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남은 詩는 뒤에 오는 자들의 몫

윤동주 평전 작가가 본 영화 ‘동주’

  • 송우혜 | 소설가 swhoo@daum.net

    입력2016-03-25 1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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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지금 윤동주 붐인가. 과거를 돌아보면 이 의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시대 상황이 어떠한가’에 따라 윤동주를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자세와 움직임이 달랐다. 하지만 이번 붐의 중심에는 영화 ‘동주’가 있다. 윤동주 평전 작가에게 영화 ‘동주’를 물었다.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식을 지닌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적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런 삶의 과정은 세계사라는 대지에 민족의 뿌리를 굳게 내리고 민족의 생존권을 쟁취하는 처절한 전투였다.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간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 중에 민족시인 윤동주가 있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온 이래, 그를 기리는 여러 장르의 작품이 나왔다. 시, 소설, 평전, 연극, 뮤지컬, 텔레비전의 다큐 프로그램…. 그러나 영화는 없었다.

    그의 옥사(獄死) 71주기인 올해, 드디어 그를 기리는 영화 ‘동주’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예상을 넘어선 호응,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매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실은 영화뿐이 아니다. 올초부터 ‘윤동주 시인 기리기’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TV 다큐 프로그램,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 신문과 잡지에서도 조명이 이어졌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의문을 드러낼 만도 하다. ‘왜 지금 갑자기 윤동주 붐인가.’



    시대의 민낯 드러내는 지표  

    이 의문은 과거를 돌아보면 쉽게 답할 수 있다. ‘시대 상황이 어떠한가’에 따라 윤동주를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자세와 움직임이 달랐던 것이다. 그건 윤동주가 지닌 캐릭터가 결정적 작용을 하는 반응 체계에 해당한다. 그가 워낙 청신하고 결백하고 곧은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기에, 험악하고 굴욕적이고 힘든 시대를 사는 이들일수록 더욱 그와 그의 시에 열광하며 그의 시를 통해 견딜 힘을 얻고 치유의 길을 찾았다. 그러나 시대 상황이 좋아지고 살기가 편안해지면 그와 그의 시를 찾는 움직임과 관심은 줄어들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어두운 현대사인 군사독재 시절에 많은 이가 그의 시를 찾았고 그의 시에서 힘을 얻었다. 그 시절 매스컴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을 묻는 설문조사를 자주 했는데, 으레 윤동주가 1위에 올라 ‘국민시인’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민주화 시기에 접어들어선 그와 그의 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우리 사회가, 특히 젊은이들이 윤동주와 그의 시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 사회가, 우리 젊은들이 처한 시대 상황이 무척 힘들다는 것, 삶은 팍팍하고 국제정세는 암울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어둡고 경제 상황도 어려워 고통받고 있음을 반영한다.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에 우리가 처한 시대의 민낯을 절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표가 된 영화 ‘동주’. 그 내용을 고찰해 장점 세 가지와 아쉬운 점 세 가지를 들어본다.

    장점 ①  영화 ‘동주’의 가장 큰 장점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장르인 영상매체로 윤동주라는 시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중·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고 국어시험에 대비해 분석하는 과정까지 거쳤기에 대부분의 국민에게 매우 익숙하다. 윤동주의 시 한두 구절 못 외우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그 시를 쓴 윤동주 본인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의 생애를 상세하게 추적한 평전이 나와 있긴 하지만,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요즘 추세 탓에 평전이 미치는 영향력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중적이고 사실적이고 즉물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상영시간 110분인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윤동주의 삶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영화 ‘동주’는 그 역할을 충분하게 해냈다. 다만 그의 삶에 대한 묘사에서 실제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끼어 있어 혼란을 유발하는 것이 유감 스럽다.

    장점 ②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자 친우이던 송몽규를 제대로 조명한 것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문학과 죽음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송몽규를 모르면 윤동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한집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을 수료할 때까지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연희전문 문과에도 함께 입학해 4년 동안 같이 공부한 뒤 나란히 일본에 유학했다.



    송몽규 없이 윤동주 없다

    송몽규는 18세이던 193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당선돼 윤동주의 문학 인생에 큰 자극을 줬다. 또한 그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느라 학업을 포기하고 집과 가족도 떠나 중국 남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관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군관학교는 중국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관련 정보가 일본에 모두 유출됐다. 그 결과 일본 정부의 항의로 학교는 폐쇄되고 학생들은 속속 일본 공안 당국에 체포됐다. 송몽규도 중국 제남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고 극심한 고초를 겪은 뒤 풀려났다. 송몽규의 국적이 만주국인 데다 중국에서 공부한 것을 일본 법률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서 풀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송몽규는 일경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단에 올라 철저하게 감시당했다.

    1943년 7월,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 도쿄 릿쿄(立敎)대학에 다니다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전학해 공부하던 윤동주가 ‘조선독립운동’ 혐의로 교토의 일경에게 체포됐다. 요시찰인 송몽규를 날카롭게 감시하던 일경의 감시망에 그와 어울린 윤동주도 걸려들어 함께 체포된 것이다.

    두 사람은 이때 체포된 후 징역살이를 하던 후쿠오카 감옥에서 나란히 옥사했다. 1945년 2월 윤동주에 이어 3월엔 송몽규도 사망했다. 윤동주가 처음 유학하던 릿쿄대학에 그대로 다녔다면 체포도, 옥사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삶에 송몽규가 미친 영향의 크기와 깊이가 새삼 가슴을 친다. 참으로 애절하다.



    윤동주는 알면서도 송몽규는 모르던 많은 ‘윤동주 팬’이 영화 ‘동주’ 덕분에 송몽규의 존재를 알게 됐다.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은 매우 인상적인 연기로 그를 묘사해냈다. 반가운 일이다.

    장점 ③  흑백 화면이다. 영화라는 장르가 세상에 등장한 이래 많은 흑백영화가 있었지만, 영화 ‘동주’의 흑백 화면은 특별하다. 화면이 이국 감옥에서 옥사한 젊은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해 이야기해가자 흑색은 천연색보다 더 강렬하고 다채로운 빛을 발산했고, 백색은 깊은 슬픔과 서러운 아픔과 청정한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어둡게 또는 환하게 드러냈다. 화면에 담고자 하는 이야기와 담는 방식이 잘 어울린 아주 행복한 만남이었다. ‘동주’를 흑백영화로 만든 제작진의 감각이 크게 빛났다.


    일어 시집, 영어 시집 출간?

    이번에는 아쉬운 세 가지를 짚어본다.

    단점 ①  윤동주 시인의 삶에 실재하지 않은 가상인물인 일본인 여대생 쿠미의 존재, 그리고 윤동주가 그녀의 도움을 받아 영어 시집을 내려고 준비하던 중에 쿠미와 함께 있던 자리에서 일경에 체포됐다는 설정이다.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부분이다. 이런 가당치 않은 허구는 맑고 고결한 이미지의 ‘국민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훼손하는 역효과를 부른다.

    이 대목에서 밝힐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영화 ‘동주’ 제작 초기에 제작진은 내게 시나리오 감수를 부탁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 일본인 여대생 쿠미의 존재와 윤 시인이 그녀의 도움으로 일본어 시집을 내려 했다는 설정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뺄 것을 요구했지만,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은 거부했다. 신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설정은 개인적인 사연과 관련돼 있었다. 신 감독은 20대 시절부터 영화감독을 꿈꾸고 영화계에 뛰어들었는데, ‘입봉’이 너무도 어려워 좌절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입봉’은 영화감독이 되려는 사람이 첫 영화를 제작, 상영하는 것을 뜻하는 영화계 용어다. 하도 좌절하다 보니 나중엔 ‘무슨 짓을 해서든 입봉해야겠다’는 마음까지 생기더라고 했다. 그는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조선어 시집을 내려다 실패한 윤동주 시인의 마음을 잘 안다”면서 “그가 일본어로라도 시집을 내기를 원했을 것이기에 그런 설정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전혀 가당치 않다”며 강경하게 반대하자 그는 일보 후퇴했다. 윤 시인이 일본어 시집이 아닌 영어 시집을 내려 했던 것으로 시나리오를 고친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반대해도 반응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겪은 험난한 입봉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던 그는 조선어 시집 발간에 실패한 윤동주와 자신을 일체화하는 심리 상태에 빠진 듯하다. 그래서 “쿠미와 그녀가 주도하는 시집 발간 부분을 빼지 않으면 영화에 송우혜가 감수했다는 말을 절대 집어넣으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손을 뗐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 ‘그나마 윤동주가 일본어 시집이 아닌 영어 시집을 내려고 한 것으로 고쳐진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실명 영화라 해서 그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관객이 적지 않은데, ‘윤동주가 일본어 시집을 내려고 노력했다’고 하면 그것도 사실로 받아들여 그가 지닌 당당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실망하기 십상일 것이다.



    가장 극적인 재판 장면 외면

    단점 ②  ‘시집’이 있어야 ‘시인’이다. 윤동주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시인이 됐다. 그러나 영화 ‘동주’는 그 부분을 그냥 넘겼다. 시집을 실제로 만든 당사자인 연희전문 입학 동기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 수행한 시집 출간 작업에 대해 침묵한 것이다.

    강처중과 정병욱이 윤동주 시집 출간에 기여한 공로는 절대적이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연전 졸업반 때 자신이 쓴 시 19편을 골라 묶은 필사본 자선(自選)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증정받은 뒤 광복을 맞을 때까지 어렵게 지켜냈다. 강처중은 윤동주가 자선시집을 묶은 뒤에 쓴 시 전부를 광복 때까지 소중히 보관했다. 두 사람은 각자 보관한 시들을 합쳐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인쇄본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전담했다.
    강처중과 정병욱이 없었다면 ‘시인 윤동주’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 ‘동주’는 실제의 그들 대신 허구 인물인 일본인 여대생 쿠미를 내세우고 그녀가 영어 시집 출간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만들었다. 별 의미도 없는 설정 대신, 실제로 유고 시집을 출간한 분들이 피를 토할 듯 뜨거운 우정으로 뭉친 시집 출간 작업을 화면에 담았으면 더욱 뜻깊었을 것이다.

    단점 ③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원인은 ‘조선독립운동’이다. 송몽규와 윤동주를 취조한 일본 특고경찰의 취조문서와 일본 재판소의 판결문을 보면 감동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일본 공안 당국과 사법 당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방법론을 개진했다. 그들은 재판정에서도 “조선민족이 독립하려면 조선문화를 사수(死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영화 ‘동주’는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재판 장면을 완전히 비켜갔다. 그들이 일본 재판정에 서서 일본 사법 당국을 향해 포효하는 장렬한 장면을 화면에 담았더라면 어땠을까. 후세인들에게 그 시대의 억압과 저항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실체를 생생하게 느끼는 귀한 시간을 경험하게 했을 것이다.
    시인은 가고 시는 남았다. 남은 시는 뒤에 오는 자들의 몫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에 따라 시를 읽는 자들의 삶의 풍경이 달라진다. 영화 ‘동주’가 흑백 외투를 입고 시인이 남긴 시의 대열 뒤를 따라간다. 그 또한 후세인들이 시인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방식의 하나여서 감동스럽다.

    송 우 혜



    ● 1947년 서울 출생
    ● 서울대 간호학과 중퇴, 한국신학대 신학과 졸업,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사학) 수료
    ●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한국문학 신인상, 삼성문예상 수상
    ● 저서 : ‘윤동주 평전’ ‘마지막 황태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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