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출 청소년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열 살 갓 넘은 초등학생들이 부모의 불화와 이혼, 가족 간 갈등, 방임과 학대에 지쳐 ‘집 탈출’을 시도한다.
- 가출상담창구 초등학생들의 하소연.
장녀인 은수는 집에서도 갈등을 겪는다. 사사건건 남동생을 감싸고돌며 편애하는 부모 때문에 동생과 더 자주 싸우게 되고 일방적으로 야단을 맞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은수는 “얼마 전엔 싸우다 동생 얼굴에 살짝 상처를 냈는데 나만 혼났다. 동생이 먼저 잘못했는데 엄마, 아빠는 왜 싸웠는지 묻지도 않았다. 나도 엄마,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데 만날 나만 혼낸다. 더는 학교에도 가기 싫고 집에 있고 싶지도 않다”며 가출 청소년 쉼터 상담사에게 하소연했다.
#2 한꺼번에 서너 군데 학원을 다니며 집과 학교, 학원밖에 모르는 초등학교 6학년 혜민(가명·13)은 부모의 기대가 너무 커 괴롭다. 부모는 혜민의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학원을 바꾸고, 주말에도 친구들과 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오빠는 혜민이 친구와 잠깐만 통화해도 “공부 안 하고 수다 떤다”고 엄마에게 일러바쳐 야단 맞게 한다. 학교와 집이 너무 답답해서 부모를 조른 끝에 발레 학원에 다니게 됐지만, 엄마가 “성적 떨어진다, 학원 끊어라”고 하자 큰 상처를 받았다. 혜민은 자신이 “공부하는 기계 같다”며 학교와 집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채팅을 통해 은수와 상담한 청소년 일시쉼터 상담 전문가는 “또래 아이끼리는 공감대가 끈끈해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비슷한 고민을 가진 아이나 가출한 또래와 연결되면 은수 같은 아이는 실제로 가출을 감행할 위험이 매우 높다”고 했다. 다행히 은수와 혜민은 청소년 쉼터 전문가와 상담한 뒤 가출 대신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기로 했다.
낮아지는 가출 연령
부모의 불화와 이혼, 가족 간 갈등, 방임과 학대 등을 이유로 집을 ‘탈출’해 거리를 떠도는 가출 청소년은 한 해 20만 명을 헤아린다. 주 연령층은 10대 중후반의 중·고교생. 하지만 최근 가출 청소년 관련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우려하는 점이 있다. 가출을 감행하는 아이들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이다.청소년 일시쉼터 ‘한울타리’의 성태봉 소장은 “요즘은 중학교 1, 2학년 때 최초 가출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가출을 고민하는 시기도 빨라져 최근엔 10~13세 초등학생의 가출 고민 사례가 급격히 늘었다. 이 아이들은 이미 가출한 아이들이 가출 전에 가졌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고 전한다.
여성가족부의 ‘2015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4년까지 한 번 이상 가출을 경험한 중·고교생은 11.0%. 가출 원인은 가족 간 갈등이 67.8%로 가장 많았고, 9.5%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6.1%는 가출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공부에 대한 부담감(3.3%),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3.0%), 가정 경제 형편이 어려워서(0.6%) 가출한 경우도 있다.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들이 가출을 고민하는 이유가 청소년의 가출 원인과 유사한지 알아보기 위해 초등학생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포털 사이트 지식·정보 교류 게시판에 검색어로 ‘가출’을 입력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글이 떴다. 그중 10~13세 초등학생이 올린 글을 추리자 10건에 한두 건 꼴이었다. 최근 일주일간 아이들이 올린 가출 고민 글만 16건이었다.
‘사이버 아웃리치’ 확대
올해 중학교에 가는 여학생이에요. 지난번엔 엄마가 모임에 갔다가 조금 늦게 들어왔다고 아빠가 막 뭐라 하셔서 두 분이 엄청 싸우셨어요. 오늘은 제 생일인데 엄마, 아빠는 관심도 없고 또 싸우셨어요. 요새 두 분이 너무 자주 싸워요. 제가 무서워서 울면 아빠는 엄하게 야단치세요. 싸움을 말리면 “나가라”며 혼을 내고요. 그럴 때마다 진짜 집에 있기 싫고 그냥 가출하고 싶어요. 자살 생각도 여러 번 했어요.오늘 학교 끝나고 학원 가기 전에 친구 집에 잠깐 가서 숙제하려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안 된대요. 학원 끝나고 집에 와서 공부하다가 저녁 먹고 잠깐 동영상 보면서 쉬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일 시험인데 뭐하느냐”고 화내면서 “쌍○”이라 욕하고 머리채를 확 잡아 이리저리 흔들고 막 때렸어요. 솔직히 그 정도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늘 있던 일이라 예상했어요. 근데 이번엔 “차라리 낳지 말고 배 속에 있을 때 없애버릴 걸 그랬다. 그냥 집 나가서 뒈져라”고 해서 엄청 충격받았어요. 가출해도 찾지 않을 거래요. 가출할까, 가위로 자살할까 생각했어요. 전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이런 생각까지 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부모가 다른 형제들과 차별해서 가출을 고민하는 아이도 많았다. 부모의 편애는 실제 가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2월 초 대구시 남구 대명동 지하철역 앞에서 엄마, 동생과 외출에 나선 초등학교 4학년 A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안 엄마는 애타게 아이를 찾다 실패하자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얼마 후 남대명파출소 정성오 경사는 자동차로 20분 거리인 달서구 유천동에서 길을 헤매던 A군을 발견하고 다가가 머리를 껴안았다. “엄마가 너를 애타게 찾고 있다”며 다독거리는 정 경사의 품에 안긴 A군은 눈물을 떨궜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고 위하는 것 같아 설움이 폭발한 A군의 가출 소동은 다행히 몇 시간 만에 끝났다.
최근 1~2년 새 인터넷과 SNS를 통해 초등학생의 SOS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가출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도와달라”는 아이들의 절절한 호소가 넘쳐난다. 이에 따라 지금껏 가출 청소년 보호에 주로 힘써온 청소년 쉼터 중 서울과 수도권 중심의 일시·이동쉼터 일부에선 가출을 고민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가출 예방에 진력하고 있다. 오프라인 중심의 ‘현장 아웃리치(outreach)’를 지난해부터는 사이버 공간으로까지 확대한 것. 현장 아웃리치는 가출 청소년이 있는 곳으로 전문가들이 직접 찾아가 상담하고 쉼터 입소를 권유하거나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등의 활동을 말한다.
현장 아웃리치가 이미 가출한 청소년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면 인터넷과 SNS 채팅, 쪽지 보내기 등을 이용해 이뤄지는 사이버 아웃리치는 가출을 고민하는 아동과 청소년을 조기에 발견해 가출을 사전에 차단하고 예방하는 기능을 한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청소년 이동쉼터 ‘너를위한작은별B-612’는 지난해 3월 사이버 아웃리치를 시작했다. 12월까지 전체 상담건수는 ‘미응답’과 ‘장난성’을 제외하고 1013건으로 집계됐다. 가출 76%, 자살 28%, 가정 문제 19%, 성 문제 상담 2%의 순이었다. 익명성을 전제로 한 사이버 아웃리치의 특성상 나이나 이름 등 구체적인 개인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워 초등학생 상담 사례에 대한 정확한 집계를 내긴 어렵다.
방임, 무관심도 원인
청소년 일시쉼터를 운영하는 강북청소년드림센터는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사이버 아웃리치에 주력해왔다. 올해 1월까지 3개월여 동안 상담건수는 492건. 김은영 센터장은 “가출을 예방하려면 다양한 고민으로 가출 충동을 느끼는 아이들을 24시간 폭넓게 접촉해 조기 발견하고 쉼터와 기관, 전문가가 개입하는 게 중요한데, 그 방편 중 하나가 사이버 아웃리치다. 가출 예방이 절실해짐에 따라 사이버 아웃리치 비중도 점점 높아진다”고 했다.지난해 9월부터 사이버 아웃리치를 시작한 청소년 일시쉼터 한울타리가 12월까지 상담한 건수는 157건이다. 올해는 1월 한 달에만 115건이 폭주했다. 사이버 아웃리치를 총괄하는 장한성 팀장은 이렇게 전했다.
“전체 상담건수 중 초등학생 비율이 10~15%다. 그들과 채팅 상담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고민이 ‘부모와 대화가 안 된다’ ‘공부와 일상생활에서 학교와 부모의 수동적이고 강요된 생활이 힘들다’ ‘통금시간 등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답답하다’는 얘기다. 맞벌이 부모, 한부모 가정, 조손가정이 늘고 형제자매도 많지 않다 보니 학원이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어 혼자 외롭고 심심하고 함께 놀 친구들도 없는 아이도 많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4 청소년 종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9~12세 아동 876명 중 35.1%가 자신의 고민에 대해 부모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방과 후 거의 매일 집에 혼자 있다는 아동이 10.8%에 달했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늦게 들어와도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아동도 5.7%였다.
전문가들은 꼭 아동 학대가 아니더라도 일로 바쁜 부모의 무관심과 방임이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전북 전주시에서 친구들과 놀려고 집을 나온 12세 여학생이 가출 사흘 만에 경찰의 도움으로 귀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출 신고를 받고 현장 출동에 나서 아이를 발견한 경찰관은 “전주 시내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를 발견했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처음엔 거짓 이름을 대면서 말을 안 하려고 했다. 혹시 가정에 문제가 있나 해서 캐물었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방학 중이라 친구들과 노느라 집에 안 들어간 것이었다”고 전했다.
‘가출 청소년 예비군’
가출 후 일정 시간이 지나 이미 거리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가정으로 복귀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먹고 잠잘 곳을 얻기 위해 절도, 강도, 성폭행, 성매매 등 각종 범죄로 빠져들 위험성도 커진다.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이 늘고 가출이 장기화하면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도 커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기존 가출 청소년 보호정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전에 가출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다.“문제 가정을 ‘탈출’한 아이들을 무조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제적 빈곤과 방임, 학대를 이유로 가출한 아이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면 경제적 지원 등을 통해 가출 원인이 된 가정환경을 바꿔줘야 한다. 올바른 자녀 양육에 관한 부모 교육도 지원해야 한다. 그럼에도 가정 복귀가 어려운 아이들은 대체가정, 대체시설을 만들어 거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백혜정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우리는 그간의 실적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 서울시로부터 특별예산을 지원받아 사이버 아웃리치를 하지만, 대다수 쉼터는 자체 예산으로 한다. 사업의 실효성과 지속성을 높이려면 중앙아동학대예방센터처럼 중앙센터를 만들어 사업을 체계적으로 조정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예산과 전문인력의 한계로 자원이 풍부하지 않으므로 중앙센터를 중심으로 사이버 아웃리치를 전개해야 한다.” (김기남 ‘너를위한작은별B-612’ 소장)
강북청소년드림센터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가출 예방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가출 후 겪는 고생과 거리의 위험성 등 현실적 문제를 알려주고 거리에 비해 집안이 얼마나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인지 일깨워준다.
“지난해 강북구 6개 중학교를 대상으로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를 한 자료가 있다. 1000여 명의 학생 중 8.2%가 가출 경험이 있고 ‘어떤 도움이 있었으면 가출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부모나 선생님, 친구가 있었다면 가출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 외에 어른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길 원한다. 그에 관한 교육을 부모, 교사, 또래아이들을 상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은영 센터장)
“사이버 아웃리치는 위기아동 발견 즉시 따로 시간을 잡아 만나거나 하지 않고 바로 개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지만 대면 상담에 비해 까다롭고 한계가 있다. 채팅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들의 경계심이 강해 성급하게 깊이 파고들려고 하거나 나이와 이름 등을 물으면 바로 대화를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채팅하다 말고 답이 없으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일도 생긴다. 여러 가지 고민을 숨긴 채 자기가 필요로 하는 가출 정보만 얻고 일방적으로 채팅을 중단하기도 한다. 사이버 아웃리치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 (장한성 팀장)
그동안 나온 청소년 실태조사 결과와 가출 관련 통계에 비춰볼 때 현재 가출을 고민하는 초등학생들을 방치할 경우 1~2년만 지나면 가출 청소년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가출 청소년 예비군’인 초등학생들이 보내는 SOS에 귀 기울여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