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금융권 인사 개입? 뒷말 무성
금융 당국 입김 커지자 낙하산 인사說 확산
이복현 금감원장 “CEO 선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한국노총 “李 원장 발언 자체가 외압”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오른쪽)이 2022년 11월 14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열리는 8개 은행지주(KB·신한·하나·우리·농협·BNK·DGB·JB) 이사회 의장들과 오찬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관치 금융의 부활을 우려할 만한 정황은 갈수록 자주 눈에 띄고 있다. 여러 우려의 목소리 속에서도 금융 당국이 지속적으로 금융사의 최고경영자(CEO)를 압박하면서다. 그 중심에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있다. 이 원장은 검사 출신으로 취임 때부터 금융사들을 긴장하게 한 인물이다.
이 원장은 2022년 11월 14일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들과 만나 “최고경영자(CEO) 선임이 합리적인 경영 승계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별하게 노력해 달라”고 언급했다.
언뜻 원론적인 언급 같지만 금융권은 술렁였다. 이 원장의 발언이 듣기에 따라서 ‘경고성’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 이를 호들갑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금융사들로서는 정황상 충분히 우려할 만한 타이밍이었다.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중징계 의미
앞서 금융위원회는 같은 달 9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중징계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과거 우리은행장 재임 당시 불거진 라임펀드 사태의 책임을 물어 ‘문책 경고’를 내린 것이다.이미 손 회장은 2020년 파생결합펀드(DLF)와 관련해 중징계를 받았다. 이후 손 회장 측이 취소청구 소송을 냈고 1·2심에서 승소하면서 금융 당국이 체면을 구겼다. 이런 와중에 금융 당국이 추가 제재까지 가한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2023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손 회장의 연임 가능성도 열어둔 터라 금융 당국이 손 회장의 퇴진에 압박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정치권의 입김으로 손 회장의 중징계가 강행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손 회장에 대한 중징계 결정 다음 날인 11월 10일 이런 지적에 대해 이 원장은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며 “혹여 외압이 있다면 정면으로 그것을 막겠다”고 단언했다. 이어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이든 이해관계자든 외압에 맞서고 대응하는 일을 20년간 (검사로서) 전문성을 갖고 해왔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도 손 회장의 징계 취소 소송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금 같은 경우 급격한 시장 변동에 금융 당국과 금융기관들이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며 “당사자(손 회장)도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금융권은 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표현을 손 회장의 퇴진을 사실상 압박하는 언급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나흘 뒤 CEO 선임에 대해 이 원장이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발언했으니 금융권에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금융그룹 이사회 의장은 회장추천위원회 등 CEO를 선임하는 위원회 핵심 멤버다. 더욱이 새 정부 들어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CEO 인사를 앞두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구심은 더욱 컸다.
이런 가운데 손 회장은 최종적으로 불명예에서 벗어나게 됐다. 12월 15일 대법원 2부는 손 회장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문책 경고 징계를 취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징계가 취소되면서 손 회장은 금융회사 임원의 문책 경고시 금융권 취업 3년 제한 규제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금융권에서는 실제 낙하산 인사의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부 출신 손병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내외부의 평가가 좋아 연임이 점쳐졌지만 윤석열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이 유력하게 떠오르며 흐름이 뒤집혔다. 신한금융 역시 연임이 유력했던 조용병 회장이 차기 회장 후보 결정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용퇴를 결정하면서 금융권을 놀라게 했다. 결국 신한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진옥동 신한은행장을 차기 대표이사 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자리에도 관 출신 인사가 거론되며 노조의 반발을 샀다. 국책은행이나 정책금융기관은 물론 민간 금융사 CEO 자리에도 외풍이 불고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도 인사 영향 미치나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금융 당국은 또 하나의 카드를 꺼내 들어 눈길을 끌었다. 바로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불리는 방안이다.금융위는 11월 29일 ‘금융권 내부통제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 중간 논의 결과’를 발표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소비자들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는 대규모 금융사고에 대해 대표이사, 이사회, 임원 등 통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최종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며 “추후 관련 법령을 확정하고 가능한 한 빨리 시행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업계 안팎에서는 금융권 직원의 대규모 횡령 등 내부통제 부실로 인한 대형 사고가 발생해도 누가 어떤 책임을 지는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김 부위원장은 “내부통제 관련 권한을 하급자에게 위임할수록 임원이 책임을 면할 수 있어 임원의 내부통제에 대한 의도적인 무지와 무관심을 부추기는 부작용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며 “사고 발생 시 임원들이 ‘어떠한 방지 노력을 취했는지’를 적극 소명토록 하고, 소명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재하는 상식을 제도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간 모호했던 CEO의 책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겠다는 원칙에 이견을 달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 방안 역시 타이밍이 공교롭다는 점에서 의심을 받을 만했다.
금융권에서는 낙하산 인사에 대한 하마평과 금감원장의 압박이 이번 방안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다. 더 나아가 관치금융을 위한 초석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CEO 인사를 앞둔 금융권에 다시 한번 경고를 준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자 노동단체들이 앞장서서 목소리를 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11월 21일 “금융권에 또다시 관치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면서 “이 원장이 수장 선임과 관련해 발언하는 것 자체가 외압이고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금융사들은 이미 자체적인 CEO 승계 규정과 육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그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금융 당국의 역할이라는 게 한국노총의 주장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 역시 “현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날리고 외압을 통해 낙하산 인사를 하려는 의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원장이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들에게 한 언급에 대해서는 “특정인(손태승 회장)을 지칭한 말이며 이사회 의장에게 ‘감히 후보로도 내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노동단체의 주장이나 금융사들의 불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낙하산 인사에 대한 하마평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지켜볼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官 출신 인사 거론은 시대 흐름 역행”
이 원장도 관치 논란이 커지자 “원래 예정했던 (금융지주) 이사회 의장단 간담회와 금융위 전체회의 제재(손태승 회장 중징계 관련) 결정의 시기를 일부러 맞춘 건 아닌데, 공교롭게 그렇게 됐다”며 “오해 없이 봐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그는 특히 수협은행장에 내부 인사 출신이 선임된 것을 거론하면서 “(후보군에) 전직 관료 출신, 금융 공무원 출신들이 있었는데 (은행장에) 선임된 분을 보면 의도를 가지고 이사회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게 명확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사회가 법의 권한에 따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의사를 행사하는 데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금융권에서도 일단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여론은 있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는 거둬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과거 MB정권 시절 이른바 4대 천황이 금융권을 쥐락펴락하며 장악하던 식의 노골적인 관치가 되살아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다만 농협금융이나 IBK기업은행 등을 보면 최근 내부 출신 CEO가 선임되는 등 관치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분위기였는데, 다시 관 출신 인사가 거론되는 등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를 할 필요는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