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공동기획 | 新東亞 macromill embrain ‘좌절세대’와 중산층

성별이 스펙, ‘성보라’는 없다

더 힘들고 더 불안한 ‘알파걸’들

  • 유설희 | 자유기고가 zorba8251@naver.com

    입력2016-04-04 16: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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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입사원 10명 뽑으면 8명은 남자”
    • 결혼하고 출산하면 ‘구조조정 1순위’?
    • 여성 10%만 “노력하면 중산층 될 수 있다”
    3월 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그날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역 부근 카페에서 김지혜(가명·31) 씨를 만났다. 법조인의 꿈을 품고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법대 중 한 곳에 진학한 재원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견 기업에 다닌다.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려면 1억 원 정도가 필요해요. 부모님이 무리해서 지원해주실 순 있지만, 두 분 노후자금을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다고 대출을 받아 로스쿨 가는 건 무모하다 싶었습니다. 변호사가 너무 많아 로펌 취업도 어렵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다. 로스쿨 진학 준비부터 변호사가 되기까지는 평균 4.77년간 총 1억579만 원이 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천도정·황인태, ‘법조인 선발제도별 법조계 진입 유인 실증분석’, 2014).

    결국 김씨는 로스쿨 진학을 접고 취업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그는 “신입사원 10명을 뽑으면 그중 8명은 남자라는 데 공감하지 않는 여성 취업준비생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년 넘는 취업준비생 시절을 보낸 끝에 지금 회사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 분)와 대비된다. 반지하 방에 세 들어 사는 집의 큰딸 성보라는 서울대학교에 보란 듯 붙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해 법조인의 꿈을 이룬다. 김씨는 이 드라마를 보며 씁쓸했다고 한다.





    ‘서울대 女’보다 ‘중경외시 男’  


    “1980~90년대에는 가능한 일이었는지 몰라도 요즘엔 가난한 집 딸이 서울대 간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에요. 서울대 재학생 중 70%가 강남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잖아요. 성보라가 현재를 산다면, 어찌어찌 서울대에 진학했더라도 로스쿨은 못 갔겠죠. 취업도 어려웠을 겁니다. 서울대 졸업한 여자가 중경외시(중앙대·경희대·외국어대·서울시립대) 나온 남자보다 취업이 더 안 되거든요. 피 터지게 공부해 서울대 졸업장을 따더라도 여자라면 별 볼일이 없는 거죠.”

    만 20~29세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신동아-엠브레인의 ‘20대 중산층 인식’ 표본 조사 결과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20대 여성의 미래 전망이 20대 남성보다 훨씬 더 암울하게 나타난 점이다.

    앞으로 15년 후 자신의 기대소득을 ‘월 300만 원 이상’으로 낮게 예상한 비율이 남성은 36%에 그쳤지만, 여성은 52%에 달했다. 20대는 미래의 중산층 소득을 ‘월 500만 원 이상’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20대 여성 2명 중 1명은 자신이 중산층 수준의 소득을 올리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중산층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비율도 남성 32.2%, 여성 17.7%로 차이가 두드러졌다. 20대 여성 10명 중 4명은 ‘될 수 없다’(44.3%), 또 다른 4명은 ‘모르겠다’(38%)고 했다.

    20대 여성의 잿빛 미래 전망은 ‘알파걸’ 현상을 고려할 때 이례적이다. 여성은 2009년 이후 대학 진학률에서 남성을 앞질렀다. 2013년에는 여학생 74.6%, 남학생 67.6%로 무려 7%포인트나 차이가 난다. 여성의 학력이 남성보다 더 높아졌는데도 왜 ‘미래 전망’에서 남녀 간 인식 차이가 벌어지는 걸까.



    곳곳에 성차별 지뢰

    ‘신동아’가 만난 20대 여성 10여 명은 가장 큰 이유로 능력보다 성별을 기준으로 사람을 채용하는 기업 인사를 꼽았다. 다음은 경영학과를 졸업한 직장인 김모(28·여) 씨의 말이다.

    “우리 과 동기인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 대기업 최종면접에 갔다. 과 애들 모두 여자가 될 거라고 여겼다. 여자는 학점이 4.0을 넘고 토익도 만점에 가까웠다. 언변도 뛰어나고, 성격도 웬만한 남자처럼 서글서글했다. 그런데 여자는 탈락하고 남자가 합격했다. 상심에 빠진 그 친구에게 과 여자 선배들이 ‘고추가 스펙’이라며 위로해줬다.”

    언론사 입사를 희망하는 명문대 문과대 졸업생 이모(29·여) 씨는 “문과 출신 여학생들이 언론사 입사를 특히 선호하기 때문인지, 지원자 10명 중 여성이 7명, 남성이 3명이다. 그런데 최종합격자 성비(性比)는 뒤집히곤 한다. 10명이 붙으면 여성은 3명, 남성은 7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언론사에서조차 성차별이 있는데, 일반 기업은 훨씬 더 심각하지 않겠냐”고 토로했다.

    남성 신입사원을 선호하는 ‘채용 관문’을 뚫기 위한 여성 취업준비생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최모(29·여) 씨는 “면접 볼 때마다 여성스러움을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다”며 “취미란에도 등산처럼 남성 임원들이 좋아하는 것을 적어 넣었다”고 했다. 그는 모 기업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다”고 털어놓았다.



    “남자는 8, 9등을 해도 정식 채용될 수 있지만, 여자는 1, 2등을 해야 간신히 붙어요. 실력이나 체력이 남자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도 두 배로 하고, 술도 제일 많이 마셨어요. 야유회로 등산할 때 가장 앞서 산을 올라갔고요.”

    성차별의 ‘벽’을 넘어 취업에 성공해도 20대 여성은 계속 불안감에 떤다. 결혼, 출산 등으로 업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물론, 회사에 위기가 닥치면 ‘구조조정 1순위’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의 본사에서 근무하는 박모(28·여) 씨는 “결혼해도 아이는 안 낳을 것”이라고 한다.

    “육아휴직을 쓴 여자 선배들을 보면 모두 원래 일하던 본사로 복귀하지 못하고 매장으로 발령 났어요. 그리고 다시는 본사로 돌아오지 못해요. 제가 본사에 입사하기까지 정말 힘들었거든요. 계속 본사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어요. 만에 하나 아이를 낳더라도 절대로 육아휴직은 안 써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박모(36·여) 씨는 7년 전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해 9급 공무원이 됐다. 진로를 바꾼 이유에 대해 그는 “사기업에서 여성이 정년까지 근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내 생계는 나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회사에 나이 많은 여자 상사가 아예 없더군요. 여직원은 죄다 20, 30대였어요.”


    당당한 여직원의 뒷배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가 통계청의 2010년 인구 총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모든 학교교육을 마치고 직장 경험도 쌓아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인 30, 40대 남성은 86%가 일자리를 갖고 있는 반면,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53%만 일자리를 갖고 있다. 대졸자로 한정해도 별 차이가 없다. 대졸 남성은 90%, 대졸 여성은 57%만 경제활동을 한다(‘여전히 페미니스트가 옳다’, 주간동아, 2015년 978호). 김 교수는 “30, 40대 미국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73%로 한국보다 20%포인트나 높다”고 했다.

    또한 한국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돈을 못 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 꼴찌 수준. 여성은 남성보다 36.6% 적은 임금을 받는다(2014년 기준). 한국 기업의 여성 임원 비중은 0.4%로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어떻게 하면 경제활동에서의 성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까. 20대 여성들은 그 방편 중 하나로 ‘자격증 있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이 또한 ‘금수저’가 아니면 어렵다고들 한다. 로스쿨에 재학 중인 강모(29·여) 씨는 “로스쿨 동기나 선후배 중에는 법조인 자제가 정말 많다”며 “아버지가 지방 공무원인 내가 가장 가난한 것 같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직장을 가지려면 몇 년씩 스펙을 쌓으며 견뎌야 하는 시대잖아요. 당연히 부모가 용돈 등 뒷바라지해주는 사람들이 유리하죠.”

    20대 여성들은 채용 과정에서도 부모의 능력이 곧 자신의 실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박모(28·여) 씨는 “입사동기 중 여자는 저를 제외하고 딱 한 명인데, 우리 회사의 중요 거래처 임원 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되진 않았지만, 그 여자 동기는 일을 너무 못해요. 대학도 경기도에 있는, 별로 들어본 적 없는 대학을 나왔어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보다는 부모 배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조모(32·여) 씨는 두어 군데 ‘작은 회사’를 거쳐 재벌그룹 계열사에 취직했다. 그는 “좋은 부서에 배치받고, 별 눈치 안 보는 여성 직원 뒤에는 든든한 부모가 있더라”고 했다. “자신의 전공과 전혀 맞지 않는데도, 우리 회사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업부에 근무하는 여자 직원이 있어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태도여서 신기했는데, 최근에 그녀의 아버지가 다른 계열사 대표이사란 사실이 사내에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일까. 이번 신동아-엠브레인 조사에서 과반의 여성이 중산층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경제력, 사회적 배경 등 부모의 능력’을 꼽았다. 이렇게 응답한 여성은 65.3%로 남성(48.8%)보다 16.5%포인트나 높았다. ‘나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한 20대 여성은 10.8%에 불과했다. 반면 남성은 두 배 가까운 22.8%가 ‘나의 노력’이라고 믿었다.


    성보라가 없다면

    기성세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직장 탄탄한 남성과 결혼해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20대 여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취업 못 하면 결혼도 못 한다”고 말한다. 취업준비생 한모(28·여) 씨는 “결혼한 친구들 중 한두 명을 제외하곤 전부 직장인”이라며 “요즘은 맞벌이를 해야 어느 정도 먹고사니까 남자들도 직장여성을 선호한다. 취업 못 하면 소개팅조차 기회가 없다”고 했다.  

    ‘엄마도 때론 사표 내고 싶다’ 저자이자 여성학 연구자인 문현아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는 “여성 국회의원이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하면 미움을 산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양성평등에 대한 인식 수준이 너무 낮다”고 지적했다. 김영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20대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성취를 원하도록 고등교육을 받아왔다”며 “그런데 사회에서는 성취욕이 성차별로 인해 좌절되므로 20대 여성이 불만이 높고 미래에 대해 많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남성 중심 기업문화를 고집한다면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물론 기업의 경쟁력도 약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성장 시대, 양성평등이 없다면 ‘성보라’는 없다. 성보라가 없다면 미래는 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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