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이 사람

“국민 대통합 위해 부안을 보듬어달라”

‘부안 사태’ 주역 김종규 군수의 호소

  • 이정훈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6-03-28 15: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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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폐장 유치하려다 ‘매향(賣鄕)군수’ 전락
    • 2014년 지방선거에서 8년 만에 군수 컴백
    • “국가 난제 해결 단초 제공한 부안 재평가해야”
    전북 군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새만금 방조제(33.9km)를 달려보기 위해서였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서해로 뻗은 이 방조제는 고군산군도의 신시도에서 꺾어져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로 들어간다. 방조제 양끝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군산 쪽엔 건물과 공장이 제법 있지만 부안 쪽은 그렇지 못하다.

    새만금 방조제 안엔 또 다른 방조제가 있다. 계화도를 잇는 계화 방조제다. 대일항쟁기인 1944년 착공한 이 방조제는 광복과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68년 완공됐다. 이 방조제로 생긴 땅이 부안군 계화면이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유명한 ‘계화미’다. 부안군 최북단이 계화면이고 남쪽 끝은 줄포면인데, 이곳은 하나같이 농산지다.




    ‘죽음’을 말하는 이들

    농업 말고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부안이 2003년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방폐장) 유치를 놓고 벌어진 이른바 ‘부안 사태’ 때문. 김종규 부안군수가 방폐장을 유치한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당시 정부는 방폐장 유치 지역에 3000억 원과 양성자가속기를 패키지로 주겠다고 했다. 김 군수는 이를 지역 발전의 기회로 봤다. ‘애국’도 생각했다. 그 이전에 정부는 굴업도와 안면도 등을 방폐장 후보지로 고려했으나, 그때마다 반대하는 단체들이 일어나 어려운 상황만 반복됐다. 이 때문에 방폐장은 최초 거론된 때로부터 17년이 지나도록 후보지를 정하지 못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원전은 폭발(수소폭발)할 수 있어도 방폐장은 폭발할 수 없다.



    방폐장의 안전성을 확신한 김 군수는 자신이 태어난 섬인 위도 주민들이 고민 끝에 동의하자 군의회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군의회는 동의하지 않았고 김 군수는 방폐장 유치를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의회 동의는 방폐장 유치 신청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주민들을 만나 지역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엄청난 반대세력이 몰려왔다. 온갖 시민단체와 반핵단체 사람들이 부안을 누볐다. 곳곳에 노란 깃발을 내건 그들은 확성기를 걸어놓고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위협에 주민들이 동요했다. 김 군수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국가에서 방폐장은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그것을 유치해 지역을 발전시키자. 우리도 국가에 기여하는 게 있어야 국가도 우리 지역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역부족이었다. ‘죽는다’는 위협에 적잖은 지역주민이 분연히 일어났다. 그의 뜻에 동조한 이들은 침묵했다. 정부도 침묵했다. 혼자서 전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2003년 9월 초 그는 추석 인사차 천년 고찰 내소사의 혜산스님을 찾아갔다. 반핵을 선택한 주민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왔다. 스님들은 “위험하니 뒷문으로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는 “매향노(賣鄕奴)도 아닌데 왜 뒷문으로 도망가느냐. 주민들께 설명하겠다”며 대중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말도 꺼내기 전에 돌팔매가 날아오더니 무수한 구타가 뒤따랐다.

    두개골이 함몰되고 늑골이 부러지며 폐까지 상해 사경에 빠진 그는 전북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은 후에야 겨우 깨어났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그는 ‘매향 군수’로 전락했다. 그를 거부한 사람들이 그에게 ‘매향’ 굴레를 씌운 것이다.

    부안은 그렇게 몸서리쳤다. 찬핵이 반핵에, 반핵이 찬핵에, 국가가 지방에, 지방이 국가에, 공권력이 주민에게, 주민이 공권력에 폭력을 가했다. 불탄 것은 건물과 경찰 차량만이 아니었다. 부안을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안 사랑도 타버렸다. 만인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가 부안을 점령했다.

    부안 사태는 반핵단체 주도로 주민투표를 해 방폐장 유치 거부를 결정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났다. 그때 김 군수의 진심을 알아준 이가 ‘무려’ 17%였다. 처절한 유혈 사태를 겪고도 투표자의 17%가 그를 지지했다. 그리고 반핵단체와 공권력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엄청난 공허가 밀려왔다. 그 공허를 ‘돌이킬 수 없는 억울함’이 채웠다. 감정적인 주민들은 그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매향노”라며 침을 뱉었다. 수십 년간 미움을 멀리하고 살아오던 농촌에 증오라는 독버섯이 자라났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돌아온 지방선거에 재출마했으나 2등으로 낙선했다. 지지율은 36%. 부안 사태 주민투표 때보다 두 배 넘게 올랐다. 4년 뒤 다시 치른 지방선거에선 38% 지지를 얻고 또 낙선했다. 무서운 업(業)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반핵과 찬핵으로 갈려 싸운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지역의 주인은 주민

    그러는 사이 방폐장 문제는 아주 쉽게 풀렸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방폐장을 유치하려 한 김 군수를 보며 ‘방폐장은 위험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게 첫째 이유다. 이러한 변화를 포착한 정부도 유연하게 이끌었다. ‘고준위를 뺀 중저준위 방폐장을 우선적으로 짓겠다’고 한 것. 주민투표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이 나온 곳을 선정해 3000억 원과 양성자가속기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여러 곳이 방폐장 유치에 나섰다. 치열한 경쟁 끝에 경북 경주시가 승리해 모든 것을 가져갔다.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도 유치했다. 한수원 본사와 방폐장을 건설하면서 경주시는 새로운 도로도 얻게 됐다. 학자들은 방폐장 유치로 경주시가 얻은 이익이 직·간접적으로 5조 원대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부안 사태는 경주의 방폐장 유치에 반면교사 구실을 했다. 그것이 부안을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2014년 지방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그는 맨땅에서 사과의 큰절을 올렸다. “11년 전 주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죄송하다”고 읊조리면서. 그의 진정성을 눈물과 온몸으로 말한 것이다. 자신이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하지 않았으면 부안 사태를 겪지 않았을 것임을 인정했다. 주민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방폐장을 유치하려고 했다는 그의 주장을 듣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지역의 주인은 주민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주민들은 부모처럼 그를 다른 눈으로 바라봤다.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의 결정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증오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다. ‘핵폐기장 군수’는 8년 만에 컴백했다.

    부안 경제는 여전히 어려웠다. 인구는 6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희망을 꿈꾸지 못하고 정체의 늪은 깊었다. 주민들은 그 아득함을 12년 전 방폐장을 유치해 해결해보려 한 그에게 풀어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정부가 부안엔 어떠한 방폐장도 짓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니 방폐장 문제는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새만금 방조제 완공에 따르는 부수 효과를 기대했으나 그것은 군산의 몫이었다. 부안 사태 이후 정부가 부안을 외면해온 것이 이러한 정체를 만들었다. 갑갑했다. 어떻게 부안 경제를 살릴 것인가. 그는 국민에게 호소한다. ‘부안 사태로 정부와 국민은 17년 난제이던 중저준위 방폐장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누구도 부안의 희생 덕에 중저준위 방폐장이 건설됐다는 데 주목하지 않는다. 부안은 갈등과 가난만 떠안았다’고 그는 국가 난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한 부안을 재평가해달라고 요구했다.

    “앞으로도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 못할 난제가 많을 것이다. 원전을 유치해 지역을 발전시키려 한 김대수 삼척시장이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하고, 그를 제치고 당선된 김양호 신임 삼척시장이 2015년 주민투표를 해 신규 원전 건설에 반대한 것을 보라. 지역의 도움을 받으려면 정부는 정부 시책에 호응한 지역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



    성패 상관없이 보상하라

    그는 역발상을 하라고 주문한다. 조만간 정부는 고준위 폐기물 중간시설이나 처분장을 지어야 하는데, 지자체가 나서지 않으면 이를 건설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부안은 고준위 폐기물 중간시설이나 처분장을 유치할 수 없다. 이 시설은 두꺼운 암반지대에 지어야 하는데 부안엔 그런 암반이 없다. 대신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내놨다.

    “정부는 부안 사태 때도 그랬듯이, 삼척이 주민투표로 신규 원전 건설을 반대할 때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국가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국가 난제 해결에 협조하려 한 지역에는 성패와 관계없이 보상을 해줘야 한다. 성공했으면 경주처럼 당연히 지원한다. 그러나 실패해도 지원해주면, 지역은 갈등으로 치른 아픔을 달랠 여유를 갖는다. 이것이 국민 대통합이고, 국가 난제를 부드럽게 풀어가는 진짜 ‘햇볕정책’ 아니겠나.”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만들었다. 대통합위는 한국을 분열시키는 갈등을 이념·계층·세대·지역의 4개로 보고 4대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대통합의 상징으로 국가 난제이던 중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하려다 부안 사태라는 초유의 아픔을 겪은 부안을 지원하는 방안을 선택할 수는 없을까.

    “원전 문제를 놓고 국론이 결집되지 않고 국민이 흩어지는 것은 정부가 부안을 버리고, 삼척을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오로지 성공만 쳐다보는 것 같다. 그러니 성공할 자신이 없으면 어느 지역도 나서지 못한다. 실패한 지역도 토닥여야 한다. 그래야 두려움을 떨치고 유치에 나서는 지역이 생긴다.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하면서 국가 난제를 풀면 국민 대통합도 이루게 된다.”

    그는 농업만으로는 부안을 살릴 수 없다고 보고 수생공원 유치에 다 걸기를 하고 있다. 버려진 갯벌을 국가공원으로 만들어 지역경제를 살린 전남 순천시처럼 부안도 수생생태공원을 유치해보겠다는 것. 그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이를 위한 지원을 받고 싶어 한다. 부안에 투자해 함께 발전해보자는 것이다. 그는 “실패한 자를 안아주라”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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