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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 일정한 모형

  • 김상희

[시마당] 일정한 모형

내 손에 바구니가 있다 갈색의 커다란 바구니다 내가 주워 담아왔던 것들이 전부 이곳에 들어있다 깨진 액자와 식칼과 책과 문장과 사랑과 너와 우리가 한데 엉켜있다 나는 아주 열심히 바구니를 채웠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싶은 마음을 웃고 싶을 때는 웃고 싶은 마음을 죽고 싶을 때는 죽은 나의 모습을 눌러 담았다 바구니에 손을 넣어보면 어느 부분은 차갑고 어느 부분은 뜨거웠다

바구니에서 식칼을 꺼내 거울 앞에 섰던 날에도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바구니에 담았다 나 대신 바구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구니를 구석에 던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피를 흘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담아온 바구니가 비어버린 날도 있었다 그럼 난 비어있는 바구니를 안고 어쩔 줄 몰랐다 울면서 하천을 거닐고 신발을 신은 채 물가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상을 하느냐고 온몸이 젖었다

선생님 제 바구니가 텅 비었어요 이것저것 많이 담아온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구니 안이 전부 비어있었어요 손을 넣어봐도 끈적하고 까만 것만 바닥에 붙어있었어요 선생님은 마음을 비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구니는 텅 빈 채로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또다시 아픈 모습으로 내 꿈에 나타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죽이려 한다 바구니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것을 잃고도 왜 일정한 모형을 유지한 채 내 손에 달려있을까



바구니를 깨끗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하나, 둘, 셋 하면 내가 사라져 있기를 기도하며 조용히 아침을 기다렸다 옷은 오랫동안 마르지 않았다

[Gettyimage]

[Gettyimage]

김상희
● 2001년 충남 부여 출생
● 2022 ‘창작과비평’ 신인문학상 등단



신동아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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