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부부가 30년 전 냉동된 배아를 이식해 쌍둥이를 낳았다. [미국 전국배아기증센터]
많은 이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배아(수정란)가 냉동 보관된 지 무려 30년 만에 해동되면 건강한 배아라고 볼 수 있을까. 오랫동안 동결 보존이 됐다가 해동된 배아로 임신이 된다면 과연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까.
결론부터 말하면 동결 보존된 배아는 1년이 지나든 2~3년이 지나든 상태가 다르지 않다. 배아가 동결되는 순간 생물학적 활동이 정지되고 세포 내 결빙이 생기지 않으면 해동 후 생존율이 85~90%에 달한다. 해동 후 생존율이 높아진 것은, 동결 시 결빙이 형성되지 않고 해동 후에도 회복력이 높은 유리화 동결법(vitrification) 덕분이다. 배아를 냉동 보존할 경우 보존 기간이 길수록 임신·출산 성공률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냉동 보존 기간이 신생아의 건강과 안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게 임상 경험을 통해 입증됐다.
필자는 30년 전 냉동한 배아를 이식받아 출산에 성공한 미국의 난임 부부와 이를 이끈 시험관아기시술(IVF) 의료진에 경의를 표하지만, 솔직히 30년간 배아를 동결 보존했다는 데 머리를 갸웃했다. 30년 전이면 1990년대 냉동한 배아라는 얘기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배아 냉동법이 발전하지 않아 배아가 원 상태로 회복이 안 돼 폐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화 동결법도 당시 막 개발된 상태여서 실패율이 높았다.
배아를 냉동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IVF에서는 배아를 동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일까. 배아 이식 방법에는 신선 배아 이식(fresh embryo transfer·Fresh ET)과 냉동 배아 이식(Thawing embryo transfer·Thawing ET)이 있다. 과배란 유도로 여러 개의 난자를 채취해 정자와 수정을 시킨 후 3~5일간 체외 배양을 거쳐 자궁 내로 바로 이식하는 게 신선 배아 이식이다. 이렇게 신선 배아 이식을 하고 남은 배아 중에서 착상 가능성이 높은 배아를 동결 보존해 다음 번 IVF 때 해동시켜 자궁 내에 이식하는 것이 냉동 배아 이식이다.요즘은 신선 배아 이식보다 배아를 모두 냉동했다가 이식하는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배란 유도 후 생기는 과배란 자극증후군을 피하기 위해서다. 또한 신선 배아 이식보다 냉동 배아 이식의 임신 성공률이 다소 높다. 나이가 많은 여성은 난포 수가 적어 매달 자연 배란으로 난자를 채취해 배아를 냉동해 뒀다가 모아서 냉동 배아 이식을 하는 방법도 이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난임 시술에서 과배란으로 인해 잉여 배아가 생길 수 있다. 난임 부부는 이 배아를 IVF 재도전에 사용하거나, 임신에 성공했다면 둘째 아이 임신을 위해 동결해 놓기를 원한다. 그런데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25조(배아의 보존 및 폐기)에서는 난임병원의 배아 보존 기간을 5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당사자(IVF를 원하는 부부)가 항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치료를 받는 경우 5년 이상 배아를 동결 보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30년 동안 배아를 냉동 보관하는 게 법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다.
일각에서 동결 보존 기간에 대한 법적 제한을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난임 시술을 하는 난임전문의로서 이런 제한은 매우 현실적이라고 본다. 실제로 난임 부부 중 첫째 아기를 IVF로 힘들게 출산한 뒤 동결보존한 배아로 둘째 아기를 임신하기 위해 재방문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만약 배아 동결 보존 기간에 법적 제한이 없다고 치자. 첫째 아기 출산을 끝내고 소식이 없다가 5년이 훌쩍 넘어 불쑥 찾아와서 IVF를 해달라고 한다면, 시술의 성공 여부를 떠나 산부인과 의사로서 난감할 수밖에 없다. 노령 산모가 겪을 수 있는 건강상의 문제점을 간과할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암 같은 질환을 앓은 터라 완쾌됐을 때 배아를 이식받고 싶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말리고 싶다. 아무리 20대에 배아를 냉동해 놨다고 하더라고 쉰이 넘은 나이에 이식을 받으면 노령 산모에게 생기는 고혈압, 아기의 발육 부전, 임신성 당뇨 등은 물론이고 쌍둥이 임신까지 된다면 만삭까지 끌고 간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부럽다… 다른 선진국 불임 극복 지원 제도
다음은 25년 전 겪은 일이다.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50세 중반의 부부가 젊은 여성의 난자를 공여받아 쌍둥이 임신에 성공하지만, 그 여성은 임신 중기를 넘기지 못하고 중절수술을 해야만 했다. 당시 임신 주수가 늘어날수록 혈압이 빨리 뛰고 당뇨와 단백뇨 증세가 나타났으며 혈당 조절이 잘 되지 않아 대학병원으로 보냈더니 대선배인 산부인과 주임교수가 ‘이러다 사람 잡겠다’며 임신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통보해 왔다.무엇보다 배아가 냉동 보존된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임신율도 떨어진다. 2021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논문에 따르면 유리화 동결법을 적용한 1년 미만 동결 배아를 이식받아 임신과 출산에 성공한 171케이스와 5년 이상 동결된 배아를 이식받은 171케이스를 비교했는데 임신 성공률은 61.4%에서 49%로, 출산율은 52%에서 37.4%로 떨어졌다.
난임전문의로서 난임 부부에 대한 다른 선진국의 개방적 제도와 문화가 부러운 게 사실이다. 미국의 민간 기관인 국립배아기증센터는 난임 부부가 아닌 불임 부부(無난자, 無정자)에게 배아를 공여한다. 배아로 기증자의 신체와 유전 조건, 교육수준, 직업, 문화적 취향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국립배아기증센터의 배아 공여를 통해 출산에 성공한 불임 여성이 1260명에 달한다.
유럽에서는 유전적이거나 후천적 질병으로 남녀 모두 불임인 경우 아내의 자궁 상태가 양호하면 배아 공여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정자은행에서 배우자가 아닌 이의 정자를 공여받거나 난자 은행에서 타인의 난자를 공여받는 일도 모두 가능하다. 불임 부부뿐 아니라 동성애 부부까지 동결 배아, 정자, 난자를 공여받아 임신에 도전할 수 있다. 유대인 불임 부부가 사설 생식은행(정자, 난자, 배아)을 통해 유대인 고유의 DNA가 담긴 아기씨(정자, 난자)를 만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생식은행(정자, 난자, 배아를 공여하는 기관)에 대해 ‘맞춤형 아기’라는 식의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출산 장려와 민족 보존 차원에서 생식은행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혈연과 민족의 고유 혈통을 고집하는 소비자(불임 부부)를 위해 배아의 게놈 지도까지 연구해 분류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우리는 인구절벽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위대한 대한민국의 영속성을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한다. 오늘 43세의 여성이 임신에 성공해 분만이 가능한 산부인과병원으로 가면서 “원장님과 제가 우리나라 인구 1명을 늘리게 됐네요”라고 쓴 카드를 주고 갔다. 2023년 계묘년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적령기에 결혼하고 가임기에 임신을 수월히 하고 아기를 낳아 편안히 키울 수 있는 인구 증가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