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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여사가 윤이상 묘지에 동백나무 심은 까닭은

50주년 맞은 ‘동백림 사건’에 부쳐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김정숙 여사가 윤이상 묘지에 동백나무 심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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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9년 신동아 4월호 기사로 실체가 처음 드러나
  • ● “확대 과장된 것은 맞지만 조작된 것은 아니다”
  • ● 윤이상 탄생 100주년과 맞물려 문재인 정부 해법 나올까
화가 이응노,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 번역가 천병희, 철학가 임석진….
20세기 한국 문화예술 및 학술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활동 영역과 공간이 달랐던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동백림 사건’으로 얽힌 인물이라는 점이다.

요즘 세대에겐 동백림이란 표현 자체가 낯설다. 백림(伯林)은 독일 베를린의 한문 표기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베를린은 동독 영토 한복판에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군의 합의에 따라 그 서쪽 영역은 서독 땅이었고 동쪽은 동독의 수도였다. 이를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구별했는데 동백림은 바로 그 동베를린을 지칭한다.

이 동백림이란 지명이 인구에 회자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1967년 7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발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 사건이다. 정확한 호칭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 유럽(주로 서독과 프랑스)을 무대로 유학했거나 유학 중인 인텔리 지식인과 예술가 194명이 관련된 ‘건국 이후 최대 간첩 사건’이었다. 황성모 서울대 교수(사회학) 포함해 현직 교수만 15명이나 됐다. 관련자 중 15명은 1958년 9월부터 1967년 5월 사이에 동베를린에 있는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북한과 접선해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7명은 당시 미수교국인 소련과 중국을 경유해 직접 평양까지 방문, 밀봉교육을 받고 귀국해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공표됐다.

윤이상·이수자 부부와 천병희는 북한에 넘어갔던 7명에 포함됐고, 이응노·박인경 부부는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과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했다는 15명에 포함됐다. 천상병은 유럽 근처에 간 적도 없었지만 서울대 상대 동기인 강빈구 교수에게서 “동독에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도 고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협박해 돈을 받아 챙겼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독일 유학생 출신의 임석진은 평양을 두 차례나 다녀왔고 노동당 입당원서까지 썼지만 최초 제보자라는 이유로 기소 대상에서조차 제외됐다. 이들은 모두 북한과 연루된 행적 자체는 인정했지만 사상적으로 북한에 동조하거나 남한에 대한 이적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럼에도 임석진을 제외하곤 유죄판결을 받아 최장 2년 옥살이를 해야 했고 이는 그들 영혼에 크나큰 낙인이 됐다.





‘건국 이후 최대 간첩사건’

동백림 사건 발표의 충격은 크게 두 갈래에서 발생했다. 첫째는 규모다. 중정은 7월 말까지 총 315명을 조사해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이 중 34명에게 ‘간첩죄’와 ‘잠입죄’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또 이 사건에 연루된 황성모 교수가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서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조직해 정부 전복을 시도했다며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김중태와 현승일 등 관련자 7명을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민비연 사건은 나중에 분리 처리되지만 처음엔 한 묶음으로 엮여 있었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타이틀은 1992년 10월 6일 400여 명의 조직원이 연루됐다고 발표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발표될 때까지 유지됐다.

둘째는 관련자들의 면면이었다. 이후 문화예술계와 학계에서 한국을 대표할 인사들이 줄줄이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응노는 20세기 한국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서게 되고, 윤이상은 동양과 서양의 음악적 가교를 놓은 천재음악가로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다.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오래 살지 않았지만 중정의 심문 과정에서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반평생 고생한 천상병은 가장 순수한 한국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독문학자였던 천병희는 10년간 자격정지로 교수직을 잃었지만 국내 최고의 그리스어 원전번역가로 우뚝 섰다. 임석진 역시 고변자라는 손가락질 속에서도 국내 헤겔 철학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규모와 면면에 놀란 한국 지식사회는 숨을 죽였다. 당시 유럽 유학생은 지식인 사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용공 좌경화됐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그 여파로 전 세계 곳곳에서 학생운동이 뜨겁게 분출하던 1968년 유독 한국에서만 학생시위가 발생하지 않는 이례적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1969년 3월 31일 최종심 판결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단 1명도 나오지 않았다. 정하룡, 정규명 2명에게 사형, 조영수에게 무기징역, 윤이상과 천병희 등 4명에게 징역 10년, 이응노에게 5년형이 언도됐지만 간첩죄가 아니라 반공법 위반 혐의였다. 그나마도 독일과 프랑스에 있던 교민을 국내로 연행하는 과정이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바람에 정부는 1969~1970년 실형을 언도받은 15명을 모두 석방했다. 윤이상 천병희 이응노 등 12명은 형 집행정지로, 중형을 선고받은 정하룡 정규명 조영수 3명은 형집행면제로 1969~1970년 사이 다 풀려났다.


6·8 부정선거 무마용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따로 없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정부가 10일간 7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사 내용을 발표하며 동백림 사건을 한국 사회 전면에 부각한 것은 공작정치의 일환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건 관계자를 추적해 이를 최초로 심층 보도한 ‘신동아’ 1989년 4월호 기사 ‘동백림사건과 6·8 부정선거’는 1967년 6월 8일 치러진 국회의원선거 부정시비를 덮기 위해 동백림사건이 이용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1971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3선 길을 열어줄 ‘3선 개헌’을 위해 6·8총선에서 대대적 부정선거를 자행해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결과적으로 74%의 의석 확보)을 확보했다. 당시 131개 선거구에서 266건의 선거소송이 제기됐는데 이는 1963년 총선의 선거소송 38건에 비해 7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 기사를 쓴 전진우 기자는 당시 명지대 교수였던 임석진과 익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이 사건을 제보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독일 유학 시절 북한에 포섭됐던 임석진은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동창으로 독일유학 중이던 이기양 조선일보 기자를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에 소개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1967년 5월 이기양 기자가 체코에서 실종된 사건이 발생한다. 당국이 수사에 나서면 자신의 죄도 드러날 것이 두려웠던 임석진은 백방으로 구명 줄 찾기에 나섰고 (박 대통령의 처조카 홍모 씨를 움직여) 5월 19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독대에 성공했다.

임석진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당시 당국의 해외송금 제한 조치로 유럽의 한국 유학생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용돈조로 수백 달러씩 찔러주는 북의 포섭활동에 광범위하게 노출된 실태를 자세히 설명했다고 밝혔다. 또 그런 북한의 포섭활동에 노출된 인사의 명단을 제출하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에 포섭된 사람들 거의 대부분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점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를 2시간 넘게 경청한 뒤 “잘 알았네, 진상을 파악하고 나서 관련자들의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보장해주도록 하지”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이 사안이 간첩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한 셈이다. 하지만 두 달 뒤 이 사안이 역대 최대 간첩 사건으로 둔갑한 것을 보고 임석진도 크게 놀랐다고 했다.

무엇이 이런 변질을 낳았을까. 동백림 사건과 민비연 사건의 연결고리로 구속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황성모 교수는 “처음엔 당국에서 엄중 경고 차원에서 뒤처리하려 했으나 6·8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확대되자 방침을 급선회해 사건을 확대, 과대 포장하기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동베를린에서 북에 포섭된 황성모의 지도를 받는 민비연이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하고 있으므로 결국 학생데모는 북한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삼단논법을 만들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설명이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가 이 사건에 대해 발표한 조사결과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과거사위는 처음부터 중정이 기획 조작한 것은 아니라고 적시했다. 임석진의 제보로 수사에 착수했고 사건 관련자들이 동베를린(50명) 및 북한(12명) 방문, 금품수수(26명), 특수교육 이수(17명), 북측 요청사항 이행(12명) 등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실체는 있지만 확대·과장된 사건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보면 대부분 단순한 대북접촉 및 동조행위에 불과했음에도 국가보안법 및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한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6·8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으며 이는 민비연을 동백림 사건과 무리하게 엮으려 한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고 적시했다.

과거사위는 또 독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 등 외국으로부터 30명의 용의자를 연행해온 것은 해당국의 주권과 국제법을 무시한 불법행위라는 점에서 ‘이 사건이 처음부터 잘못된 사건임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특히 윤이상에 대해서는 국내로 불법연행, 일부 강압수사, 소극적 대북 행적에 대한 간첩죄 적용으로 ‘윤이상=간첩’이란 오명을 쓰게 한 점에서 ‘부당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또한 결정적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지만 천상병 등 최소 14명에 대한 고문 가능성은 높다고 판단했다.

사건의 실체적 진상이 규명되고 50주년을 맞았지만 관계자들의 한은 풀리지 않은 듯하다. 과거사위는 정부 차원의 사과를 권고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고 주요 관계자 중 상당수는 이미 숨을 거뒀거나 노환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천상병은 1993년 고문후유증으로 63세의 나이에 숨졌다. 1983년 프랑스로 귀화한 이응노는 1989년 파리에 묻혔고, 1971년 독일로 귀화한 윤이상은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95년 베를린에 묻혔다. 최초 제보자 임석진(85) 명지대 명예교수는 고령으로 인한 노환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천병희(78) 단국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며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도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됐다 무혐의로 풀려난 박범진(77)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은 “동백림 사건 관계자들이 북한에 포섭된 것 자체가 맞기에 조작은 아니지만 간첩죄 적용은 잘못”이라며 “민비연 사건은 그와 완전 별개의 것으로 사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고 과거사위 발표에 동의했다. 과거 박 이사장은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과거사위의 발표를 부인하며 자신이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 입당한 인혁당은 실체가 분명이 있었던 조직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올해는 동백림 사건 50주년인 동시에 윤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G20정상회의 참석차 독일 베를린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7월 5일 윤이상의 묘소를 참배하며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를 심었다. 한자는 다르지만 동백림의 동백을 연상시키는 이벤트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계기로 동백림 사건과 그 사건 이후 친북 행적으로 국내에서 반감이 큰 윤이상의 악연을 풀어나갈까. 지켜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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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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