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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年 역사산책

문무겸전 르네상스人 ‘계몽의 씨앗’ 뿌리다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

  • 고승철 | 소설가 songcheer@naver.com

문무겸전 르네상스人 ‘계몽의 씨앗’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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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 독립신문이오! 한 장에 한 푼씩이오!” “이것이 신문이라는 것인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그의 자취는 ‘신문의 날’(4월 7일)과 서대문 독립공원의 서재필 동상, 전남 보성군의 서재필기념공원 등에 남아 있다.
꼭120년 전인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올해는 독립신문 창간 2주갑(120년)을 맞는 해여서 이 신문의 뿌리와 열매를 살피는 일이 더욱 뜻깊다 하겠다.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파란만장한 삶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그는 한국 근대사에서 보기 드문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르네상스인’이었다. 격동의 구한말에 탄생한 ‘독립신문’이란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당시의 ‘초식동물형’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맹수형’ 야욕을 파악할 수 있다. 



軍, 혁명가, 의사

서재필은 김옥균(金玉均·1851~ 1894)이 우두머리인 청년 개화파의 막내였다. 서울 북촌의  명문가 자제인 이들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켜 케케묵은 나라를 단숨에 일본식으로 근대화하려 했다. 청년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박규수(朴珪壽·1807~1877)에게서 국제정세를 읽는 눈을 배웠고 일본의 노회한 경세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만나면서 급진적인 정변을 꿈꾼다.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일본의 발전상에 놀랐고 홍영식과 서광범은 미국에 가서 견문을 넓혔다.

18세 소년 때 문과에 급제한 서재필은 일본의 도야마 군사학교에 유학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근대식 군사학을 배운다. 귀국한 뒤 신식 군사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수구파의 견제로 뜻이 좌절된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청년 5인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벌였다. 이때 서재필의 역할은 군사 책임자였다. 수구파 대신들을 척살한 이들은 국왕 고종을 납치하다시피 해 정권을 장악한 듯했다. 이들은 서둘러 개혁정책을 발표했으나 사흘 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된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지지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은 채 수백 명의 일본군 무력만 믿은 게 패인이었다.



홍영식은 청군에게 처단되고 나머지 4인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실패로 역적으로 몰린 서재필과 서광범은 조선 조정이 보낸 자객들의 보복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서재필은 독지가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육군박물관에서 일하며 의과대학에 다닌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된다.

10여 년 세월이 흘러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다. 1894년 조선 정권을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갑오개혁’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박영효를 중용한다. 미국에 망명 중인 서재필과 서광범에 대해서도 사면령이 내려진다. 서광범은 귀국해 법부대신(법무장관)이 된다.

서재필도 1895년 12월 25일 귀국해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1856~1914)을 만나 입각 제의를 받는다. 서재필은 이를 사양하고 신문을 만들어 국민을 계몽하고 싶다고 말한다. 서양 선진국들을 둘러본 유길준은 신문의 중요성을 절감했기에 서재필을 돕기로 약속했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신문사 창업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국고에서 대주기로 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인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유길준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서재필의 계획은 무산되는 듯했으나 새로 출범한 박정양 내각도 신문이 필요하다고 보고 서재필을 지원하기로 했다.



입각 제의 사양하고 창간 작업

조선 조정은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 서재필의 개인 생계비와 가옥 임차비로 1400원을 내놓았다. 서재필은 이 자금으로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왔다. 소달구지에 인쇄기를 싣고 서울로 운반해 와 신문사에 설치했으나 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재필이 지침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작동법을 익혔다. 채자(採字), 조판 등 인쇄 기초 작업도 아는 이가 없어 서재필이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체득했다.

신문은 한글과 영문으로 함께 발행하기로 했다. 4개 면으로 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의 3개 면은 한글로, 나머지 1개 면은 영문으로 구성했다. 영문판 교정은 외국인 학교 영어교사 호머 헐버트에게 맡겼다. 그는 1886년 조선에 온 이후 여러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헐버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바 있다. 서재필은 창간호 1면 머리에 실을 논설을 작성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원고를 완성했다.

독립신문 창간호를 내면서 우리는 이 신문의 주장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신문은, 첫째로, 불편부당한 독립된 신문이므로 어떤 계급이나 파벌 또는 정당에 편중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고 공평하게 대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 신문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조선이라 함은 서울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 사람들도 의미한다. 우리는 백성과 정부 사이의 올바른 이해가 양편에 모두 이익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이 양자 사이의 사실적인 정보의 원천 역할을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셋째로, 이 신문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구독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신문 값을 최소로 정하고 한자 대신 한글을 쓰기로 하였다. 우리 백성들이 배우기 쉬울 뿐 아니라 세계 각국 글자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한글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우리는 사실만을 보도할 것이다. 즉 관직이나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그들의 모든 선행과 비행을 알리는 동시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가 있다면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옹호할 것이다. 신문에 영문판도 첨부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온 백성과 외국인들에게 모두 유익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 논설을 끝내기 전에 대군주 폐하께 송덕하고 만세를 부르노라.



1부 독자 200명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는 발행되자마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창간호 300부가 사흘 사이에 매진됐다. 지방에는 미처 보급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신문이라는 것인가?”

백성 대다수는 신문이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할 때였다. 호기심에서 사보는 이도 적잖았다. 정기구독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발행 부수를 1000부로 늘렸다. 처음부터 인기를 끈 것은 무엇보다 신문 값이 싸다는 점이다. 1부에 1전이었다.

독립신문은 읽기 쉬운 한글로 만들어졌기에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신문을 산 사람은 다 읽은 다음 친지와 이웃들이 읽도록 건네줬다. 이렇게 돌려 읽기를 하므로 신문 1부의 실제 독자는 200명가량으로 추산됐다.

손승용 기자는 서울시내 각 상점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그날의 물가시세를 조사해 신문에 게재했다. 다른 기자는 관청을 출입하면서 인사발령 사항 등 관청 정보를 적어왔다. 기자 명칭은 처음엔 ‘보고원’으로 썼다가 ‘탐보원’, ‘탐보인’, ‘기자’ 등으로 바꾸었다. 독립신문의 논설은 거의 서재필이 직접 집필했다. 훗날 한글학자가 된 주시경도 독립신문에 상근하면서 가끔 논설을 썼다.

창간 당시 신문 값은 가판의 경우 동전 한 푼(1전), 정기구독이면 월 12전, 연 1원 30전이었다. 1장의 제작비가 1전 6리였으므로 1장에 6리의 적자가 생긴다. 광고 수입으로 이 적자를 메웠다. 가판 판매자에게는 20%의 이윤을 줬다. 100장을 가져가는 가판 판매자에게 80장의 대금만 받는 방식이다. 서재필은 가판 판매자들을 불러 신문 파는 요령을 가르쳤다.



“신문, 독립신문이오! 한 장에 한 푼씩이오! 이렇게 크게 외치면서 팔란 말이오. 여러 사람 앞이라 해서 쑥스러워 해서는 아니 되오.”

인쇄공 8명을 채용했으나 이들은 툭하면 게으름을 피웠다. 서재필이 나타나면 일하는 체하다가 돌아서면 곧바로 잡담을 나누거나 자기들끼리 장난을 쳤다. 낮잠 자는 것을 당연시하는 직공이 대부분이었다. 지각, 조퇴, 결근을 밥 먹듯 했다. 분초를 다퉈 제때 인쇄해야 하는데 이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서재필이 직접 인쇄기를 돌리는 때도 있었다. 

신문은 1주일에 3번, 화·목·토요일에 냈다. 논설, 광고, 물가시세, 관보, 외국 통신, 잡보 등을 실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개항 도시를 중심으로 일본계 신문이 발행됐다. 서울의 ‘한성신보’, 제물포의 ‘조선신보’는 일본 상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문이었다.

“일본계 신문만 보다가 독립신문을 보니 속이 후련하구먼!”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외교 사절들에게 영문판 독립신문은 조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민주주의, 공화제…. 독립신문에 이를 강조하기는 시기상조인 듯했다. 군주제 국가인 조선에서 공화제를 들먹였다가는 반역 혐의를 받을 게 아닌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체험한 서재필로서는 바람직한 정체(政體)가 공화제임은 확신하지만 바깥으로 드러낼 때는 에둘러 표현해야 했다.


“백성이 관찰사 뽑아야”

4월 12일 제3호의 논설에서는 충신과 역적에 대해 썼다. ‘국법에 기준을 두고 그 나라의 법률을 지키면 충신이고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역적이다’고 역설했다. 제4호 논설에서는 정치학이란 학문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 정치가는 근대 정치학을 배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가 바라건대 정부에 계신 이들은 나라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관찰사와 군수들을 자기들이 천거할 것이 아니라 각 지방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뽑게 하면 국민 간에 유익한 일이 있음을 불과 1, 2년 동안이면 알 것이다’면서 민간인에 의한 선거를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제5호 논설은 한술 더 떠 ‘관찰사와 군수는 임금이 백성에게 보내신 사신이며, 법을 지키는 백성에게는 종이다’라면서 관헌은 공복(公僕)에 불과함을 설명했다. 기존 관료들은 독립신문의 이런 논설에 대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부 관료들은 서재필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 무슨 해괴한 주장인가? 관찰사와 군수를 백성들이 뽑다니! 갑신정변 대역죄인 서재필은 여전히 역심(逆心)을 품은 위험한 인물이야.”

제7호에서는 여성 교육과 여성 인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논설을 실었다.

세상에 불쌍한 인생은 조선 여편네니, 우리가 오늘날 이 불쌍한 여편네들을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

여편네가 사나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나이들이 문명 개화가 못 되어 이치와 인정은 생각지 않고 다만 자기의 팔힘만 믿고 압제하려는 것이니, 어찌 야만에서 다름이 아니리오.

조선 부인네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넓어지면 부인의 권리가 사나이 권리와 같은 줄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부인네들께 전하오니, 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세워 사나이들보다 행실도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도 찾아라.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설에서 ‘집을 튼튼히 고친 후에 도배와 장판을 해야 한다’고 비유한 뒤 양복 입기와 단발을 촉구했다. 단발령이 유림들의 격렬한 반대로 유보된 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 무렵에 새로 학부대신이 된 신기선(申箕善)은 독립신문을 보면 분통이 터졌다. 그는 독립신문을 읽다가 벌떡 일어섰다.



독립신문 폐간 음모

“서재필, 그 자는 질서를 깨고 권력을 잡으려는 야심가 아닌가. 그가 주장하는 단발, 한글 쓰기, 양복 입기, 청국에 대한 조공(朝貢) 폐지 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부동항(不凍港)을 얻으려 조선 땅에 눈독을 올리던 러시아는 조선의 개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면 조선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조선이 갑오경장 이전의 구체제로 돌아가도록 부추겼다. 수구파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입지를 넓혀갔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행 이외에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건설하는 등 활동 보폭을 넓혀갔다. 러시아가 부산 앞바다 절영도를 조차(租借)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이를 통박하는 한편 대규모 민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만행을 규탄했다. 서재필은 러시아와 친러파 세력의 눈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친러파 정부는 서재필을 추방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일본도 이에 동조했다.

미국 공사 호러스 앨런도 서재필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6개월 속성 의료과정을 마치고 조선 땅에서 명의(名醫) 행세를 하던 앨런은 미국에서 정식으로 의과대학을 나온 서재필에게 콤플렉스를 느꼈다.

테러 위협까지 받은 서재필은 마침내 신문 발행 업무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1898년 5월 미국으로 떠났다. 이어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윤치호가 원산으로 떠나자 독립신문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손에 넘겨졌다. 그 후 1899년 6월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가 사장을 맡았으나 경영난에 빠져 결국 1899년 12월 4일 종간호를 내고 문을 닫았다.

독립신문은 참정권, 인권 등 민주주의 기본가치를 계몽했다. 또한 열강의 침략간섭 정책을 폭로해 민중이 독립정신을 갖는 데 기여했다. 한글을 보급하고 띄어쓰기를 최초로 실현하는 등 말글살이에도 눈에 띄게 공헌했다.



서재필과 이승만

물론 비판론도 없지 않다. 민영신문이라지만 국왕이 설립자금을 대줬으니 사실상 ‘어용(御用) 신문’ 또는 ‘관립 신문’이라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이런 지적이 맞는 측면도 있겠으나, 독립신문은 조선 조정을 비판하는 논조를 유지했고 특히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질타한 편이었다. 설립자 서재필에 대한 비판도 적잖다. 과도한 연봉을 챙겨갔느니, 서양인 행세를 하며 거들먹거렸느니 하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퇴임 때 받은 돈으로 유학생을 도왔고, 미국 시민권을 가졌기에 일본인, 러시아인, 중국인 등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당당한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귀국 초기 배재학당에서 이승만(李承晩·1875~1965)을 사제(師弟) 관계로 만난다. 배재학당 학생이던 이승만은 서재필의 강연을 듣고 넓은 세상에 대해 개안(開眼)한다. 1905년 7월 두 사람은 미국에서 다시 만난다.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서재필이 청원서를 작성해준다. 이후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서재필은 물심양면으로 이승만을 돕는다.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서재필과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인자유대회를 열었다. 개업의사로 활동하던 서재필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고 사무용품 판매 및 인쇄업체를 창업했다.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柳一韓·1894~1971)과 함께 식품회사를 경영하기도 한다.

광복 후인 1947년 7월 서재필은 미군정 고문 자격으로 귀국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서재필을 옹립하는 안(案)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고령에다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래도 이승만은 서재필의 행보를 주시하며 견제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몸져누웠으며 1951년 1·4 후퇴 소식에 충격을 받아 1월 5일 영면했다. 서재필의 자취는 ‘신문의 날’(4월 7일)과 서대문 독립공원의 서재필 동상, 전남 보성군의 서재필기념공원 등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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