잊고 살아간다는 게 문제다. 지난밤에도 아웅다웅했다. 포항에서 만난 이들과의 술자리. 얼마 안 남은 총선이 화두가 됐고, 정치적 이견(異見)이 술상 위를 떠다녔다. 포항은 전통적으로 여권이 장악한 공간이고 보수주의의 철옹성 같은 느낌이다. 오히려 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박’ ‘친박’ ‘비박’이니 하는 동네는 여기와 달리 역설적으로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데 포항은 ‘몰표’의 동네 같다. 그래도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영화가 취향이듯 정치도 취향이니까. 어떤 영화를 좋아하든, 어떤 당파를 좋아하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사달은 박유하 사관(史觀) 논쟁에서 터졌다. 박유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친일사관을 대변하는 위치에 선 듯한 사학자다. 술자리 대화는 현 정부가 한일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해 할 만큼 했냐, 그렇지 않냐에 대한 얘기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태도의 문제로까지 번졌다. 누군가가 박유하 교수를 지지한다 했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황급하게 술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 것이 취기가 급속히 퍼지기 직전의 기억이었다.



    ‘친북·종북 영화감독’

    돌이켜보니 박유하와 그녀의 이즘(ism)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영화 ‘귀향’을 어떻게 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위안부 여성들의 비극에는 동정심을 느껴도 역시 ‘자발적 동원’이라는 이론에 대해서는 고집을 버리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한쪽에서 권력을 잡으면, 그것이 어느 쪽이든, 그 생각을 뿌리째 바꾸겠다며 ‘집단의 폭력’을 행사하는 법이다.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에서 보듯이.

     6·25전쟁 직후 북한 김일성 정권이 남로당을 숙청한 것도 한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사상을 개조하겠다, 아니 개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일념 때문이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다른 대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북한은 잘 배우지 못했으며 지금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건 우리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인데 5·17 군사정권(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통폐합하고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한 것도 ‘한 가지 생각’으로만 일치하기를 바라는 그릇되고 모자란 욕망 때문이었다.

    일명 ‘빨치산 영화’, ‘빨갱이 영화’라는 ‘남부군’ 때문에 포항에 온 터였다. 여기서 박유하 논쟁을 벌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건 기이한 조화라는 느낌을 줬다. 역사는 청산되지 않았고, 그 청산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북한과 청산을 포기하다시피 한 남한은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항의 술자리조차 그 엄혹한 역사의 현실을 알려준 셈이다.

    1990년 정지영 감독이 만든 ‘남부군’은 지리산 빨치산 얘기인 척하지만 사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쟁의 아픔과 그 무의미함을 토로한, 무엇보다 분단의 비극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꽤나 지식인다운 영화다. 저쪽의 사상과 표현 기법으로 얘기하면 일종의 프티 부르주아 영화다. 김정은 체제의 지금이든 예전의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서든 북한 정권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영화다. 오히려 그쪽 식으로 강력한 자아비판을 요구하는 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 영화부터 해서 ‘정지영’ 하면 마치 ‘친북’ ‘종북’ 영화감독처럼 치부했다. 무식과 편견이 빚어낸 아이러니다. 작품을 오독(誤讀)한 것이다.

    ‘남부군’의 주인공 이태(안성기)는 원래 북한 기자다. 기자는 전쟁이 일어나면 각각의 전투 상황을 알리고 기록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입대를 자처한다. 이태는 조선중앙통신 기자로 조선 노동당 유격대에 들어와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엔 종군기자였으나 뒤엔 펜 대신, 아니 펜과 함께 총을 든다. 전황(戰況)은 순간순간 뒤바뀌고 이태 기자는 어느덧 남부군으로 재편돼 부대를 좇아 지리산까지 들어간다. 전쟁이 휴전 국면으로 전환되자 남부군은 남북 모두로부터 버림받는다. 북한은 이들을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남한이 이들을 토벌 대상으로 삼는 것을 방치한다. 그들은 전쟁포로가 될 수조차 없다. 남부군은 혁명군이 아니라 오합지졸의 무장괴뢰로 전락한다.



    ‘자기 안의 파시즘’

    전쟁은 모두를 괴물로 변하게 만들지만, 이태와 이태의 ‘무리’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끝까지 노력한다. ‘남부군’이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남부군’에 대한 평가가 이념적 태도에 따라 다를지언정, 영화 속 인물들이 끝까지 분투하려 한 것은 신념에 대한 얘기였다. 인간이 그래도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이념을 어찌 됐든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인본주의에 입각하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태도의 문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지다. ‘남부군’은 바로 그 ‘의지의 결정론’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90년을 생각하면 다소 뜻밖이란 생각이 든다. 노태우 정부 시절, 여전히 군사독재의 그림자가 역력하던 시절이다. 1987년 6·10민주화운동으로 정권이 유화적 제스처를 쓰던 때였으나 아직은 억압의 잔재가 꽤나 두텁던 때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로 불리던 때, 제주 4·3이나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도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던 때다.

    그럴 때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을 들고 나왔다. 사회가 아주 조금, 비죽이 그 틈을 보일 때 이 뾰족한 영화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정지영 감독과 함께 장선우 감독이 있다. 정지영과 장선우는 ‘남부군’의 시나리오를 같이 썼다. 영화는 닫혀 있는 사회를 여는 기능을 한다. ‘남부군’이 바로 그때 그 일을 해냈다.

    결코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정지영이 가격(加擊)하고 싶어 한 것은 우리 사회가 가진 ‘자기 안의 파시즘’, 곧 레드 콤플렉스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태로 하여금 끝까지 빨치산으로 남게 하는 건 감독의 그런 생각과 의지다. 영화 ‘남부군’은, 종래에는 빨치산도 역사 속에 스러져 간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임을, 궁극적으로 그들 역시 전쟁과 이념의 희생자임을, 그래서 우리와 그들은 사실 같은 ‘인간’임을 보여준다.   

    1990년이라는 시기는 한국 영화가 자본의 측면에서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나 완숙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때가 못 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경북 포항과 전북 순창을 잇는 대장정 로케이션을 비롯해 당시로서는 큰돈인 14억 원이라는 제작비, 무엇보다 수많은 캐릭터를 ‘출동’시킨, 말 그대로 대작 중의 대작이다.

    이태를 비롯해서 골수 빨치산 김희숙(이혜영)과 전쟁 중에 ‘시(詩) 나부랭이’를 읊조리는 로맨티시스트 김영(최민수), 이태와 사랑에 빠지는 여인 박민자(최진실), 빨치산 부대를 따라다니는 아이(임창정)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당시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역작의 흔적이다.


    드라마틱한 다큐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실제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많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지리산에 몰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 내용처럼 매일매일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을 것이며, 낮과 밤을 반복해서 산속 깊은 곳을 골라 움직이고 이동했을 것이다. ‘남부군’이 놀라운 것은 그 과정을 가능한 한 불필요한 윤색 없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마치 기록물처럼 리얼하게 구성해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에피소드별로 툭툭 끊기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점이 오히려 사실적 생활의 리듬으로 체감된다. 전쟁의 한복판이 바로 저런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특별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드라마틱한 사건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 이후 상당 부분 채색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때 현실에선 때론 무덤덤하게, 마치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고 치러졌을 것이다. ‘남부군’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 역사의 한 장을 그렇게 써나갔다. 이 영화를 보면 정지영 감독이 ‘블랙잭’ 등 장르영화를 거쳐 무려 22년 만에 만든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의 에지(edge)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수 있게 된다.

    ‘남부군’에서 가장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은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빨치산 대원들이 남녀 모두 옷을 훌렁훌렁 벗고 목욕하는 신이다. 모두들 더럽게 때가 타 있던 터였고 앞뒤 몇 시간쯤은 가혹한 전투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설정이었다. 그래서 관객들도 한숨 돌리고 싶던 차였다. 전쟁에도 쉴 틈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남부군’ 하면 이 장면이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포항을 간 이유는 바로 그 계곡을 찾아서였다. 보경사 위쪽으로 난 깊은 계곡길, 12폭포가 바로 영화 속 배경이다. 몰랐을 때는, 이런 장면 정도라면 전남 구례의 천은사나 화엄사 주변 어느 계곡에서 찍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가 지리산 밑자락이니까. ‘남부군’은 지리산 영화니까. 그러나 한국에 보경사 12폭포만한 계곡이 또 있겠나 싶다. 영화 속 목욕 신은 대대적인 인원이 투입되는 몹신(mob scene)이라 넓고 깊은 계곡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부군’이 포항에까지 온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보경사 12폭포의 추체험  

    보경사는 보경사로 유명한 게 아니라 보경사 12폭포로 유명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현지에 가서 보면 자연스럽게 든다. 12폭포는 보경사 상류 쪽으로 내연사 기슭에 펼쳐져 있다. 보경사에서 12폭포까지는 2km라지만 체감으로는 훨씬 더 길다. 계곡인 만큼 길이 꽤나 거칠고, 많이도 구부러져 있으며,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걷다 보면 노곤함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처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쌍생폭포 등 12개 폭포와 절경은 몸과 달리 정신을 각성하게 만든다.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든다. 포토그래퍼와 따로, 쉴 새 없이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찰칵찰칵 소리 내 찍다가 어느새 슬며시 옷 안으로 집어넣게 만든다. 그림을 훔치는 기분이랄까, 기이한 죄의식 같은 것. 적막 속에 들리는 폭포소리의 가락과 리듬을 깨뜨려선 안 될 것 같다.

    이 안으로 정지영 감독의 주연배우들, 조연배우들, 엑스트라들, 100명이 넘었을 스태프가 들어왔을 것이다. 제작부와 연출부는 무거운 35mm 카메라 장비를 나눠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곡을 타고 왔을 것이다. 정 감독은 ‘남부군’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역사 속 남부군의 행동을 추체험(追體驗)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1950년대의 남부군 그대로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12폭포 중간 어디쯤에선가 카메라 속에 담길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스태프들까지 모두 옷을 훌훌 벗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머뭇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정 감독 스스로 솔선수범해 벗었다고 한다. 모두들 그렇게 혼연일체가 됐을 것이다.



    포항의 理想, 영화의 理想

    영화 때문일까. 보경사 12폭포는 결국 이상한 추체험을 하게 한다. 그건 영화 ‘남부군’의 체험을 넘어 역사 속 ‘남부군’의 심경으로까지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보경사 12폭포는 그 역사적 내면으로 안내하는 길이다. 그 길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이념의 분쟁 따위가 다 부질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수많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워야만 했던가. 무엇 때문에 아직도 이렇게 싸워야만 하는 걸까.

    보경사 가는 길목에 칠포리 해수욕장을 들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 취재여행은 워낙 주마간산 격이라 느긋하게 즐길 여유가 없다. 목적지를 정하고 열심히 운전해 가서는 부리나케 사진을 찍고 일몰 전에 철수하는 게 대체적인 일정이다. 한눈을 팔지 않아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한눈을 팔지 않으면 도무지 길을 다니는 맛이 나지 않는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법이다. 좀 즐기자고 일하는 법이다.

    그래서 보경사로 가다가 일탈을 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으며, 더 솔직하게는 포항의 바다를 근접 커트로 찍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칠포리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겨울 바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적이 완전히 끊긴 모래사장을 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해변은 길고 모래는 부드러웠다. 바람은 많이 차갑지만 신발을 벗고 모래 속에 발을 묻고 싶게 만들 정도였다.

    해변 저 끝에는 검은 자가용이 한 대 서 있는데 너무나 수상해서 우리 둘 다 되도록이면 그쪽으로는 가지 않기로 했다. 고즈넉한 겨울 바다에서 어떤 뜨거운 연인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서다. 남의 사랑에 재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 나라도, 혹은 그 누구라도 이 찬바람의 해변가에서 차 안을 두 사람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만든 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너무나 청량해서 수평선만 아니면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되는 푸르디푸른 지점을 마주 보며 ‘함께’ 있다면 방해해선 안 될 터. 어쨌든 사랑은 아름다운 거니까.

    칠포리 바다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 나 역시 다시 돌아오리라. 따뜻한 사람의 따뜻한 손을 잡고 이 해안을 걸어가리라. 여름보다는 겨울에 다시 찾아오리라. 그래서 이 바다를 독차지하리라. 그때 그 모래사장에 남긴 발자국이 아직 남아 있을 것 같은 미련의 감정이 드는 건, 한겨울 칠포리의 고요함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분위기를 깬 건 사진을 찍던 친구다. “우리 이제 영일만 가요?” 내가 답했다. “영일만도 찍어야 할까?” 다시 답이 돌아왔다. “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영일만 친구는 찍고 가야죠!” 그가 찍고 간다는 게 사진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어리둥절했다.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가 바로 이곳 친구라는 걸 새삼 깨달아서 웃음이 났다. 그에게 물었다. “최백호 노래를 찾아서 들을까?” 단박에 대답이 돌아왔다. “아, 쫌!”

    포항과 ‘남부군’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 특히 현실의 포항과 영화가 각각 구현하려던 이상은 전혀 다른 모양새일 수 있다. 보경사 앞에 있는 ‘영화 남부군 촬영지’라는 입석(立石)은 그래서 다소 뜻밖으로 느껴진다. 마치 지금의 우리 역사가 미완인 채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문득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후세대를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을 때가 아닌 것이다. 삶은 지속되지만 무겁고 어려운 일이 계속된다. 그것 참 힘든 노릇이 아닐 수 없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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