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리’ 대신 ‘쌍문동’
2006년 방영된 KBS ‘포도밭 그 사나이’는 농촌 드라마인데도 윤은혜, 오만석 같은 젊은 배우들을 출연시켜 호응을 얻었다. SBS ‘모던 파머’도 록밴드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는 설정으로 젊은 층 시청자를 겨냥했다. 2014년 방영된 tvN ‘황금거탑’은 농촌의 현실을 블랙 코미디로 그렸다. 그러나 ‘산 너머 남촌에는 시즌2’를 잇는 정규 편성 농촌 드라마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농촌 드라마는 왜 몰락했을까.
1980년대 농촌 드라마의 인기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가 진행 중이던 상황과 관련된다. 당시 젊은 층과 중장년층은 시골과 도시의 삶을 함께 겪었다. 유년 시절의 시골생활에 향수를 느꼈고, 이를 농촌 드라마 시청으로 대리 충족했다. 농촌 드라마의 시청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농촌을 떠나 자수성가에 성공한 대표적 인물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다. 그는 ‘전원일기’의 열렬한 팬이었고, 정치에 나선 뒤 최불암을 스카우트했다. 정주영 세대는 도시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았지만 마음만은 ‘양촌리’에 머물러 있었다.
2010년대 들어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거의 완료됐다. 이제 ‘농촌엔 노인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방송사와 광고주는 20~30대 시청자를 가장 중시한다. TV 광고를 보고 가장 활발하게 구매하는 연령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20~30대 중 상당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았다. 농촌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 관심이 덜하다. 시청률을 중시하는 방송사들은 시청자의 취향을 프로그램 편성에 반영한다. 농촌 드라마가 실종된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포도밭 그 사나이’는 농촌 드라마가 젊은 남녀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로 시청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지를 실험했다. 드라마 자체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하나의 드라마 장르로 발전하지 못하고 단발로 그치고 말았다.
tvN의 ‘응답하라 1988’은 케이블TV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눈에 띄는 것은 공간적 배경이다. ‘응답하라 1997’은 부산, ‘1994’는 서울 신촌, ‘1988’은 서울 쌍문동이 무대인데,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끝내 농촌에 닿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시리즈의 주인공, 시청자, 제작진 모두 1980년대 말~1990년대 이후 학번으로, 대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마음의 고향’은 농촌이 아니라 대도시의 골목길이다.
‘고향’에서 ‘여행지’로
대신 농촌은 TV 예능 프로그램 무대로 급부상했다. 시청률도 잘 나온다. KBS ‘1박2일’과 ‘슈퍼맨이 돌아왔다’, MBC ‘사남일녀’, SBS ‘불타는 청춘’과 ‘오 마이 베이비’, tvN ‘삼시세끼’에서 연예인 출연진은 농촌에서 가축 기르고, 밭 갈고, 요리하고, 좌충우돌하며 시청자를 사로잡았다.이들 프로그램에서 농촌은 ‘살던 고향’이 아니라 ‘지나가다 들러 체험하고 한 번쯤 망가지는 여행지’로 그려진다. 젊은 시청자들은 이런 농촌을 부담 없이 소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